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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저번 시간에 제1차 십자군 전쟁까지 살펴봤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기독교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성지순례 가는 것이 자유로웠지만 갑자기 이스라엘이 그곳을 점령해야 한다며, 전쟁하자고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고 해서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1차 십자군 전쟁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점령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오늘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2차 십자군 원정군이 1147년~1149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근처에 십자군 국가 등에 거주하는 기독교인과 군소의 도시 등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십자군들은 생각보다 전쟁을 잘해나갑니다. 이슬람에서 준비를 못 했던 이유도 한몫했지만요. 그때 이슬람 측에서 영웅 이마드가 등장하여 이슬람의 전쟁에서 열세를 만회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크 왕족 중심으로 위기감이 조성되어 또다시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성직자가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성지를 지키자는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습니다.

계속된 십자군 전쟁

시간이 흘러 3차 십자군 전쟁이 1189년~1192년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1187년에 이슬람 세계의 최고 영웅인 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에 점령, 탈환되었습니다. 살라딘이 이슬람 최고의 영웅입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고 십자군원정대를 박멸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고, 이에 응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 로마 제국의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해서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습니다.

보통 십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3차 십자군이지만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 익사하였습니다.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아크레를 탈환한 뒤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면서 귀국하고 맙니다. 사실은 리처드 1세가 없는 틈에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탈환하고자 한 속셈이었지요.

어쨌든 이렇게 3차 십자군은 사실상 '리처드의 십자군'이 되고 맙니다. 사자왕 리처드는 어차피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길 것으로 여기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때 리처드는 휴전 조건으로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살라딘은 이미 누구에게도 예루살렘의 순례를 제한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4차 십자군 전쟁을 1202년~1204년 진행합니다. 또다시 교황의 요청에 따라 실행에 옮겨졌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중해를 건너는 데 필요한 수송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 자금의 부족한 부분을 지급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하였습니다.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합니다. 그런데도 베네치아는 헝가리를 공략한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새 황제가 되어 라틴 제국을 건국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교황청은 라틴 제국을 승인하고, 그 대신 예루살렘을 목표로 원정할 것을 요청했으나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웠던 4차 십자군은 다시 5차 십자군 전쟁을 1218년-1221년 동안 합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인 아크레 왕국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6차 십자군 전쟁은 1228년~1229년에 이루어집니다. 교황은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여러 번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습니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 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1239년부터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諸侯)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7차 십자군은 1248년~1249년에 있습니다. 이집트에 알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천 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습니다. 1248년 오랫동안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프랑크 왕조의 루이가 원정하였지만, 살라딘 2세의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패하고 1250년 그 자신도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고 석방되었다. 루이는 1254년까지 이집트에 머물면서 몽골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 8차 십자군은 1270년에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조의 루이 9세가 재차 출병하여 바이바르스가 주도하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루이의 동생 샤를도 형을 도와 출병하였으나 루이는 1270년 튀니지에서 사망하였고, 샤를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한편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여 사실상 십자군은 막을 내렸습니다.

지루하죠? 저도 준비하는데 지루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처음은 순수한 목적이었는데, 그 목적을 이용한 사람들이 많아져 성스러운 전쟁이 아니라 더러운 전쟁이 됐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 당시 기독교가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렇게 된 거라 봅니다. 성지순례가 가능한데 굳이 가서 내놓으라고 하니까요. 지금도 그 모습이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한 주 간 건강하시고요. 다음시간에 다른 역사로 찾아뵙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팟캐스트, 팟빵에서 방송하는 '철학인물사'를 기사로 만든 것입니다.



태그:#철학, #인물, #중세,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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