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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을 탈곡하는 과정은 숨 막힐 정도로 다이내믹했다. 커다란 기계음으로 가득한 밭에는 바짝 말려진 땅콩 포기들이 가득했는데 탈곡기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한쪽에서는 허리가 부러져라 날라야 했고, 한쪽에서는 탈곡된 꼬투리가 담긴 바구니를 연신 쌓아 올려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마른 이파리와 줄기가 뿌려대는 흙먼지로 얼굴은 온통 숯검댕이가 되었고 코 안에까지 먼지가 들어찼다. ⓒ 고성미
바로 얼마 전, 한 달 가량의 기간에 걸친 땅콩 수확이 끝났다. 고구마나 감자 등은 땅에서 캐기만 하면 후속 작업은 거의 없이 수확을 마칠 수 있지만 우도의 특산품인 땅콩은 수확해서 먹기 좋게 볶아 상품으로 내놓기까지 무려 한 달 정도가 걸린다.

4월 파종부터 10월 수확까지의 과정을 카메라로 기록하며 대단히 치열한 삶의 현장을 실감할 수 있었던 나는 며칠 전 햇땅콩을 서울로 보내면서, 땅콩을 먹을 때는 '잘 먹겠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먹으라고 식구들에게 비장한 문자를 날리기도 했다.

그 작은 호리병처럼 생긴 꼬투리 속에서 땅콩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6개월 동안 우도에서는 어떤 모습이 펼쳐지는 것일까.

파종에서 수확까지 땅콩의 모든 것
땅콩은 습기를 싫어해서 모래처럼 건조한 사양토에서 잘 자란다. 따라서 땅콩을 심기 전에 두둑을 높게 잘 만들어 물 빠짐이 좋게 해줘야 비가 와도 땅콩이 썩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다. ⓒ 고성미
땅에도 결이 있는 것일까? 심을 때는 몰랐는데 파릇하게 새싹이 올라오고 나니 부드러운 유선과 직선이 야트막한 돌담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아름다워 잠시 농부가 예술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고성미
단지 땅콩 한 알을 심었을 뿐인데 이렇게 소담스러운 한 포기로 피어나 수많은 꽃이 달린다. 그리고 노란색 땅콩 꽃이 떨어지고 나면 씨방의 밑부분이 길게 자라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호리병 모양의 꼬투리를 만든 다음 그 안에서 땅콩이 자라는 과정이 마치 자궁에서 태어나는 태아를 연상시키며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 고성미
8월이 되면 우도는 온통 땅콩 이파리의 초록으로 가득하다. 저 멀리 우도봉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성산일출봉이 마주하고 있으며 널찍한 땅콩 밭 한가운데에는 산담이 오롯하게 정좌하고 있다. 우도는 사시사철 어떻게 촬영해도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 어떤 정서적인 마음자리를 전해주는 것 같다. ⓒ 고성미
반농반어(半農半漁)를 하는 삼춘들은 새벽이면 땅콩밭에서 검메다가(잡초를 뽑다가) 물때가 되면 바당으로 물질하러 간다. 이 장면을 촬영하는 순간 '물질 잘 하고 오세요. 나도 땅 속에서 쑥쑥 잘 자리고 있을게요'라고 전하는 땅콩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자칫 돌담 사이를 산책하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우도 삼춘들의 정신없이 바쁜 하루 스케줄의 한 단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고성미
시월이 되면 잘 익은 땅콩을 수확한다. 땅콩 줄기를 잡고 뽑으면 쑥 하고 쉽게 빠진다. 뽑은 땅콩은 그 자리에 펼쳐 일주일 정도 햇빛에 바짝 말린 후 탈곡한다. 수확량이 많지 않은 농가에서는 굳이 탈곡기를 돌리지 않고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데 땅콩 꼬투리에 붙어있는 줄기가 너무 질겨서 힘이 많이 든다. ⓒ 고성미
가장 힘든 탈곡 순서이다. 탈곡기에 넣으면 이파리와 줄기가 분리되어 땅콩 꼬투리만 바구니에 담긴다. 바짝 말려야만 탈곡이 잘 되기 때문에 현장은 흙먼지로 가득하다. ⓒ 고성미
탈곡이 끝난 후, 우도의 젊은 새댁, 애기 농군이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땅에 떨어진 꼬투리 하나하나를 줍고 있다. 땅콩으로 가득한 그녀의 새까맣고 작은 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손이었다. ⓒ 고성미
탈곡을 마치고 나면 세척과정이 남아있다. 그것도 한 번만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너 번에 걸쳐 꼬투리의 흙먼지를 깨끗하게 제거한다. 무엇보다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씻는 물에 쓸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습을 보며 땅콩 한 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 고성미
땅콩 꼬투리를 씻은 다음 가장 공을 들이는 말리는 작업이다. 이 즈음이면 우도의 온 거리와 마당은 말리기 위해 펼쳐놓은 땅콩으로 가득하다. 바짝 잘 말려야 곰팡이도 생기지 않고 맛 또한 더욱더 고소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말리면 알맹이가 벌어져 버리므로 오랜 경험의 노하우에 따라 그 빛의 양을 조절한다고 한다. ⓒ 고성미
잘 말려진 꼬투리에서 드디어 땅콩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잘룩한 호리병처럼 생긴 꼬투리의 한쪽은 뾰족한데 바로 이곳을 펜치로 살짝 누르면 톡하며 벌어진다. 그러면 손으로 양쪽을 벌려서 땅콩을 꺼낸다. 나도 옆에서 거든답시고 꼬투리를 까서 쟁반에 올리다가 그만 땅콩이 반으로 쪼개져버렸다. 그러자 '이렇게 하면 팔 수가 없지...'라며 슬쩌기 옆으로 밀어낸다. 그제야 나는 땅콩을 손질하는 해녀 삼춘의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종자로 쓸 땅콩은 단 하나의 상처도 없어야 해서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 고성미
꼬투리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땅콩을 상, 중, 하로 나누는 작업 중이다. 상품(上品)은 상품(商品)으로 팔려나가고 중품(中品)은 허물없는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하품(下品)은 밥에 넣어 먹는다고 한다. 나도 옆에서 이 작업을 거들었는데 수많은 땅콩알을 계속 쳐다보며 골라내다 보니 나중에는 내 눈이 빙글빙글해지며 멀미를 느껴 잠시 눈 감고 누워 있어야 했다. ⓒ 고성미
'우도 땅콩! 너 정말 귀하고 귀하신 몸이구나!'

현재 우도에서는 155ha의 면적, 203가구의 농가에서 땅콩 농사를 하고 있다. 올해 2015년의 수확량은 220톤이며 1kg에 2만 5천 원 정도의 예상가를 기준으로 우도의 땅콩 농가 소득은 총 55억 정도가 된다. 이를 가공하면 두 배 정도의 가격이 되므로 상품으로서의 소득 역시 두 배 정도로 예상할 수 있다.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우도의 땅콩은 수확된 전량 모두 판매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아니, 없어서 못 판다는 말까지 나오고 심지어 우도 땅콩은 농협과의 수매 계약에서 벗어나 주민이 자치적으로 판매하는 특별한 대접을 받기까지 한다.

우선 비주얼적인 측면부터 일반적이지 않다. 작고 동그란 모습은 한눈에도 탄탄하고 옹골차 보여 그 안에는 남다른 영양가가 꼭꼭 담겨있을 것 같다. 특히 얇고 부드러운 껍질째 먹을 수 있어 더욱더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우도에서 땅콩 농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당시의 '북제주 농업기술센터'에서 '영호'라는 이름의 종자를 보급해주던 1986년부터였다.

땅콩의 경작 조건은 토질과 햇빛 그리고 바람, 이렇게 세 가지로 축약할 수 있는데 우도가 바로 그 최고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며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는, 알이 길고 크던 '영호 땅콩 종자'의 본래 특성이 모두 사라지고 우도에서만 경작 가능한 알이 작고 동그란 고유 종자로 변종 되어 희귀성을 갖게 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도의 사양 토질이 땅콩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입증이며 무엇보다 강한 일조량이 톡톡히 한몫을 한 결과이다. 또한 돌담을 통과하는 적절한 해풍이 토질 안에서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켜 고소함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아직까지는 구할 수 없었고 단지 우도 주민들의 구술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농사짓는 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황무지, 모래와 같은 곳에서도 잘 자란다고 되어 있어 마치 콩알을 심어 놓기만 하면 쉽게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우도의 경우 사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태풍이 가장 두려운 존재이다. 바닷물이 밭을 덮치지 않아도 강한 비바람에 묻어온 소금기가 땅콩 이파리에 묻으면 까맣게 타들어 죽기 때문이다. 또한 꼬투리 안에서 땅콩이 영글 무렵이면 굼벵이의 습격을 조심해야 한다. 그 딱딱한 꼬투리를 굼벵이가 야금야금 갉아 결국에는 안에 든 땅콩을 모두 먹어치운다. 가물지 않고 장마가 오래되거나 습할 경우에는 균병이 돌아 꼬투리가 모두 썩어버리기 일쑤여서 온 밭을 갈아엎어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힘들게 농사지어 바닷물에 쓸려가거나 균병이 돌거나 굼벵이가 모두 갉아먹어도 다음 해에 또 심고 그 다음 해에 또 심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 우도의 풍토에 적응한 고유 종자로 탈바꿈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도 땅콩의 명품화 과정에서 현 제주 동부농업기술센터의 지원 사업도 크게 한몫을 했다. 동부농업기술센터의 김승현 계장의 설명에 따르면 땅콩 수확기, 탈곡기, 탈피기 등의 농기구를 60% 정부 보조 사업으로 지원하기도 했으며 제주의 행정당국은 고토석회를 3년 주기로 무료 배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2015년 6월 제주 행정부에서 무료로 보급된 고토석회를 경운기에 싣고 가기 위해 작업 중인 모습. ⓒ 고성미
땅콩 아이스크림, 땅콩 햄버거... 끊임없는 레시피 개발

이제 땅콩 아이스크림은 우도의 명물이 되었다. 누구라도 우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면 우선 땅콩 아이스크림부터 맛을 보러 간다. 사실 아이스크림의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 단지 소프트아이스크림 혹은 수제 아이스크림 위에 땅콩을 토핑으로 올려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우도의 땅콩 아이스크림에 열광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우도의 인심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어느 가게를 가더라도 정말 아낌 없이 듬뿍듬뿍 그 비싼 우도의 땅콩을 토핑으로 올려준다. 따라서 땅콩 수확철이 되면 절반 정도는 우도의 식당에서 자체 판매된다고 한다.

땅콩 아이스크림 외에 유명한 땅콩 햄버거도 성공한 레시피 중 하나이며 요즘에는 달콤한 설탕 속에 땅콩이 넘치듯 들어있는 기름에 튀기지 않은 단백한 호떡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땅콩이 듬뿍 들어간 소보루 빵도 좋은 호평을 받고 있다.

취재를 하며 한 가지 바라는 사항이 생겼다면, 우도의 땅콩이 우리나라의 관광상품에서 나아가 세계 미식가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어떤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자료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땅콩 수입의 60%가 유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프랑스나 이태리 등의 미식가들이 영양가가 풍부한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우도 땅콩의 그 고소하고 바삭한 맛을 어떻게 평가할지 정말 궁금하다.

단 1유로면 작은 한 봉지 사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땅콩과는 달리, 기꺼이 10유로를 지불하고 맛의 차원이 다른 명품 우도 땅콩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그 맛을 음미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예를 들어, 일본 사람들이 '한국산 김'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런 현상이 유럽인들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자유무역협정 등으로 전세계의 농업시장과 경쟁관계로 편입되고, 맛보다는 건강을 우선시하여 유해물질을 기피하는 오늘날 소비자들의 성향에 발맞추어 우도의 땅콩 농업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절실해 보인다.

땅콩의 옛 이름은 '낙화생', 문인들 시 짓기도...

우도 땅콩을 취재하면서 땅콩에 대한 많은 오해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땅콩이 콩과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름부터가 '땅에서 나는 콩'임에도 불구하고 영어권에서 '피넛(peanut) 혹은 그라운드넛(ground nut)이라고 이름 하는 바람에 '너트(nut)'가 붙어있으니 당연히 '견과'라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식품학적으로 보면 땅콩은 견과가 아니라 콩과이다. '호두, 잣, 땅콩 등 견과류...'라는 일반적인 표현 속에서 콩임에도 콩이라 불리지 못하고 땅콩은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또한 땅콩이 당나라에서 온 콩이라서 당콩으로 불리다가 땅콩으로 정착했다는 일부의 설 때문에 자료조사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기도 했다. 땅콩이 중국에서 조선에 처음 전해진 것은 사은사 서호수의 수행원으로 청에 들어간 호련이 귀국하며 한 줌 들고 왔던 1777년 봄이었다.

그때는 땅콩이 아니라 낙화생(落花生)이라 불렸다. '꽃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생명체가 생긴다'는 마치 우주의 원리를 한 몸에 품고 있는 듯, 꽤나 철학적인 이름이었으며 당시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은 이 낙화생을 주제로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로 재배한 사례는 1836년 이규경의 <낙화생 변증설>에 기록되어 있고 1842년 재배에 성공하여 땅콩 알 수십 개를 얻었다고 하니 19세기 중엽에는 실험 재배가 성공한 듯하다.

이후로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땅콩 재배 열풍이 불고 있으니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로 땅콩 농사를 장려했다가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60%에 이르던 경작률이 40%로 떨어지고 말았다.

낙화생이 언제부터 땅콩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1920년의 <조선어 사전>에 땅콩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고, 1937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남경두라 했다는 것으로 보아 혼용해서 쓰인 듯하다. 1980년 이후 국립국어원에서 낙화생을 땅콩의 원어로 남겨두고 순화 언어로서 땅콩을 쓰기로 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 낙화생이 구황작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땅콩이 고구마나 감자와 함께 구황작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뭄으로 삭막한 모래땅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는 땅콩을 키워 덩굴은 돼지 사료로 주고 껍데기는 불쏘시개로 사용했으며 기름을 짜서 요리도 했으니 정말 버릴 것 하나 없는 소중한 식량자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스님들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이 작은 콩을 두육이라 불렀고, 콩은 고기 대신 영양 보충을 할 수 있어 대단히 귀한 먹거리였다고 한다.

반대로 지구의 반대편 미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땅콩을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먹이며 사료 취급하였던 슬픈 역사로 시작된다. 그래서 당시 미국 사람들은 땅콩을 먹지 않았지만 존 하비 켈로그 박사(1794~1851)가 땅콩버터를 만들어 특허를 받으면서 미국의 대중음식 중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켈로그 박사는 요즈음 아이들이 잘 먹는 시리얼 제품, 켈로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기억에 의하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엄마랑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던 기차 안이었다.

까무룩 잠들려 할 때 '심~심풀이 땅~콩, 맥~주가 왔어요'라는 나지막하고도 구수한 리듬이 마치 어른들의 동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스 일어난 나는 땅콩을 먹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고 드디어 지갑이 열리고 계산을 하고 작은 삼각형 모양으로 신문지에 돌돌 말린 땅콩을 받아 쥐던 장면이 아주 느리게 클로즈업되어 기억 속에 떠다녔다.

또한 겨울날, 눈이라도 내리면 땅콩의 정취는 군밤과 동급이 되어 최고점을 찍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는 골목길에서 가로등 불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작은 '구루마'에 실린 땅콩을 팔던 아저씨의 모습. 혼자 먹으면 왠지 쓸쓸할 것 같은, 연인과 함께 먹어야 그 고소함이 더할 것 같은 그런 빛바랜 사진같은 이미지로 남아있기도 했다.

게다가 좀 튀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땅콩 농장주 아들이었던 카터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우리나라를 방문할 즈음의 신문기사에서 유독 땅콩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던 약간은 씁쓸한 웃음이 묻어나는 기억도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이후 간식에서 안주로 입장이 변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마음 따스해지는 아련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도에서 지내며 땅콩은 기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오늘처럼 비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지금쯤 해녀 언니들은 집에서 둥그런 앉은 상을 펴 놓고 꼬투리에서 땅콩을 까거나 선별작업을 하고 있겠지...'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도의 어른들은 땅콩 종자관리에 정말 철저해요. 파뿌리 종자는 밖거리에 놓아 말리고 땅콩 종자는 안거리에 놓아 말리는데요. 날이 좋으면 문을 열어 줘야 하고 비가 오면 문을 닫아 주는 이런 반복된 작업이 말은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도의 어른들이 종자관리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정성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철저하세요.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할 거예요. 아마도…."

우도의 젊은 새댁, 애기 농군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며 어른들이 부지런히 안거리의 문을 닫고 땅콩을 갈무리하는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굵은 빗줄기를 뚫고 지나간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참고도서 :
<낙화생 수급에 관한 연구> 유복성/1984
<세계 땅콩 생산과 수출입 동향> 박장환/박희운/김영국/이봉호
<낙화생의 전래와 한.중 문화교류> 최박광

인터뷰 :
* 우도 면사무소와 주민들
* 제주도 동부농업기술센터 김승현 계장

태그:#우도, #우도땅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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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우도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글쟁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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