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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혼자 '한 달 네팔여행'을 다녀왔다. 10박 11일 동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올랐고, 어떤 날은 할 일 없이 골목을 서성였다. 바쁘게 다니는 여행 대신 느리게 쉬는 여행을 택했다. 쉼을 얻고 돌아온 여행이었지만, 그 끝은 슬펐다. 한국에 돌아오고 2주 뒤 네팔은 지진의 슬픔에 잠겼다. 그래도 네팔이 살면서 한 번쯤 가봐야 할 곳임에는 변함이 없다. 30일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 기자 말

나야풀에서 출발해 한참동안 흙길이 이어졌다. 차량이 다닐 도로를 닦는 공사가 한창이다.
 나야풀에서 출발해 한참동안 흙길이 이어졌다. 차량이 다닐 도로를 닦는 공사가 한창이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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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미울(말과 당나귀의 교배종이라는데 현지에선 이렇게 불렀다)들이 로지까지 식재료 등을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에선 미울(말과 당나귀의 교배종이라는데 현지에선 이렇게 불렀다)들이 로지까지 식재료 등을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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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났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으면 뿌연 먼지가 뒤통수를 훑고 지나간다.

"으악~ 먼지 봐. 우리도 지프 탈 걸 그랬나봐."

트레킹 시작점인 나야풀을 출발한 지 몇 시간은 된 것 같은데 히말라야 트레킹 맞나 싶게 누렇게 파헤쳐진 흙길이 이어졌다.

"여행자들이 지프를 많이 타나봐요?"
"빨리 갈 수 있으니까요."
"저거 타면 어디까지 올라가요?"
"티케퉁가까지 갈 수 있어요."
"여기 공사도 지프용 도로 닦는 거 맞죠?"

내 물음에 포터 아저씨는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 위로 어두운 표정이 내려앉았다.

'태백산 정상'까지 지프 타고 이동?

트레킹 시작점인 나야풀. 앞서 가는 이가 포터 라즈 아저씨이다.
 트레킹 시작점인 나야풀. 앞서 가는 이가 포터 라즈 아저씨이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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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트레킹을 위해선 팀스(TIMS, 트레커 정보 관리 시스템)와 ACAP(안나푸르나 보존 구역 프로젝트) 퍼밋을 발급받아야 한다. 트레킹 구간 중간중간에서 이 두 가지를 확인한다.
 네팔 트레킹을 위해선 팀스(TIMS, 트레커 정보 관리 시스템)와 ACAP(안나푸르나 보존 구역 프로젝트) 퍼밋을 발급받아야 한다. 트레킹 구간 중간중간에서 이 두 가지를 확인한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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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은 '스프링 시즌'으로 트레킹을 하면서 수많은 꽃들을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우리나라 트레커들이 가을 즈음에 많이 오는 반면, 스프링 시즌엔 서양 트레커들이 많다. 이맘때의 트레킹은 네팔 국화인 '랄리구라스'와의 만남이다. 어디를 가나 붉은 랄리구라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여기도 랄리구라스, 저기도 랄리구라스. 포터 아저씨는 건너편 먼산을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어디?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니 손가락 끝에 걸린 푸른산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다.

"이 꽃 이름 알아요?"

그는 도로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길 옆에 난 작은 꽃의 이름을 알려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가 맡긴 60리터짜리 가방을 뒤에, 자신의 단촐한 옷가방을 앞에 매고도 싱글벙글이다.

11일간 우리와 동행하게 된 그의 이름은 '라즈', 37살 쌍둥이 아빠다. 쉬는 시간 틈틈이 두 아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는 네팔의 '아들 바보'이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유머러스하기까지한데, 실은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과 베이스캠프 트레킹(ABC 트레킹) 경험이 풍부한 '고수'이다.

까맣게 탄 얼굴에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를 보고 처음부터 거리낌없이 '아저씨'라 불렀지만, 알고 보니 나랑 6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청년'이었다.

계단길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우린 이렇게 해맑았다.
 계단길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우린 이렇게 해맑았다.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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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시즌엔 어딜가나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스프링 시즌엔 어딜가나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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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맘때가 제일 좋아요."
"트레킹을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도 좋아요? 사진도 많이 찍고..."
"계절이 바뀌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나이도 국적도 다양한 트레커들의 무거운 가방을 대신 지고 수십 번 올랐을 길인데도 그는 처음 본 풍경 마냥 즐거워했다.

하지만 길 위에 새겨진 그의 발자국이 늘어날수록 트레킹 코스의 풍경도 바뀌어갔다. 더 많은 여행자들이 네팔을 찾았고, 더 편하게, 더 짧은 시간 안에 푼힐 전망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다녀오길 원했다.

"7박 8일로 이 일정 가능할까요? 지프 최대한 타고 올라갈 생각이에요."
"2박 3일에 푼힐하고 오스트레일리안 캠프 다녀올 수 있을까요?"

휴가가 길지 않은 트레커들의 이런 문의는 차고 넘쳤다. 종종 며칠짜리 코스를 얼마만에 완주했네 하는 무용담도 적지 않았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는 법. 차는 더 높이, 더 빠르게 산길을 올랐다.

3박 4일 코스인 푼힐 트레킹이 이러다간 당일치기 상품이 되겠다는 말은 더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해발 1540미터의 티케퉁가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프가 오르락내리락했다. 한국의 태백산(1567미터), 오대산(1563미터) 정도의 높이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셈이다. 가장 느리게 걸어야 할 길은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지옥의 계단' 티케퉁가에서 울레리 가는 길

이 계단에서 3500걸음, 말만 들어도 무섭다.
 이 계단에서 3500걸음, 말만 들어도 무섭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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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에서 택시를 타고 나야풀에 도착해 트레킹을 시작했다. 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포카라에서 택시를 타고 나야풀에 도착해 트레킹을 시작했다. 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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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열도 아니고, 백도 아니고, 천도 아니고 무려 3400여 개란다. 티케퉁가에서 울레리까지는 일명 '지옥의 계단길'.

63빌딩 1층부터 60층까지 계단수가 1251개이니, 여행자들의 셈이 맞다면 내 앞에 놓인 계단이 63빌딩을 올라갔다 내려온 것보다 많다. 계단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위를 보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 앞에 있는 것만 족히 100개는 돼 보인다. 에스컬레이터처럼 계단이 끝없이 내 앞으로 내달려 오는 느낌. 여기서부터는 지프도 이용할 수 없다. 오롯이 자신의 두 발로 하루치 걸음을 걸어야 한다.

"헉헉, 이제 계단 끝났어요?"
"노, 매니(many) 매니 계단."

계단에 기대 쉬고 있는 라즈 아저씨와 보경이. 우리는 이 까마득한 높이를 계단으로 올라왔다.
 계단에 기대 쉬고 있는 라즈 아저씨와 보경이. 우리는 이 까마득한 높이를 계단으로 올라왔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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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올라왔는데, '아직도'란다. 먼저 다녀간 한국 여행자들이 계단에 질색해서였을까, 포터 아저씨는 '계단'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발음했다.

'어제 짐 쌀 때 보경이가 내 가방이 좀 무겁다고 했는데,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짐을 하나라도 더 뺐어야 했는데...'

지금은 두루마리 휴지 하나도 무거운 심정이다.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갈 때마다 키가 작아지는 것 같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고, 내 무릎이 내 무릎이 아니다.

높이가 들쑥날쑥인데다 롱다리가 아니고서야 한 번에 올라갈 수 없는 큰 계단들은 다리를 더 아프게 했다. 다리가 긴 서양 트레커들은 그 높은 계단을 단숨에 쭉쭉 올라가는데, 난 옆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이미 흙길 오르막에 지쳐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콜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는데, 목이 타는 건지 마음이 타는 건지, 금세 또다시 갈증이 올라온다. 계단을 오를수록 땀은 비오듯 쏟아졌고 체력과 물통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지옥같은 계단 끝에 서서 뒤돌아보니 짐이 별로 없는 선재 오빠는 가뿐한 모습이고, 아저씨는 보경이 가방을 뒤에서 받쳐주며 함께 올라오고 있다. 건너편 산엔 계단식 논이 주름살처럼 촘촘하게 펼쳐져 있다. 그 가느다란 주름살 사이로 드문 드문 집들이 보인다. 오늘 하루가 끝나면 내 이마에도 저런 계단이 만들어지겠지. 계단 하나에 한 시간씩 늙는 기분이다.

"샴푸는 일회용 2개만 챙겨요, 어차피 못 씻으니까"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들.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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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풀(1070m)과 울레리(2120m) 사이에서는 한라산 윗세오름(1740m) 가는 길에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나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고도가 비슷해서인 듯싶다.

"허억 허억. 이제 다 왔어요?"
"10분만 더."

아까부터 숙소까지 '끝나지 않는 10분'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은 숙소들이 양 옆으로 지나갔고, 인적이 드문 돌담길을 도니 또 다시 계단이다. 울고 싶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울레리 지역에 도착해서도 자꾸만 위로 위로 올라갔다.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무거운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아저씨 맘이 그렇다면 이 악물고 올라가야지. 그렇게 10분이 세 번 지나고 마침내 울레리 꼭대기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했다.

마침내 도착한 울레리 로지. 이곳까지 오는 마지막 30분은 마의 구간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울레리 로지. 이곳까지 오는 마지막 30분은 마의 구간이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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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울레리 숙소. 계단에 지친 우리들은 마당 한가운데 놓인 식탁에 앉아 쉬었다.
 산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울레리 숙소. 계단에 지친 우리들은 마당 한가운데 놓인 식탁에 앉아 쉬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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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이 삐죽삐죽 솟은 분홍색 건물. 닭들이 뛰어노는 마당엔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식탁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로지 아주머니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반기며 늘 그래온 것처럼 김이 폴폴 나는 따뜻한 레몬티 한 잔을 내왔다. 아저씨는 내게도 한 잔을 권했다. 뜨끈한 찻잔을 양손에 쥐고 식탁 앞에 앉으니 커다란 산의 품에 들어온 느낌이다.

고생한 만큼 이곳의 경치는 훌륭했다. 마당 한편엔 꽃이 예쁘게 핀 복숭아 나무가 서 있었고, 주변은 푸른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내일 아침 구름이 개면 산 너머로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도 볼 수 있단다. 아들은 수도인 카트만두에 공부하러 보내고 엄마가 남아 꾸리는 로지라는데, 몇 년 뒤면 2층도 완성될 거라고 한다. 이 높은 곳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개운해서 날아갈 것 같다. 사실 출발하기 전 '트레킹 중 겪는 샤워의 어려움'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샴푸는 일회용 2개만 챙겨가세요. 어차피 못 씻을 테니까."

울레리에서 머문 로지. 비록 나무로 만든 침대이지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기 전까지 만난 로지 중 최고의 시설이었다.
 울레리에서 머문 로지. 비록 나무로 만든 침대이지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기 전까지 만난 로지 중 최고의 시설이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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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준비를 도와준 사장님의 말에 샴푸는 정말 딱 3개만 챙겨왔다. 고도가 3천 미터가 넘어가면 고산병 때문에 못 씻고, 그 밑에서도 몸이 천근만근이라 못 씻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진 몸에 비누칠할 힘이 남아있었다. 보경이와 함께 쓸 트윈룸 안엔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이 딸려있어 편하게 씻을 수 있었다. (이때는 몰랐다. 여기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기 전 최고의 로지일 줄은...)

점심 먹은 시간을 빼면 오늘은 6시간 반 정도를 걸은 셈이었다. 그중 상당 시간이 계단길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멋모른 첫날이라 오를 수 있었던 계단길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따뜻한 샤워와  레몬티 한 잔에 지겹던 계단은 '지나간 과거'가 됐다. 이보다 행복할 순 없다.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를 처마 밑에 너니, 때맞춰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울레리 로지 한편에선 닭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울레리 로지 한편에선 닭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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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정보>

- 로지 선택은 어떻게? : 혼자 하는 트레킹이 아니라면 로지 선택은 보통 가이드나 포터가 도와준다. 포터나 가이드마다 자신이 단골로 가는 로지가 따로 정해져있다. 시설에 크게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자.

- 로지에서 꼭 밥을 먹자 : 로지 숙박비는 매우 싸다.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개인 샤워실 딸린 트윈룸이 1인당 250루피(한화 2800원) 수준. 대신 식비가 도시에 비해 비싼 편이다. 식재료들을 높은 곳까지 운반하는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비싸다고만 할 수도 없다. 여행자들이 로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대가로 포터나 가이드들은 숙식을 보다 싸게 제공받는다. 로지에서 밥을 먹어주는 센스가 필요한 이유.

- 스틱 가져갈까 말까 : 나는 트레킹 출발 당일 아침까지 스틱을 가져갈지 말지 고민했다. 결론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 스틱은 진가를 발휘하니, 무릎 건강을 위해서라도 꼭 챙겨가자.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네팔 여행, #네팔 트레킹, #한 번쯤은, 네팔, #박혜경,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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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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