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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은 적어도 말에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 말은 그의 신념이며 더 나아가 통치철학이기 때문이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한 말 다르면 국민은 그를, 그 정권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그가 이끄는 대한민국 정부는 그 신실함을 잃었다.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을, 그가 이끄는 정부를 믿을 수가 없다. 온 나라를 들쑤셔놓고 있는 이슈인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미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정치인이 나서서 교과서를 바꾸면 안 된다고 했던 사안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지금 정치인인 자신이 교과서를 바꾸려 하고 있다.

11년 전 박 대통령 발언 "정치인이 역사 교과서 바꾸면 안 돼"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다. 2004년 8월 20일, 전임 대통령들에 대한 여론이 들끓고 과거사 청산 문제로 정치권이 혼란스러울 때,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연희동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역사 이야기를 나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8월 20일 오전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8월 20일 오전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 SBS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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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역사란 것은 말이죠.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나중에 학자의 평가의 대상은 되지만 역사를 어떻게 심판합니까?"라며 "평가를 하는 거지 심판은 못하는 거거든요, 원칙부터 잘못됐다고 봅니다"라고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전임 대통령에 대한 심판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취지로 한 말이다.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는 뜻인데, 그 뜻은 맞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잘못을 덮자는 의미여서 국민들이 받아들일 만한 말은 아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는 정말 역사학자들과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정치인들이 역사를 재단하려고 하면 다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될 리가 없다"고 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나중에 항상 문제가 될 거거든요, 그게 정권 바뀌면 또 새로 해야 하고."라고 했다.

어찌 이리 정답을 말하는지 박수를 보내고픈 심정이다. 박 대통령의 11년 전 발언은 누가 들어도 옳다. '역사'는 정치인과 국민들이 쓸지 몰라도 '역사서'를 쓰는 건 정치인이어서는 안 된다. '역사서'는 '역사가'가 써야 한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이니 옳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1년이 흐른 2015년 10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을 통하여,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라며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통해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라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굽히지 않는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역사 교과서 문제, 국민과 역사학자에게 맡겨라

역사가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옳다. 그런데 그 정쟁의 대상이 되도록 한 것이 누구인가. 국민인가. 국민이라면 그가 누구인가. 정쟁이 되도록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다. 지금의 검정 교과서를 좌편향으로 보는 시각이 누구의 것인가. 지금의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부인한 것이라고 재단한 게 누구인가.

박 대통령은 정치인이 역사를 재단하면 안 된다고 말한 장본인이다. 그 이유를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지금은 역사를 재단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말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일 때도 박 대통령은 정치인이었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정치인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처럼 국회의원은 국회가 직장이고 그 직장의 고용주는 국민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직장은 청와대이고 청와대에서 하는 국정은 국민이 준 일이다.

국민이 맡긴 일을 하는 정치인은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당 대표일 때도, 대통령이 되어서도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얼마 전 한국갤럽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49%, 찬성 36%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은 이런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당 대표일 때는 역사는 국민에게 맡기자고 하더니, 대통령이 되어서는 자신이 나서서 역사를 재단하고, 그 재단한 대로 다시 쓰겠다는 말은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이미 정부는 지난 3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확정 고시했다. 국민의 뜻을 무시한 처사다.

11년 전, 박 대통령은 "꼭 한다면, 중립적인 기관에서 중립적인 전문가들이 모여서 하고, 정치권에서는 그냥 예산만 뒷받침을 한다든가, 지원 정도만 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박 대통령은 잊으면 안 된다. 역사학계가 나서서 이 일을 하도록 박 대통령과 정부는 뒷짐 지고 있는 게 최선이다.

박 대통령의 주장대로 지금의 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다면(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희박하겠지만), 그래서 바른 역사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다면,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 박 대통령과 정부는 나중에 문제 될 일 만들지 말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여기서 중단하길 바란다.


태그:#역사 교과서 국정화, #박근혜 대통령, #정치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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