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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확정 고시된 지난 3일은, 공교롭게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었다. 일제강점기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독립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정신을 일깨우고 계승하기 위한 기념식 대신, 정부는 기어이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가 될 게 불 보듯 빤한 국정화를 선언했다.

역사학계와 교사 등 전문가 집단의 반발과 압도적인 반대 여론에도 정부는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렸다. 순간 교과서도, 역사도, 민주주의도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다. 아이들조차 '고삐 풀린 정부의 다음 먹잇감은 어디일까' 물을 정도로 현 상황을 엄중하게 지켜보고 있다. 여당의 대표는 "국정화 고시하는 모습을 속 시원하게 지켜봤다"고 했지만, 아이들이 반응만 봐도 시민들의 저항이 여기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한국사 다음 국정교과서가 될 과목은 뭘까요?"
"아빠가 그러던데요. 지금 우리가 배우는 도덕 과목도 예전엔 '국민윤리'였다고."
"매번 교과서가 정권의 입맛대로 춤추게 될 텐데, 그걸로 배우게 될 우리 후배들이 불쌍해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다음은 선생님을 국정화 시키겠죠"

지난 10월 3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전국 대학생 행동 전체 집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10월 3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전국 대학생 행동 전체 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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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인 '역사 쿠데타'를 자행해서 만든 국정교과서가 발행된다고 한들, 그걸 '충실하게' 가르치는 교사도, '순순히' 배우는 아이들도 없을 것 같다. 여론을 무시한 채 정부의 의도로 만들어진, 정권 홍보용 교과서라는 꼬리표를 떼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를 일찌감치 '박근혜 교과서'로 명명하자는 한 아이의 이 말이 뜨끔하다.

"역사 교과서가 국정화됐으니, 다음은 선생님들을 국정화 시키겠죠."

가르칠 내용이 하나로 정해지면, 수업 방식도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수능 위주의 대학 입시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철저히 종속되다 보니 학교마다 문제풀이 수업이 이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일된' 교사용 지도서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조차 똑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지침일 뿐이다. 이를 두고 그 아이는 '교사의 국정화'로 표현한 것 아닐까.

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만, 정부와 여당의 국정교과서 고시 강행으로 아이들의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건 의외의 수확이다. 난데없는 주체사상 교육과 대한민국 건국일 논쟁이 벌어지며 직접 교과서를 찾아 확인해보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지난 주말, 다른 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서너 종 교과서를 두루 관련 부분을 읽어봤다는 아이도 있었다. 한 아이는 내게 '대통령이 극찬한' 교학사 교과서를 구해다 줄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 국정교과서 시절 국사책의 내용을 일부러 찾아 읽는 아이도 적지 않다. 어디서 구해다 읽느냐고 물었더니, 책이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를 알려줬다. 요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친구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우리 역사넷'이라는 곳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학생을 통해 이런 사이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부가 '좌편향'이라는 교과서, 학생과 직접 봤더니

"광복 후 분단 과정을 다룬 단원에서 북한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읽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해당 대목을 샅샅이 뒤져보자고 했다. 본문이든 삽화든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광복 후 분단 과정을 다룬 단원에서 북한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읽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해당 대목을 샅샅이 뒤져보자고 했다. 본문이든 삽화든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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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정부가 국정교과서 추진의 이유라며 사례로 제시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전쟁, 그리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다룬 교과서 내용을 아이들과 함께 읽었다. 사실 이번 일이 없었다면 거기까지 진도를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교과서의 맨 뒷부분인 데다 대개 빠듯한 수업시수 탓에 아이들이 교과서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 배우게 되는 내용이다.

참고로, 우리 학교에서 채택한 한국사 교과서는 대표 저자가 여당 대표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하고 있을 만큼 정부에 의해 낙인찍힌 대표적인 '좌편향' 교과서다. 우선, 광복 후 분단 과정을 다룬 단원에서 북한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읽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해당 대목을 샅샅이 뒤져보자고 했다. 본문이든 삽화든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이들이 '억지 춘향'식으로 찾아낸 게 고작 '잘 생긴 김일성 사진이 실렸다'는 것이었다. 한 아이는 'UN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는 문구가 뚜렷한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며 말을 끊어 버렸다. 정통성과 관련된 정부의 발표 내용을 인용했더니, 되레 '정부' 수립과 '국가' 수립의 차이를 묻는 아이가 많았다. 교사인 나조차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6.25 전쟁의 책임에 대한 발표는 하나같이 "어이없다"고 했다. "학생들을 아예 바보로 아는 게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고 못 박았다. 김일성이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 남침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950년이라는 발발연도는 물론, 새벽 4시라는 정확한 남침 시각까지 다들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북한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정부의 발표는 논리도 근거도 없는 한낱 말장난이라 일축했다. 외려 교과서가 당시 전쟁의 원인을 북한과 국제 정세에만 두고 있어 설명이 부족하다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닌 게 아니라, 교과서에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전쟁 준비와 한반도와 타이완을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전쟁의 배경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 아이는 "'북한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왜 그릇된 것이냐"며 되레 발끈하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저러다 잡혀갈지 모른다'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비록 장난스러운 행동일지언정,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종북 좌파'라는 낙인은 시나브로 아이들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된 듯하다.

"대통령이 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두고 '이거다'라고 규정하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 건가요? 그런 역사가 어디 있어요. 두 손뼉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 전쟁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 아닐까요? 아이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도 한쪽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묻진 않잖아요. 대통령의 말씀대로라면, '잔말 말고 역사 교과서에 나온 대로 무조건 외우라'는 것밖에 안 되죠. 이러려고 이태 전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것 아닐까요?"

김일성 주체사상을 다룬 부분을 읽고는 아이들이 대놓고 '불만'을 제기했다.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다는 거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 분쟁 중 독자적 노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사상의 주체, 경제의 자립, 정치의 자주, 국방의 자위를 표방한 이론이라는 내용이 전부다. 이게 여당이 시내 곳곳에 이른바 '주체사상 현수막'을 비장하게 내건 이유라고 하니 아이들조차 어처구니없다는 눈치다.

학생들은 주체사상이 당최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으니 더 설명해 달라고 했지만, 나조차 딱히 아는 바가 없어 교사용 지도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정부가 교과서보다 훨씬 더 '좌편향'된 상태라고 낙인찍은 책이다. 어렵사리 구해다 본 몇 권의 교사용 지도서에는 '안타깝게도' 주체사상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보충자료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우상화에 관해 소개돼 있었다.

수능 출제한다고 제대로 된 교과서로 받아들일까

황교안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역사 교육 정상화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역사 교육 정상화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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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가 "검정 교과서가 몇 종인지는 형식적 숫자일 뿐 사실상 1종의 좌편향 교과서"라고 강조했으니, 다른 교사용 지도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일 테다. 그렇다면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한 총리와 교육부 장관은 대체 어떤 책을 보고 말한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설마 그들도 대통령이 답변한 대로 '전체적인 기운'을 근거 삼아 발표한 것일까.

어떻든 내후년 이 세상에 나올 한국사 교과서는 발행 전부터 온갖 별명이 나붙었다. 앞서 말한 '박근혜 교과서'라는 표현과 함께 인터넷에서는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부터 '효도 교과서', '박정희 탄신 100주년 기념 교과서', '부전여전 교과서', '1년짜리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조롱이 난무하고 있다. 교사와 아이들이 과연 이렇게 만들어진 책을 교과서로 여기기는 할까.

수능을 거기서 출제한다며 윽박지른다고 교사와 아이들이 순순히 응하겠느냐는 말이다. 자라나는 세대의 아이들은 이제 교과서로만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 어차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홍역을 치르게 될 교과서를 무작정 신뢰할 만큼 어수룩하진 않다. 여태껏 여론조사 결과 추이를 꼼꼼히 살펴봤다는 한 아이는 나름 깨달은 게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정부 발표를 무작정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게 놀라웠어요. 세대와 지역을 놓고 보면, 그들은 애초 국정이냐 검정이냐의 문제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식으로 판단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제 할아버지도 입버릇처럼 그러셨어요. 설마 정부가 카메라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느냐고."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한국사 교과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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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역사교과서 국정화 회귀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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