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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혼자 '한 달 네팔여행'을 다녀왔다. 10박 11일 동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올랐고, 어떤 날은 할 일 없이 골목을 서성였다. 바쁘게 다니는 여행 대신 느리게 쉬는 여행을 택했다. 쉼을 얻고 돌아온 여행이었지만, 그 끝은 슬펐다. 한국에 돌아오고 2주 뒤 네팔은 지진의 슬픔에 잠겼다. 그래도 네팔이 살면서 한 번쯤 가봐야 할 곳임에는 변함이 없다. 30일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 기자 말

네팔 포카라에는 트레킹 용품을 팔거나 빌려주는 가게들이 많이 있다.
 네팔 포카라에는 트레킹 용품을 팔거나 빌려주는 가게들이 많이 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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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람도 아닌데 왜 그래요."

카운터 안에 서 있던 직원이 말했다. 얼굴엔 은근한 미소가 담겨 있다. 입꼬리가 네가 질 수밖에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니, 이 사람들 좀 보세요. 내가 이 티를 얼마나 싸게 줬는데, 중국 사람도 아니면서 깎아달래요 호호. 한국인이 아니고 중국인인가봐요 호호호."

가게로 들어오는 다른 여행자들까지 붙잡고 하소연이다. 오호라 망신주기구나. 아니 안 깎아주면 그만이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저 무례함을 콕 꼬집어 주고 싶은데 영어로 그 말을 다 할 수가 없다. 하아, 영어 공부 좀 해둘 걸. 티를 들고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영어 잘하는 보경이는 그대로 얼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붉으락푸르락 얼굴만 붉히고 있는데, 문 앞에 서서 직원의 하소연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중년 여성이 갑자기 중국어로 뭐라뭐라 하더니 휙 나가버린다.

"중국계 미국인인가 보네…."

기세 등등하게 우리를 약올리던 직원 얼굴이 굳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망신에는 망신. 내 속이 다 시원하다.

500원 깎아준 대가로 받은 '망신'

네팔 포카라 레이크 사이드 지역에 있는 큰 나무
 네팔 포카라 레이크 사이드 지역에 있는 큰 나무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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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와 호숫가를 걷는 여행자들.
 페와 호숫가를 걷는 여행자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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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  황금빛 일출을 보고 빵과 커피를 먹은 뒤 페와 호숫가를 걸었다. 가끔은 멍 때리고 벤치에 앉아 하늘을 수놓은 패러글라이딩을 감상했다. 매일 걷고 매일 놀아도 언제나 토요일이었다. 월요일 걱정 없는 토요일 오후같은 기분으로 3일을 보냈다.

산새들이 깨워주는 아침은 달콤했고, (카트만두에선 무려 '까마귀 알람'이었다!) 길 어디에서든 고개만 들면 하얀 설산이 보였다.

그래, '네팔은 천국'이라고 말한 여행자도 분명 포카라를 보고 한 얘기일 거야. 콧구멍이 까매지는 카트만두가 천국일 리는 없잖아. 깨끗한 공기, 페와 호수, 맛있는 음식...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두 발엔 날개를 단 기분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포카라를 어슬렁 거렸다.

그런 유유자적한 '천국 생활' 중 맞은 한 방이라 충격이 컸다. 하긴, 천국에서도 먹고는 살아야지. 망신을 당한 대가로 50루피(한화 550원) 싸게 산 등산용 티셔츠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직원은 마지막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계산할 때 크게 인심쓰듯 50루피를 깎아줬다).

페와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맛보는 모히토 한 잔.
 페와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맛보는 모히토 한 잔.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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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와 호숫가 옆 산책로. 매일 아침을 먹고 이 길을 천천히 걸었다.
 페와 호숫가 옆 산책로. 매일 아침을 먹고 이 길을 천천히 걸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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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트레킹 출발이다. 문제는 날씨다. 신선놀음 중에도 간간이 고산병 치료제, 지도, 로지에서 쓸 엽서를 사 모았는데... 비소식이라니! 포카라 날씨 예보에는 우산 그림이 몇 개씩 떠 있다. 하루 이틀 조정해도 비는 못 피할 듯싶다.

"비 와도 출발해요?"
"아 그래도 가야지. 그럼 안 갈 거예요?"

나와 선재 오빠가 식당 의자에 앉아 쭈뼛거리며 물었다. 포터 고용과 트레킹 서류 발급을 대신 해준 식당 사장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되물었다. 내일 안 가면 언제 갈 거냐고... 그래, 포카라 날씨와 산 속 날씨는 다를 수 있으니까. 일정을 마냥 미룰 수도 없잖아, 올라가다 정 비가 많이 온다 싶으면 내려오지 뭐.

무엇보다 믿을 구석은 포터 아저씨. 그는 ABC 트레킹은 셀 수도 없이 했고, 그보다 길고 힘든 라운드 트레킹도 40번 이상한 이 분야 베테랑이었다. 우린 포터로 그를 고용했지만 가이드로도 활동한다고 했으니,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우리 보다 두 발 앞서 하산을 결정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빼기'

트레킹 짐 싸는 '빼기'와의 싸움이다. 필요하다고 챙겨온 물품들도 눈물을 머금고 빼야 한다.
 트레킹 짐 싸는 '빼기'와의 싸움이다. 필요하다고 챙겨온 물품들도 눈물을 머금고 빼야 한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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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 페와 호수 옆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동네 강아지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다.
 포카라 페와 호수 옆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동네 강아지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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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앞에 두고 30분째 씨름 중. 세상에 이보다 어려운 '빼기'가 있을까. 난 왜 이리 짐이 많을까... 옷도, 속옷도 돌려 입어야 할 판인데 아무리 짐을 줄여도 답이 안 나온다. 포터 아저씨에게 줄 가방은 15kg을 넘지 않아야 한다. 매일 6~7시간 걷는 일정에 그것도 적지 않은 무게였다. 일단 남는 짐은 내 가방에 넣고, 그도 안 되면 포기하자.

네팔로 오기 전, 포터 없이 혼자 20kg 넘는 가방을 지고 올라가다 힘들어서 포기했다는 후기를 봤다. 가까스로 완주는 했지만 짐이 무거워 땅만 보다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안 됐네' 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나 역시 오랜만에 마실 나온 강아지 마냥 땅에 코를 박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오빠 짐은 그게 다예요?"
"네, 전 별로 갖고 갈 게 없어서..."

트레킹숍에서 빌려온 60리터짜리 가방. 1층은 선재 오빠, 2층은 보경이, 3층은 나. 자리 분양은 끝났는데 이삿짐이 방보다 크다. 그 와중에 '갖고 갈 게 없다'니... 할렐루야!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벼웠다. 세계여행 중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방이 작았다. "아직까지는 여름이라 짐이 별로 없어서요"라고 했지만, 내공이 엿보인다. 1년 3개월 동안 세계 여행을 할 예정이라는데 가방은 대학교 전공 서적 몇 개면 꽉 찰 크기다. '구세주' 덕분에 강아지 신세는 면했다.

물건들을 넣었다 뺐다 하길 수십 번. 에라 모르겠다. 가방에 짐을 대충 쑤셔넣고 자리에 누웠다. 버리지 못해 생각했던 시간보다 늦어졌다. 여행 가방 무게가 자신의 삶의 무게라는데… 미련만 한 가방이다.

숙소 천장에 테트리스처럼 쌓은 짐이 지나간다. 티셔츠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다운점퍼, 옆 공간엔 스포츠 타올... 그 위로 달콤한 찌아(밀크티) 한 잔, 물소 고기라는 소문이 있지만 그래도 입에서 녹는 스테이크, 맛있는 커피와 아늑한 잠자리가 지나간다. 당분간 안녕할 것들이다.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오면 그간 컨디션 조절하느라 참았던 시원한 맥주도 원없이 마실 수 있겠지. 그렇게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트만두에서 7시간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도착하자마자 먹었던 스테이크. 포카라에선 양식, 중식, 한식은 물론 인도음식까지 아주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카트만두에서 7시간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도착하자마자 먹었던 스테이크. 포카라에선 양식, 중식, 한식은 물론 인도음식까지 아주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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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에는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이 군데군데 있다.
 포카라에는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이 군데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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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정보>

- 네이트 말고 '네히트' :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http://cafe.naver.com/trekking)의 준말인 '네히트'. 네팔 여행과 트레킹 정보는 물론 동행자를 구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이곳에서 보경, 선재 오빠 두 동행자를 구했다. 트레킹 용품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준다는 글들도 올라온다. 꼭 들러봐야 할 카페.

- 네팔에도 있는 '마수걸이' : 트레킹 용품을 살 땐 아침 일찍 가자. 첫 손님과의 거래가 잘 이뤄져야 하루 장사가 잘 된다는 믿음이 네팔에도 있어 흥정이 더 수월하다. 단, 찾는 물건이 없거나 가격이 맞지 않아 뒤돌아 나올 때 뜻하지 않게 욕을 먹을 수도 있다.

- 엽서와 카드도 챙기자 : 트레커들의 숙소인 로지에선 할 일이 별로 없다. 카드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 친구들에게 쓸 엽서 몇 장과 카드를 포카라에서 미리 구매해가면 좋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네팔 여행, #네팔 , #트레킹, #한 번쯤은, 네팔,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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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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