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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에서 이어집니다.)

일본의 무리한 한국 연예인 입국 거부 문제가 결국 동티났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일본이 지금까지 그래 온 것이라는 둥 짤막한 유감 표명으로 때웠다. 문제는 중국 발(發)로 불거졌다. 중국의 한류 팬들이 일본의 처사에 대해 대대적으로 비난에 나섰다. 연쇄적으로 그렇지 않아도 댜오위다오 사건 이후 빌미를 찾고 있는 중국 정부가 일본의 치졸한 입국 거부는 동북아시아 '평화의 노래'를 깨뜨리려는 일본 정부의 상징적 작태라는 외교부 부대변인 논평을 냈다. 한국 정부를 부추긴 내용이었다.

중국 기침에 한국은 몸살 났다. 국회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외교부 장관 사퇴 촉구가 빗발쳤다. 민주복지당 김충식 원내대표는 외교부 장관을 불러 따졌다.

"아니, 장관. 엄연히 외교상 예의와 상식이 존재하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수십 명 연예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입국 거부가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이 나라 국격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이오? 이는 한국 전체에 대한 모욕입니다. 특단의 조처를 해서라도, 장관직을 걸고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세요. 외교부 사람들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앗, 뜨거워'하면서 외교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를 불러 강력히 항의하는 뒷북을 쳤다. 하지만 그것으로 '국민 정서'라는 한국의 독특한 감정을 삭이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일본의 '불감청 고소원(不敢請固所願)' 그 자체였다. 이미 한국의 감정적 대처를 예상하고 덫을 놓은 것이다.

일본 다케다 관방성 장관은 철저하게 준비한 담화를 발표한다.

"한국 정부의 일련 과민반응은 일본 정부의 합리적 조치에 대한 내정간섭일 뿐이다. 일부 한국 연예인들의 일본 내 성 추문 등 불미스러운 사건은 물론 대중예술의 심각한 오염에 따라 일본이 입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다. 친구 사이에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한국 정부는 그 선을 넘어서 불행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지만 한국산 '냄비 근성'이 시작된다. 보수든 진보든,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가리지 않고 일본에 대한 성토에 나선다. 성 노예 문제, 독도 문제를 비롯해 지금까지 일본과 신경전을 벌여온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불거진다. 어떤 정치인과 언론인은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이래 가장 심각한 한일 관계'라며 '대사 소환과 공관 폐쇄를 감수해서라도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며 입을 맞춰 제창한다.

한일 정부 간에 오가는 이런 성명전은 노름판에서 서로 판돈을 올리면서 베팅하는 것과 흡사하다. 옛날 것 말고 요즘 영화 '007 카지노 로열'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몬테네그로 포커 대회를 통해 악당 르쉬프르(마스 미켈센)와 대결을 벌인다. 처음에는 돈을 잃는다. 하지만 나중에는 르쉬프르를 약 올려가며 판돈을 최대한 키운 다음 돈을 모두 따낸다.

르쉬프르가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 돈을 잃는 것이 당연하다. 각본에 따라 일본은 미리 도발한 다음 준비된 냉정함을 유지한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한국은 즉자적인 감정에만 충실하다. 그 결과는 당연히 일본의 의도대로 흐를 수밖에 없다.

급기야 서울광장에 보수단체들 '반일 범시민 궐기 대회'가 열린다. 수십 년 만에 보는 궐기대회다. 과거에는 '관제(官製)데모' 형식이었지만 지금은 자발적으로 보수단체와 회원들이 참여한 시위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형식과 내용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일부 회원들의 삭발에 이은 해병전우회 회원들의 '단지(斷指) 혈서', 그리고 마무리로 일장기를 두른 허수아비의 '화형식'이 이어진다. 집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주한 일본대사관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불상사를 우려한 경찰은 철저한 '방비 태세'로 일본대사관을 에워싸서 더 이상의 접근을 막았다.

그 정도에서 끝났으면 딱 좋았다. 그러나 세계 제1차 대전이 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향한 총성으로 시작됐듯 일부 과격 행동파들이 뇌관을 건드렸다. 일본대사관을 향해 화염병을 던진 것이다. 불은 대기해 있던 전경들에 의해 번지지 못하고 꺼졌지만, 영상은 일본으로 긴급히 날아갔다.

더욱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단의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한다면서, 커다란 헝겊 인형에 일왕 사진을 붙여 팔다리와 머리를 몸통에서 떼어낸 다음에 모아 불을 질렀다. 조선 시대 형벌로 말하자면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한 다음에 시신을 모아 불태운 끔찍한 극형이다. 한국과 한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들 금기(禁忌), 이른바 '터부(taboo)' 봉인을 훼손시킨 것이다.

일본 반응이 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매우 심각하다. 어차피 정치인과 언론이 한국의 상황에 대해 떠들고 대서특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일본 공영방송인 NHK를 포함한 모든 방송 매체가 얼굴에 일왕 사진을 붙인 인형 사지를 절단하고, 그것도 모자라 불태우는 장면, 일왕 얼굴 사진이 불타는 장면이 온종일 반복해서 보여준 것이다. 보수 우익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분노했다. 게다가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는 일반 시민들조차 눈살을 찌푸렸고, 한국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적의와 함께 드러냈다.

미키는 지금 오사카로 가는 신칸센에 몸을 맡기고 있다. 오사카 조선인학교에 대한 취재 지시 때문이다. 몇 년 전 영화 '60만 번의 트라이'에서 소개돼 비교적 널리 알려진 학교다. 영화에서처럼 일본에서 북한이나 한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고충이 이번에는 공포가 됐다. 일본에 부는 반한 감정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오사카에도 불어 닥친 것이다.

쇠파이프, 야구 방망이로 무장한 우익 행동대원들은 철조망으로 학교 출입구를 막고, 아이들의 등교를 막았다. 그리고 대형 스피커를 통해 '더러운 조선인들은 조선으로 돌아가라. 범죄자 조선인들은 이 땅을 떠나라'는 구호가 반복된다.

미키의 마음은 지금 여러모로 편치 않다. 기차에 오르기 전 경찰서에 가서 K의 실종신고를 냈다. 이유 없이 이틀간이나 핸드폰 연락도 되지 않는다며, 당장 찾아달라고 사정했다.

"연락 없이 안 들어올 사람이 아니고요. 실종된 날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여기, 실종신고와 함께 수사요청 서류를 먼저 작성해 주세요."

미키는 주소와 미키의 인적 사항, 신고자, 신고자와 실종자와 관계 등을 적는다. 그리고 뽑아온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함께 내민다.

"한국인입니까?"

경찰은 실종 대상이 한국인 체류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미키를 조금은 경멸하듯, 그리고 둘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다는 듯 꼬치꼬치 묻는다. 그의 눈이 미키를 위아래로 살핀다. 그리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한다.

"접수됐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경찰관의 눈빛은 불쾌하게도 익숙하다. 현재 일본인의 한국인, 혹은 한국인과 관계된 일에 대한 시선이라는 점이 미키를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서울에 특파원으로 파견됐고, 거기서 한국 사람 만나서 사랑했을 뿐이고, 도쿄에서 그를 만나 그와 함께 지냈을 뿐이다.

한국과의 질긴 인연인가. 보도본부에 최근 일한 관계와 관련된 태스크 포스팀이 꾸려져 미키는 일본 내 반한 감정에 대해 도맡고 있고, 여기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학교를 난생처음 찾았으니 말이다.

우익 시위대를 인터뷰하기는 쉬웠다. 자기들이 무슨 큰 애국지사라도 된 양 으스대며 인터뷰에 응한다.

"지금 서울에서 우리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지고, 천황 폐하의 사진을 감히 불태우고 있습니다. 일본인이라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남의 나라와 수십 년간 빌붙어 사는 족속들인 주제에 말입니다. 당연히 일본에 왔으면,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 학교에 다녀야죠. 조선인학교에 다니면서 불경스러운 것들만 배우니까 죄다 범죄자가 되고, 우리 일본인들에 폐를 끼칩니다. 당연히 이 나라에서 나가야죠."

서울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야쿠자들과 거의 같은 논리, 같은 감정이다. 그러나 조선인학교 학생이나 교사들 인터뷰는 어려웠다. 행동대원들이 방해를 놓는 데다 학생들이나 교사나 얼굴이 나가는 방송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럴까'하는 생각이지만 인터뷰를 따야 하는 게 미키의 일이다.

학교 근처를 뒤졌다. 결국, 조선인학교 학생들을 학교 뒤편 분식집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 달라고 요구하자 학생들이 얼굴이 안 나간다는 조건을 달았다. 할 수 없었다. 모자이크 처리를 약속했다.

"저희를 학교에 가게 해주세요. 저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희 집안사람들은 일제 시대 때 강제노역으로 끌려왔습니다.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가난하게 사셨어요. 그리고 우리 아직 가난합니다. 최소한 배워야 가난을 면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제발 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한 사람이 시작하자 몇몇 아이들이 자기들도 하겠다고 해서 인터뷰 분량이 넉넉해졌다. 애들은 모두 하나같이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말했다.

무사히 인터뷰는 모두 마쳤다. 먼저 송고를 하고, 일행과 함께 도쿄로 되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향할 때, 데스크의 연락의 급한 연락이 온다.

"미키, 지금 어딘가? 아직 출발 안 했지? 도쿄로 오지 말고, 바로 교토로 가봐. 우토로 마을이라고 들어 봤나? 조선인 마을인데 거기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서 몇 명이 다쳤나봐. 가서 취재 좀 해야겠어."

일복이 터진 미키는 교토로 가는 길에 인터넷에서 우토로 마을에 대한 자료를 모은다. 꽤 많다. 차근차근 읽어보면서 놀란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1941년 군용비행장 건설을 위해 재일조선인 3000여 명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게 우토로 마을이 만들어진 유래다.

돈도 없고, 나라도 빼앗긴 조선인들은 일제가 손쉽게 쓸 수 있는 만만한 노동 자원이었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이 전쟁에 진 다음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조선인들로 구성된 우토로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려다 실패했다. 조선인들은 총을 든 미군 앞에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낸 것이다. 그 이후 조선인들은 그 마을에 터를 잡고 평온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마을의 토지 소유권은 비행장 건설업체에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 당시 비행장 건설업체를 인수한 '닛산 차체'라는 기업에 넘어갔고, 1987년 다시 닛산에서 '서일본식산'으로 바뀌었다. 땅 주인인 서일본식산은 우토로 주민들의 퇴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2000년 퇴거명령 확정판결이 났다. 가난해서 제대로 된 도로도 없고, 심지어 상수도를 못 끌어와 우물물을 길어 먹는 동네에서도 쫓겨날 운명이 된 것이다.

천만 다행히도 2004년부터 이 소식을 알려져 주민들을 도우려는 일본 시민단체와 한국 정부, 민간의 지원으로 토지를 매입하게 됐고, 2014년에는 일본 정부와 지방정부에서도 거주환경 개선사업을 약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이젠 70여 년간 이 마을에 살아온 노인 몇 명, 그들의 가족과 지인 등 재일 조선인 150여 명만이 사는 우토로 마을이다. 한마디로 일본과 한국 간의 악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역사적 진실을 증명하는 곳이다. 그러니 일본 우익 입장에서는 꼴 보기 싫은 곳이기도 했고, 줄기차게 주민들에게 마을에서 떠나라고 괴롭혀왔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는 속담이 들어맞는다. 한국의 반일 감정이 폭발한 데다 일본 내 반한 감정이 고조되자 우익집단은 일본인 특유 '이지메'를, 힘없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에게 행한 것이다.

교토에 도착해서 우토로 마을을 둘러본 미키가 해야 할 일은 다친 사람들을 찾아 당시 상황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우토로 주민 중 부상자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가벼웠다. 다음으로 미키는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러 폭행 피해자들을 만났다. 이상한 일이다. 환자들은 건장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붕대 사이로 보이는 것은 화려한 문신이었다. 폭력조직원들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다치게 됐나요?"

"다짜고짜 맞았어요."

"주민들이 대부분 노인인데 그분들에게 맞았다고요? 이해가 안 되네요. 노인들이 무슨 수로 덩치 큰 당신들을 때릴 수 있죠?"

"아니, 우리를 때린 것은 젊은 놈들이에요. 그 마을 노인네들이 아니에요."

"그럼, 주민들 말고 다른 누가 당신들을 폭행했다는 건가요?"

"네, 워낙 갑자기 당한 일이라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합니다. 그들은 무술을 배웠든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운동을 한 놈들입니다."

환자들의 말을 모아 보면, 우익 단원들은 우토로 마을로 가서 '조선인들은 이 땅에서 꺼져라. 더러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를 연호하면서 마을을 돌았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은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한 상황이라 그들 세상이었다. 우익들이 간판을 한글로 써놓은 한 상점을 기분 나쁘다며 때려 부수려고 했을 때다.

갑자기 마스크를 한 대여섯 명이 나타나 자신들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는 얘기다. 그리고 주민들이 나와서 사람들이 크게 다친 것을 보고는 경찰에 신고했고, 환자들이 병원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미키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동네 깡패들이 수명의 괴한들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 지역방송이면 몰라도 중앙방송에서 나갈 '거리'가 못 됐다고 판단하고는 데스크에 기사를 '킬'하자고 보고했다. 그러나 미키에게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자네가 판단할 일은 아니야. 그냥 상황을 정리하고, 인터뷰 딴 영상을 보내도록 해. 별일 없으면 철수하고."

기사의 가치판단은 하지 말라는 상사의 힐책이다. 도쿄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경찰에 사건에 대해 재차 물었다.

"가해자들이 누구인지 윤곽도 잡히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겠어요. 조직끼리 싸움이라면, 그래도 최소한 누구인지는 알아보기도 하는데, 복면하고 나타났다는 점이 석연치 않아요. 얼굴을 알리기를 꺼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태그:#일왕 어진, #영화 카지노 로얄, #우토로마을, #영화 60만번의 트라이, #금기 혹은 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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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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