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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지내고 집에 돌아와서 먹은 밥.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채소 필수.
 추석 지내고 집에 돌아와서 먹은 밥.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채소 필수.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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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일 아침밥 내가 할게염."
"(제굴이는 엄마인 척 대답한다) 그래."
"알겠어염."

저녁밥 하는 일만으로도 도에 이를 수 있나? 제굴은 내 앞에서 갑자기 자문자답을 했다. 물론 '육식인'인 제굴의 머릿속에는 고기반찬뿐이겠지. 아침부터 고기 냄새가 식탁을 점령하는 꼴을 피하기 위해서는 선수를 쳐야 했다. 잽싸게 두부 요리를 주문했다. 제굴은 포스트잇에 이렇게 적었다. 두부치즈구이, 김치말이 실국수, 고추장 실국수, 채소 요리. 

9월 30일, 군산 동고등학교 재량휴업일. 제굴은 오전 6시에 일어났다. 상쾌하지 않았다. '30분만 더 자고 일어나자'면서 다시 누웠다. 일어나보니까 오전 9시. 전날 밤에 도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의연했던 마음은 사라졌다. 육신의 배고픔만 크게 다가왔다. 제굴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냉장고에서 한우를 꺼냈다.

나는 속으로 '아휴, 그러면 그렇지'했다. 사과를 깎아서 꽃차남과 나눠 먹었다. 꽃차남은 딸기잼 바른 식빵 반쪽을 먹고는 제 형이 만든 고기반찬에 밥을 몇 숟가락이나 먹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있는 '아침 육식'. 예의상 한 입 먹고는 "맛... 있네"라고 했다. 그리고는 김자반을 듬뿍듬뿍 퍼먹었다.   

병문안 도시락으로 수육을 만들다

성장기 육식인인 제굴의 밥그릇. 제굴 자신도 민망한지 "개밥 같아요" 라고 했다. 밥보다 고기가 많다.^^;;
 성장기 육식인인 제굴의 밥그릇. 제굴 자신도 민망한지 "개밥 같아요" 라고 했다. 밥보다 고기가 많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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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남편이 병원에서 돌아왔다. 추석 전날, 거실 실내자전거에 걸려 넘어진 아버지는 움직이지 못했다.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갔다. 넓적다리뼈는 세 동강 났다. 그래서 9월 29일 오후에 수술했다. 출혈이 심해서 수혈까지 받았다. 마취가 덜 풀린 아버지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고, 주삿바늘을 빼려고 했다. 남편은 밤새 아버지 옆을 지켰다.    

"아빠, 뭐 드실래요?"

제굴은 물었다. 잠을 못 잔 남편은 씻자마자 안방으로 가서 누웠다. 제굴은 아침 먹은 설거지를 했다. 남편은 1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제굴은 "아빠, 내가 할아버지 간호할까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거동을 잘 못 하는 어머니를 건사해 왔다. 그런 아버지가 병원에서 한두 달 지내야 한다. 결국 어머니도 같은 병실에 입원.

"네가 할아버지 할머니 간호할 수 있어?"
"근데 병원 가서 뭐해야 해요?"
"할아버지 대소변 치워드리고 해야 하는데... 차라리 큰고모 먹게 밥을 해 가자."

수산리(시댁) 식구들은 절대 밥을 대충 먹지 않는다. 항상 차려서 먹는다. 아버지가 입원하고 나니까 그게 어렵다. 큰 시누이와 남편은 전날 밤에도 김밥을 먹었다. 남편은 그게 걸렸다. 나도 걸렸다. 우리 집 김치는 큰 시누이가 싹 담가준다. 꽃차남을 낳았을 때, 미역국을 종류별로 끓여서 보낸 사람도 큰 시누이였다.   

제굴은 도시락 싸 가는 게 좋다고 했다. 남편은 "튀기는 요리는 안 돼"라고 했다. 신선한 채소를 곁들여 먹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그래서 생각한 수육. 제굴은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마늘 열 알과 양파 한 개를 넣고, 된장 세 숟가락, 쌈장 세 숟가락, 커피, 계핏가루를 넣었다. 그리고는 생협에서 사온 삼겹살을 넣고 끓였다.

"제굴아, 잡내 많이 나."

옆에서 생선을 굽던 남편이 말했다. 제굴은 월계수 잎을 넣었다. 좀 당황했는지, (고기 맛을 모르는) 나보고 먹어보라고 했다. 내 반응은 하나, "맛... 있네" 뿐인데. 다행히도 남편이 괜찮다고 했다. 제굴은 끓는 물에서 고기를 건져내 반듯하게 썰어 그릇에 담았다. 양이 넉넉하지 않았다. 남편은 "밥 먹을 사람은 여섯 명이야"라면서 더 하라고 했다.

제굴은 다시 수육을 하면서 "월계수 잎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아요"라고 혼잣말을 했다. 진짜로 월계수 향이 진했다. 남편은 송이버섯을 볶고, 상추와 깻잎을 씻고, 배추김치를 썰었다. 새로 한 밥을 큰 그릇에 푸고는, 부족한지 안 부족한지 (하필) 나한테 물어봤다. 나는 "제굴이는 아침 많이 먹어서 별로 안 먹을 거야"라고 했다.   

9월 5일, 수산리 아버지와 꽃차남. 아버지 환한 모습이 그립다. 어서 회복하시기를.
 9월 5일, 수산리 아버지와 꽃차남. 아버지 환한 모습이 그립다. 어서 회복하시기를.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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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빨리 도시락 사진 찍어요."
"그냥 병원 가서 찍을 거야. 할아버지는 엄마가 사진 찍어도 뭐라고 안 하시니까."

남편은 밥상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나는 어느 때는 남편 말에 저항하고, 어느 때는 바짝 엎드린다. 오늘은 후자, 스마트폰을 꺼내지도 않았다. 성숙한 아내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밥하는 기술이 없는 내 신세를 한탄했다. 옛날에 어른들이 "기술이 최고다. 기술 배워라"고 할 때, 왜 그 말의 깊이를 몰랐을까나.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큰 시누이는 "우리 조카가 밥했어?"라고 했다. 밥 먹는 걸 힘들어하는 어머니도 "손주 밥이니까 먹어야지"라고 했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아직도 눈을 뜨지는 못했다. 음식도 먹지 못했다. 물만 마시고는 그것도 토했다. 남편은 병실 바닥(2인실이라서 우리 부모님만 쓴다)에 밥 먹을 돗자리를 폈다.

삼시 세끼를 다 차린 아들

아버지 병실에 싸 간 도시락. 채소를 많이 사서 씻었다. 제굴은 수육을 했다. 입맛 없는 어머니도, 고생 많이 하는 우리 큰누나도 맛있다고 했다.
 아버지 병실에 싸 간 도시락. 채소를 많이 사서 씻었다. 제굴은 수육을 했다. 입맛 없는 어머니도, 고생 많이 하는 우리 큰누나도 맛있다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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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옳았다. 명절이 낀 탓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사람 몸이 축축 처지는 병실 생활 나흘째라 신선한 채소는 입맛을 돋우었다. 큰딸 노릇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는 큰 시누이가 맛있다고 했다. 남편은 어머니 숟가락에 구운 생선과 버섯 볶음을 올려주었다. 지지고 볶은 음식이 그리운지, 제굴은 숟가락질이 더뎠다. 
    

아버지는 끝내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 침대 시트에는 수술한 곳에서 나온 피로 흥건했다. 시트를 갈아야 한다. 기저귀만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몸을 며느리인 내가 보면, 아버지가 싫어할 수도 있다. 큰 시누이와 남편은 "배지영은 나가 있어"라고 했다. 나는 밥 먹은 그릇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아버지, 갈게요."

아버지에게 말했다. 눈을 못 뜨는 아버지는 "으응"이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각자 일터로 갔다. 제굴은 제 방에서 <공중그네>를 읽다가 스마트폰으로 <심슨>을 보다가 낮잠을 잤다. 꽃차남이 유치원 갔다 올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지현이 이모가 명절 때 못 봤다고 와서는 추석 선물로 5만 원을 줬다. 꿈인가 생시인가. 제굴 마음은 붕붕 떴다.

제굴은 멀티 플레이어. 동생을 울리지 않고, 딱지치기를 하면서 속으로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모가 준 돈으로 '터닝메카드'를 사러 갈 수 있다. 문상(문화상품권)을 사서 온라인 게임에 지를 수도 있다.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면서 야금야금 쓸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금을 가진 사실은 비밀일 리가 없다. 엄마가 알게 된다. 그건 곧 비극.

제굴이가 만들어 준 실국수 요리. 제굴아, 엄마는 국수 안 좋아하는데. 참고만 해 줘.^^
 제굴이가 만들어 준 실국수 요리. 제굴아, 엄마는 국수 안 좋아하는데. 참고만 해 줘.^^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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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갑자기 고기가 당겼다. 부엌으로 갔다. 간장, 양파, 마늘로만 간을 하는데도 완전 맛있는 쇠고기간장볶음을 했다. 엄마가 먹을 음식은 따로 해야 한다. 제굴은 아빠 친구가 추석 선물이라고 준 실국수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고추장, 식초, 설탕, 참기름 등을 넣어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끓는 물에 실국수를 삶았다.

일주일 중 가장 고된 날인 수요일. 일 끝나고 나니까 아들이 차려놓은 밥상이 있다. 나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맛있게 먹어야 한다. "잘 먹을게" 하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힘차게 세 번 먹고는 제굴이한테 권했다. 제굴은 "와! 생각보다 맛있네"라면서 고기덮밥과 비빔국수를 번갈아 먹었다. 행복해 보였다. 나는 물었다.

"제굴아, 엄마는 국수 요리 좋아할까? 안 좋아할까?"
"설마, 좋아해요?"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했어?"
"(웃음) 맛있잖아요."       

오늘은 제굴이가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를 다 한 날. 학교 안 가고 밥하니까 참 좋다면서 "자퇴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나는 내일(10월 1일)부터 중간고사 보는 제굴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학생이라면, 최소한 국어나 영어, 사회책은 한 번씩 읽어보라고. 그게 기본 매너라고 했다. 제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강제굴, 네 성적은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고!"
"아니거든요. 내 밑으로 네다섯 명이나 있어요."

남편 절친 경열씨가 제굴에게 편맥나무 도마를 선물해 줬다. 그리고 남편 지인이 요리 많이 하라고 실국수 한 상자를 줬다. 제굴은 문상 받았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기뻐했다.
▲ 제굴이가 받은 추석 선물 남편 절친 경열씨가 제굴에게 편맥나무 도마를 선물해 줬다. 그리고 남편 지인이 요리 많이 하라고 실국수 한 상자를 줬다. 제굴은 문상 받았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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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명절 다음 날 음식, #제굴이의 삼시 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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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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