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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6월 한 달 동안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서 뉴욕에 머물렀다. 지인 소개로 보름간은 미국작가 '로드니 딕슨' 집에서, 또 보름간은 호스텔에서 체류했다. 마침 로드니 친구 중 작가인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가 있었는데 그녀는 7년간 백남준 조수였고 TV복원전문가라는 소식에 좋은 기회다 싶어 인터뷰를 청했고 승낙을 받아 이를 진행하려 했으나 라파엘레 개인전 등이 겹쳐 못했다. 그 후 몇 번 다시 만나 궁리하다, 나에게 부담을 안 주면서 효율적 소통방식일 수 있는 글로 주고받는 인터뷰를 제안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 기자 말

라파엘레 셜리는 나를 그녀 집에 2번 초대했다. 집 방문에 앞서 그녀와 만났던 그린 포인트에 위치한 카페 '밀크 앤 로즈(Milk and Roses)'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라파엘레 셜리는 나를 그녀 집에 2번 초대했다. 집 방문에 앞서 그녀와 만났던 그린 포인트에 위치한 카페 '밀크 앤 로즈(Milk and Roses)'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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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나는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국립미술대학(보자르)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드로잉, 페인팅, 사진, 비디오 등도 같이 공부했다. 조각에도 조예가 깊고 건축가 집안이다. 나는 그 후 뉴욕으로 이주해 멀티미디어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내 미술 분야는 사운드아트, 라이트 아트(light art), 공공미술, 퍼포먼스, 공동작업미술, 사회참여미술 등 폭이 넓다. 난 또한 백남준의 고장난 전자TV아트작품을 복원하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 백남준을 언제 처음 만났나? 
"1993년 내가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처음 와 머문 곳이 백남준이 사는 '소호 머서가(街) 110번지'다. 백남준은 이 아파트 5층에 살았고 나는 4층에 살았다. 내가 거기 살게 된 건 미국 비디오아티스트이면서 여성무용가인 프랜시스 알레니코프(F. Alenikoff, 1920-2012) 작업실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준을 만나게 되었다. 이 아파트 주변에는 당대 유명한 예술가가 많이 살았고, 나도 그들과 커뮤니티를 이루면서 긴밀한 교류를 했다. 

여기 또 누가 살았냐면 '백남준·시게코' 부부는 물론이고 역시 플럭서스 회원인 일본의 사운드 아티스트 '요시 와다(Y. Wada)' 또 멀티아티스트 '이레인 섬머스(E. Summers)' 그리고 이 아파트 건너편 브로드웨이 537번지에는 일본예술가인 '아이오(Ay O)', 미국작가인 '사이먼 포티(Simone Forte)'과 '프랜시스 휘트니(F. Whitney)' 등도 살았다."

[보충설명] 플럭서스의 창시자 '마치우나스'(건축전공)가 잠시 예술가의 길을 접고 낡은 공장지대인 '소호'를 개발하거나 리모델링해 분양하는 부동산사업에 뛰어들었다. 마치우나스는 당연히 그의 동료작가에게도 집을 팔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 예술가가 모여 살게 된 것이다. 백남준도 '머서가(街) 110번지' 꼭대기 층을 싸게 분양받아 평생 살았다. 지금은 이곳이 맨해튼의 대표적 번화가로 변해 주변에 고급 부티크들이 즐비하다.

"백남준은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라파엘레 셜리 집에 갔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사진이라며 백남준과 함께 레이저작품을 할 때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줬다
 라파엘레 셜리 집에 갔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사진이라며 백남준과 함께 레이저작품을 할 때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줬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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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수리나 레이저기술은 어디서 배웠나?
"나는 우선 책자를 통해 레이저기술을 독파했다. 그리고 백남준의 레이저작품을 구현하기 위해 라이트아트, 설치기술 등 전문가특수과정도 이수했다. 그런 인연으로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나는 '뉴욕국제프린지페스티벌(NY International Fringe Festival)'과 "퍼페추얼 아트 머신(Perpetual Art Machine) 등 같은 뉴미디어아트단체를 창립하기도 했다."

- 당신은 어떻게 백남준의 조수가 되었나? 
"위에서 밝힌 대로 나는 백남준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멀티미디어 작가인 '프랜시스 휘트니'와도 같이 작업을 했다. 그녀는 또 레이저 아티스트인 '노먼 발라드(Norman Ballard)'와도 협업했는데 그녀를 통해 나는 노먼을 알게 되었고 노먼이 나를 백남준 선생에게 소개해줬다. 나는 이곳 작가들이 다 내 마음에 들었고 나도 그들을 좋아해 잘 어울렸다. 그래서 내가 정착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 백남준과 언제 왜 헤어졌나? 
"나는 2002년까지 백남준과 작업했는데 그 무렵 그의 레이저 작품은 거의 다 마무리되었다. 백남준의 부인 시게코 여사도 2000년 구겐하임 대형전시가 끝나면서 일감도 줄고 해서 스튜디오를 축소하고자 했다. 백남준 자신도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작업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도 다른 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 백남준은 당시 몸이 많이 불편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백남준은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라 자신의 신체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는 파스텔 드로잉 및 페인팅을 손으로 그릴 때도 자기만 쓰는 도구나 활용방식을 창의적으로 고안했다. 또 그는 조수들을 한 자리에 다 모아놓고 자신이 작품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고 우리는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 그걸 최대한 구현하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우 효율적으로 일하면서 그의 창작활동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족이 되어줬다."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 I 'Killing Cloud(from Arctic Lights)' 2009-2010. 순간적 빛의 움직임을 포착한 환경미술, 대지미술로 백남준의 레이저아트 영향이 보인다. 이 작품은 1445년 조바니(Giovanni di Paolo)가 그린 '천지창조와 낙원에서의 추방'이라는 초기르네상스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 작가의 특징인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전망하는 방식이 느껴진다.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 I 'Killing Cloud(from Arctic Lights)' 2009-2010. 순간적 빛의 움직임을 포착한 환경미술, 대지미술로 백남준의 레이저아트 영향이 보인다. 이 작품은 1445년 조바니(Giovanni di Paolo)가 그린 '천지창조와 낙원에서의 추방'이라는 초기르네상스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 작가의 특징인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전망하는 방식이 느껴진다.
ⓒ Raphaele Shi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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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조수 중 좋은 작가가 많다. 당신도 영향을 받았나?
"백남준은 일상과 테크놀로지를 결합하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와 일상품을 결함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내가 만약 그의 조수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면 나는 테크놀로지와 관련하는 작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물과 빛을 결합해 빛으로 쏘는 레이저방식은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나는 건축과 관련된 집안이라 '가옥, 난간, 경기장 같은 공간형태의 원형' 등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백남준 영향으로 레이저나 비디오 같은 테크놀로지와 조합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배웠고 심지어 행위예술 같은 것의 중요성도 인지하게 됐다. 그래서 난 내 작업에 이런 두 가지 요소를 반반씩 섞었다."

- 샤머니즘 같은 원시주의와 레이저 같은 하이테크의 결합이 과연 가능한가?  
"그는 인류보편적 생각을 가진 예언자로 기술과 문명의 궤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술가만이 아니라 또한 그 이상을 뛰어넘는 철학자였다. 미국의 유명한 비디오작가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도 '진정한 예술가란 신비의 진실을 열어줘 세계에 도움을 준다'라고 말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면에서 보란 듯이 우리의 일상에 묻어나는 샤머니즘을 수준 높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2015년 6월 10일 라파엘레의 안내로 맨해튼 머리가(Murry st.) 45번지(2층)에 위치한 CTL전자회사를 방문해 '치티엔류' 사장과 찍은 사진. 여기서는 TV나 전자아트 등을 고치는데 주변에 낡은 TV모니터와 장비가 빼곡히 쌓여있었고 백남준 작품도 벽에 걸려있었다.
 2015년 6월 10일 라파엘레의 안내로 맨해튼 머리가(Murry st.) 45번지(2층)에 위치한 CTL전자회사를 방문해 '치티엔류' 사장과 찍은 사진. 여기서는 TV나 전자아트 등을 고치는데 주변에 낡은 TV모니터와 장비가 빼곡히 쌓여있었고 백남준 작품도 벽에 걸려있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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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작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리·보존하나?
"나는 위 사무실에서 1960년 뉴욕으로 이민 와 1968년 CTL전자회사를 창업한 엔지니어인 중국계 치티엔류(C.T.Lui) 사장과 함께 요즘도 단종된 '음극선브라운(CRT) TV'의 백업파일을 구해다 낡은 TV 등을 고친다. 브라운 TV가 없을 때는 4×3 LCD로 대체한다. 또 우리는 대형 벽 TV에 프로그램도 작성하고 부품 및 하드웨어를 구입해 옛 TV도 복원한다.

우리는 또 백남준 비디오아트 같은 미디어작품을 소장한 중요미술관이나 개인소장자와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작품의 보전방법에 대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조언도 한다. 나는 또한 전자기술자와 함께 네온이나 형광등으로 작업하는 미디어작품도 수리하고 보전한다."

- 당신은 이정성씨와도 함께 일한다고 들었는데? 
"이정성(1988년부터 2006년까지 백남준 작품 수리전담) 선생과 나는 2000년 구겐하임 백남준 '뉴욕회고전'에서도 그해 여름 호암미술관과 로댕미술관에서 열린 '서울전'에서도 다음 해 열린 스페인 '빌바오전'에서도 같이 작업했다.

그는 백남준에게 가장 중요한 전자기술자로 그의 작품전반을 담당했기에 새로운 작품설치나 수리를 위해 뉴욕에 자주 출장을 왔고, 한국에 계실 때는 우리와 연락을 취해 중개역할을 한다. 요즘은 그와 자주 만나지 못하나 나는 지금도 백남준 작품을 작동시키다 문제가 생기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 분과 연락을 취하며 계속 정보를 교환한다."

"내가 만난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커"

뉴욕 맨해튼중심가 거리표시판이 보인다. 여길 보면 백남준의 '그린(Greene)가' 작업실과 '브룸(Broome)가' 작업실이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뉴욕 맨해튼중심가 거리표시판이 보인다. 여길 보면 백남준의 '그린(Greene)가' 작업실과 '브룸(Broome)가' 작업실이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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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작업실 세 곳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그는 '머서(Mercer)가' 자택 겸 작업실 외 뉴욕에 또 다른 3개의 작업실이 있다. 작업실마다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린(Greene)가' 작업실에서는 레이저 작품을, '브룸(Broome)가' 작업실에서는 로봇작품을 주로 했다. 그리고 '그랜드(Grand)가' 작업실은 내가 별로 일해보지 않아 모르지만 초기 그의 역동적인 평면작업을 한 곳으로 안다."

- 백남준과 주로 어느 작업실에서 뭘 했나? 
"내가 백남준과 가장 작업을 많이 한 곳은 '그린(Greene)가' 143번지 작업실이다. 그러니까 난 1997년부터 백남준 구겐하임전을 대비해 레이저조각인 '3원소'를 만들었다.

그것을 필두로 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0년 구겐하임전의 정점인 '야곱의 사다리'도 같이 만들었다. 처음에는 백남준의 협력자인 '노먼 발라드(Norman Ballard)'와 같이 보조관계로 일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 우리는 큰 규모와 작은 규모로 번갈아가며 실험을 시도했고, '서사시(Epic)' 같은 이 작품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제반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수없이 관련 엔지니어나 기술자들과 회의를 가졌다. 나는 또한 2001~2002년 백남준과 같이 설계한 야외 레이저 방식의 작품을 서울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몽촌해자' 물위에 설치했다."

백남준이 1999년 '소호(머서가 110번지)' 자택 작업실에서 라파엘레와 같이 레이저아트 드로잉을 놓고 어떻게 설치할 건지 논의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남준이 1999년 '소호(머서가 110번지)' 자택 작업실에서 라파엘레와 같이 레이저아트 드로잉을 놓고 어떻게 설치할 건지 논의하고 있는 모습이다
ⓒ Raphaele Shi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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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어떤 인물인가? 에피소드라도 하나 소개한다면?
"백남준은 매우 지적(highly intelligent)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와 예술을 큰 틀 안에서 연관시키는 사유를 했다. 그는 내가 만난 본 사람 중 마음의 스케일이 가장 컸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명상의 형태로 즐겼고, 레이저 빛 아래 어둠 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레이저조각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른 조수도 그랬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레이저작품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은 바로 레이저아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이거나 철학적 논제를 꺼낼 때였다.

머서(Mercer)가 옆 프린스(Prince)가에는 '제리'라는 그의 단골집이 있었는데 우리도 매일 거기서 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동물이나 여성에 대해 매우 유쾌한 유머와 조크를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줬다. 내가 그와 작업하는 동안 내내 그는 정말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했고 그의 장난기(playful mind)는 또한 뺄 수 없는 그의 단골메뉴였다."

- 그가 뉴욕에서는 가난했다? 
"위대한 인물의 특징은 일상문제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백남준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나 그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할 정도로 이타적이었다. 우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연연해하지 않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그랬겠지만 그는 아무리 참담한 일을 당해도 대체적으로 매우 낙관적인 것 같다."

위에 흐리긴 하지만 '라파엘레 셜리의 아카이브(Raphaele Shirley's Archive)'라는 제목이 보인다. 2012년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탄생 80주년 광선 전에 '워터스크린' 설치를 위해 내한한 라파엘레는 2001년 전시 때 찍은 '워터스크린'사진을 아카이브형식으로 선보였다
 위에 흐리긴 하지만 '라파엘레 셜리의 아카이브(Raphaele Shirley's Archive)'라는 제목이 보인다. 2012년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탄생 80주년 광선 전에 '워터스크린' 설치를 위해 내한한 라파엘레는 2001년 전시 때 찍은 '워터스크린'사진을 아카이브형식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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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전시를 위해선 한국을 몇 번 방문했나?
"나는 백남준 레이저아트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을 약 8번 방문했다. 2000년 삼성재단 로댕미술관과 호암미술관 작업할 때 그리고 2001년 서울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분수에 레이저 빛을 쏘는 '워터스크린' 작업했을 때와 2012년 소마미술관이 재개관할 때도 서울에 왔다. 그때 나는 2001년 기존작업을 업그레이드했고 백남준 아카이브 전도 추가했다."

- 현대미술에서 백남준이 왜 중요한가? 
"그는 정말 예술의 범위를 확장했고 거기에 최초로 하이테크와 TV를 도입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품은 빈티지 분위기가 나는 브라운관, 자기테이프 등 오래된 기술이든 새로운 기술이든 시대의 흐름에 맞았고 또한 시대를 앞선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 같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철학적 물음까지도 풀어보려 했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 어느 작가도 그를 쉽사리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인터넷시대, 그를 아이폰이나 SNS의 착안자라고 하는데? 
"그는 미래학자 '아서 클라크',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한', 미래공상소설가 '조지 오웰'과 같이 예언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면한 빅 이슈를 제대로 직시했기에 또한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그만큼 넓은 포용성과 깊은 혜안을 갖춘 작가라고 생각한다."

백남준 I '블루부처' 네온작품 1992-1995. 백남준아트센터 전시때 찍은 사진
 백남준 I '블루부처' 네온작품 1992-1995. 백남준아트센터 전시때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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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작품 중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난 2010년 12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본 '네온 블루부처'가 가장 마음에 든다. 백남준의 관심인 기술과 예술, 철학과 휴머니즘을 기가 막히게 결합한 걸작으로 그 속에서 현대문명의 놀라운 하이테크를 발휘하면서도 부처와 같은 겸손한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1년 그의 초기비디오 '손과 얼굴'은 초간편 작품이나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효과가 강력하다. 그리고 나 역시 백남준의 대표작인 'TV부처'를 사랑한다. 이 작품은 나에게 아직도 삶에 대해 계속 묻게 한다. 그리고 '촛불'과 '정보초고속도로(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 역시 내가 좋아하는 백남준 작품목록에 포함된다. 그밖에 많은 퍼포먼스와 인터렉티브 아트의 상징인 '랜덤 액세스'와 'TV첼로' 등도 좋아한다."

- 백남준은 하이테크와 함께 휴머니즘도 추구했다. 당신 생각은?  
"그의 작품은 다양하면서도 풍성하고 또한 깊이가 있다. 그는 언제나 하이테크의 인간화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철학과 음악의 배경이 있었기에 현대미디어작가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쓴다는 역설적인 말은 결국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해학적으로 푼 것이다. 또 백남준의 휠체어를 보면서 백남준이 왜 '기계의 인간화'를 추구했는지 더 이해하게 됐다.

인간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이 같이 잘 엮어내는 재능을 가진 작가는 오늘날 드물다. 또한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적 관점으로 봐도 그렇다. '예술을 위해 예술'이 아니고 복합적 사유라도 최대한 단순하게 변환시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지식위주의 서양철학에다 시적이고 통합적인 동양철학을 같이 엮는 데 귀재였다."

백남준 I '즐거운 인디언(Happy Hoppi)' 1995. 백남준의 익살과 장난기가 발동한 작품으로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전에도 출품됐다. 대림문화재단 소장
 백남준 I '즐거운 인디언(Happy Hoppi)' 1995. 백남준의 익살과 장난기가 발동한 작품으로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전에도 출품됐다. 대림문화재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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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TV작품을 장난감처럼 만들기도 했다.
"백남준은 늘 자유롭게 상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사회의 기존 룰을 깨기에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미국에 와서 한국문화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사회 속에 자신의 역할을 해 나갔다. 그는 서양의 청중 앞에서 삼성, LG같은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전자기술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고, TV가 페인트 브러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개념도 알려줬고, 레이저로 큰 장난감 같은 '워터스크린' 작품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 끝으로 백남준, 그는 창조를 위한 파괴자였다. 당신도 그런가?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예술정신에 따라 주어진 사회의 룰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TV기술을 사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 했고 시대를 앞서갔다. 과거악기인 '첼로-바이올린-피아노'를 'TV 첼로-끌고 다니는 바이올린-조정피아노(prepared piano)' 등으로 용도 변경시키는 실험도 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대전환을 유도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과거의 오브제에 현대적 시대정신을 담아 변형시킨 것이다.

1960년대 모던아트인 미니멀리즘에도 암흑기라고 불렸던 중세시대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나도 현대작가지만 작품을 할 때 그런 점을 응용해 불교의 '통합개념(Notion of Totality)'같은 것도 도입한다. 현대미술이 너무 시장주의에 빠져 관객을 현혹하고 충격주기에 주력하다보니 과거 그리스·이집트·수메르 같은 문명을 잊고 있다. 나는 사회적, 문화적, 철학적 면에서 과거나 현재나 찾을 수 있는 문명의 공통점을 발굴해 그걸 결합하려 한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백남준, #라파엘레 셜리, #레이저 아트, #마치우나스, #소호(머서가 1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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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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