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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강력범죄를 성적판타지로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성인 잡지 <맥심>의 9월호 표지 사진.
 강력범죄를 성적판타지로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성인 잡지 <맥심>의 9월호 표지 사진.
ⓒ 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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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은 사실 무지의 산물이다. 그 무지와 싸우는 이들은 언제나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바닥으로 떨어져야 하는지. 어디까지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지.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말이다.  

이번 남성지 <맥심> 표지 논란이 딱 그렇다. 지난 22일 '메갈리아'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된 뒤 SNS를 통해 퍼진 '맥심 표지처럼 살해될 뻔하다 살아난 년이다'라는 제목의 글이 딱 그런 피해를 대변한다. 무심코? 장난삼아?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는(기획을 하고, 모델을 섭외하고, 촬영을 하고, 원고를 마감하는) 한 월간지의 표지.

과거 택시 기사 성폭행 피해 여성이 그 표지를 보고 분노와 두려움에 찬 글을 올렸다. 사실 그 글의 진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요는 여성을 납치·살해하는 상황을 재연한 듯 보이는 장면을 연출한 <맥심> 9월호 표지를 접하고, 과거 당한 끔찍한 범죄의 기억과 대면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리라.

더욱이 경악한 것은 표지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잡지 속 '커버스토리'에는 심지어 (자동차 트렁크 속) 피해자의 시점으로 연기자 김병옥의 섬뜩한 표정과 연기 연출을 그대로 담은 컷이 실리기도 했다.

젊은 여성들의 화보를 주무기로 삼는 <맥심>과 같은 남성지에서 왜 영화 속에서나 용인될 범죄 현장, 그것도 범죄자의 리얼한 얼굴이 담긴 재연을 선보여야 했을까. 그것도 '여성 대상 범죄'가 명백해 보이는 연출과 화보를 내세워서 말이다. 하지만 그 의도를 파악하려면 <맥심> 편집장의 설명보다는 보도자료를 살피는 게 빠를 듯하다.

보도자료가 명시하는 <맥심>의 의도 

"지난 8월, 경기도 모처 폐가와 공터에서 배우 김병옥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 화보'의 촬영이 이뤄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살벌한 악역을 소화하는 명배우 김병옥이 'Bad Guy's Bible' 남성잡지 MAXIM과 만나 범죄 누아르 콘셉트의 화보를 제작하여 표지로 배포한 것.

오는 8월 24일 발간 예정인 MAXIM 9월호의 표지 화보는 배우 김병옥을 주인공으로 하고, 화보 사진마다 각각 납치, 살해, 시체 유기, 출소 등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표지 사진으로는 배우 김병옥이 청테이프로 칭칭 감은 여성 모델의 하얀 다리와 구형 각그랜저 트렁크를 배경으로 서있는 사진이 낙점되었다. 납치를 연상시키는 표지 사진 속에서 김병옥은 허공을 응시하며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자칭 '나쁜남자의 바이블'인 남성 잡지 <맥심>이 영화 <친절한 금자씨> <신세계> <해바라기> <올드보이>의 악역으로 친숙한 김병옥을 캐스팅해 여성(모델)을 납치·살해·시체 유기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강조하는 것은 '여성 모델의 하얀 다리'. <맥심>이 보여주고 싶은 화보의 정수란다. 여기에 "청테이프를 감은 하얀 발목의 주인공은 사실 MAXIM 여자 에디터"라고 굳이 설명한다(그 에디터는 이 화보를 찍을 때 무슨 심정이었을까). 

잡지의 편집 방향은, 그들 마음대로일 수 있다. 더욱이, 여성 모델의 스케줄 상황에 따라 여성 에디터가 화보를 대신 찍었다는 걸 홍보 포인트로 삼는 잡지가 <맥심> 아니던가. 그러나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진짜 악', '진짜 나쁜 화보'를 그리고 싶었다"라는 의도는 계산된 홍보 문구에 불과해 보인다. 이 화보가 논란이 된 진짜 이유는 그 화보의 소개글이 훨씬 더 정확하고 순진하게 의도를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왜 <맥심>은 나쁜 남자를 끌어들였을까

"여자들이 '나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진짜 나쁜 남자는 바로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

한국에서 '나쁜 남자'란, 대상에 따라 다르게 소비되고 있다. 이 '나쁜 남자'는 더 이상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속 범죄자와 불량배가 아니다. 오히려 김남길이 연기하는 드라마 <나쁜 남자>가 지칭하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잘생기고 젊은)남자'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연애 관계에서, 그 '나쁜 남자'를 욕망하는 이들은 여성이라고 상상된다.

그 나쁜 남자가 젊은 여성을 납치·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하는 화보가 어째서 '진짜 악' '진짜 나쁜 화보'가 되는지 누가 좀 알려주시라. 오히려 <맥심> 편집부는 '나쁜 남자'라는 언어 유희와 김병옥이라는 중견 배우의 이미지의 전복이라고 자찬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는 "진짜 나쁜 남자는 이런 거다, 어때? 좋아 죽겠지?(여자들아?)"라고 적어 놓지 않았을까. <맥심> 편집장의 뜬금없는 입장 글을 보면 이런 해석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화보 전체의 맥락을 보면 아시겠지만, 살인·사체유기의 흉악범죄를 누아르 영화적으로 연출한 것은 맞으나 성범죄적 요소는 화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부에서 우려하시듯 성범죄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한 바 없습니다. 영화 등에서 작품의 스토리 진행과 분위기 전달을 위해 연출한 장면들처럼, 이번 화보의 맥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려 넣은 범죄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맥심>이 예로 든 배우 김병옥의 대표작 어디에서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실질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화보가 박찬욱 감독'급'의 영화의 지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의도도, 재연 방식도 불순하기 그지없다.

재연 윤리마저 저버리고 피해자의 시선에서 촬영한, 그 누구도 유쾌하지 못할 화보를 가지고 '극적 표현' 운운하는 것이 불쾌할 따름이다.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워 먹고 사는 <맥심> 편집부가 이를 간과했다면 바보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면 편집장의 해명은 거짓말이 된다.

여성 대상 범죄 화보, 문제 없다고? 

남성지 <맥심> 9월호 'THE REAL BAD GUY'에 실린 사진들.
 남성지 <맥심> 9월호 'THE REAL BAD GUY'에 실린 사진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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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맥심> 측 해명대로 성범죄나 성범죄의 성적 판타지(미)화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과 아동이 주요 대상인) 가정 폭력이 하루 평균 101건 일어나는 나라, 유독 강력범죄에 여성 피해자가 많은 이 나라에서 단순한 '성범죄'의 묘사가 아니었다는 의도만으로 면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발상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이다.  

'여성 대상 범죄'자를 '나쁜 남자'로 지칭한 뒤, 시체처럼 보이는 여성마저 전시하고, "좋아 죽겠지?"라는 도전적인 문장으로 방점을 찍는 이 화보의 주체와 객체는 너무나 빤하지 않은가. '남성 잡지'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생존하는 <맥심>이 판매 부수에 영향을 주는 (심지어 뒤) 표지로 이런 화보를 채택했을 때 강조하려는 의도야말로 명확하지 않는가.

올 한해 이슈가 된 '여성 혐오' 반대 목소리에 대한 (상상의 그리고 실질적인 남성 독자들을 위해 주려는) <맥심>만의 '섹시한' 이슈 몰이 말이다. 불손하게도, 이러한 의도를 감추지 않는 <맥심>이 <친절한 금자씨>나 <올드보이>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했다는 것에 코웃음을 치게 된다. <맥심>이 예로 든 영화 네 편 모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표현이나 코드가 전혀 없다. 박찬욱 감독이 웃을 일이다.

단순히 "성범죄나 성적 판타지 묘사의 의도가 없었다"라고 변명하려면, 여러모로 공부부터 할 일이다. 여성 대상 강력 범죄율과 여성 평등 지수, 여성 인권 실태 등등 말이다. 그리고, 여성을 트렁크에 넣고 시체처럼 다루는 화보, 그러니까 선정성을 넘어 범죄의 직접적인 언급을 다루는 화보가 어떤 철퇴를 맞았는지 외국 사례도 공부해 보시라. 이 화보가 왜 문제인지, '성차'와 '응시' '관객성'이 등장하는 페미니즘 영화 이론까진 언급하지 않으련다.

무엇보다, 이러한 묘사와 논란으로 누군가 입을 2차 피해에 대해 자문해 보시길 바란다. <맥심>이 '나쁜 남자'를 탐한다고 여기는 여성들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면, 그때 해도 늦지 않다. 하나 더, <맥심>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도, 예술도 아니다. 어쭙잖은 화보로 한국 여성을 대상화하고 훈계하려는 짓은 그만하시길. 그래서 돌려 드린다, 우리의 친절한 금자씨가 날린 명대사를.

"너나, 잘 하세요."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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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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