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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나까프'에서 '나까프'는 '나쁜X 까발리기 프로젝트'를 줄인 말입니다. 여기서 'X'는 '놈'일 수도 있고, '짓'일 수도 있습니다. '나까프'의 대상은 공인 중의 공인인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급 공직자들입니다. 나아가 무력을 가진 군과, 공권력을 가진 이른바 4대 권력기관(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 그리고 갈수록 힘이 세지는 대기업 회장들도 당연히 '나까프'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편집자말]
3대 국회 시절의 현석호, 김정호, 조병옥, 김영삼, 김재곤 의원(왼쪽부터).
 3대 국회 시절의 현석호, 김정호, 조병옥, 김영삼, 김재곤 의원(왼쪽부터).
ⓒ 김영삼 회고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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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은 이승만의 노욕이 빚어낸 한국 헌정사의 치부다. 현대사는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다.

"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한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상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 개헌파동으로 손권배·김영삼·김재곤·김재황·김홍식·민관식·성원경·신정호·신태권·이태용·한동석·현석호·황남팔 등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이 무더기로 탈당하는 한편, 민국당은 무소속 국회의원들을 규합, '호헌동지회'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 창당의 계기를 만들었다."(<한국근현대사사전>, 2005년 9월 10일 가람기획)

이승만 노욕이 빚어낸 헌정사의 치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7월 제헌헌법을 만든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러나 독선적 국정운영과 의회세력 분포의 변화로 대통령으로 재선출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 의회는 직선제 개헌을 부결시켰다.

이승만은 1952년 전시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백골단을 동원한 관제 데모를 일으키고, 국회의원 50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강제연행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국회의원 10여 명을 국제공산당 연계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개헌을 강제한 것이다.

1차 개헌은 이런 혼란과 파동 속에서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원내 신라회가 정부안(대통령직선제)과 국회안(내각책임제)을 발췌·절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해 통과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그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노령의 이승만과 그의 '꼬붕'(부하)인 이기붕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재선에 한해 1차 중임할 수 있는 3선 금지조항을 폐지하기로 했다. 자유당은 이런 개헌 복안을 갖고, 1954년 5월 20일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 개헌을 찬성·추진한다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해 많은 당선자(114명)를 확보했다.

그중에 한 명이 장택상(국회 부의장·국무총리 역임)의 비서로 정계 입문해 그해 3대 민의원 선거에서 경남 거제도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된 김영삼이다. 1927년 12월생이니 그의 나이 만 26세였다. 당시 최고령자는 72세의 전상요 의원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었다.

김영삼 "3선개헌 반대 직언했다가 이기붕에 꾸중"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상황과 김영삼 의원의 주장을 기록한 '비화 제1공화국' 연재 기사(동아일보 1973년 12월 25일자)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상황과 김영삼 의원의 주장을 기록한 '비화 제1공화국' 연재 기사(동아일보 1973년 12월 25일자)
ⓒ 동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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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붙인 자신의 회고록(<김영삼 회고록1>)에서, 9월 초 어느 날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이 자신과 김철안·김상도 의원을 데리고 경무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사님, 삼선개헌을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직언했다가 이기붕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고 기술했다. 그때부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현석호·한동석·이태용 의원 등 자유당 내 개헌 반대파 의원 20여 명을 규합해 개헌 반대운동을 시작했다는 게 김영삼의 주장이다.

<동아일보>가 장기간 연재한 '비화 제1공화국 - 사사오입 개헌'(1973년 12월부터 1974년 1월) 같은 기획연재물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물론 그 기자에게 그런 얘기를 한 화자는 김영삼 본인이다. 연재 기사는 "이기붕(李起鵬), 김상도(金相道), 김철안(金喆安) 의원 등과 함께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했다는 김영삼 의원은 '이 대통령에게 개헌안을 철회하라고 진언했다가 묵살된 일이 있다'고 밝혔다"라고 돼 있다.

그런데 자유당의 개정안은 김두한(金斗漢)을 제외한 자유당 전체 의원과 윤재욱(尹在旭)을 비롯한 무소속 의원 등 개헌선인 136명의 서명을 받았다. 개헌 반대운동을 했다는 김영삼도 여기에 서명했다(이와 관련 김영삼은 나중에 자유당 지도부를 안심시키기 위한 '서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유당은 무소속 포섭과 조별 암호투표 지시 등 찬성 공작을 벌이고, 야당은 반대 공작을 펴 서로 승산을 가진 가운데 11월 27일(토) 비밀투표로 표결했다.

표결 결과는 재적인원 203명, 재석인원 202명,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결정족수인 재적 인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부족한 135표 찬성이므로 부결된 것이었다. 당시 사회자인 최순주(崔淳周) 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개헌안이 부결되자 나는 현석호·민관식 의원 등과 함께 그날 밤 술집에서 자축연까지 가졌다." <김영삼 회고록1>(100쪽)에 나오는 얘기다.

그러나 자유당 간부회는 '산회 후 재적인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영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이고, 따라서 의결 정족수는 135이기 때문에 헌법개정안은 가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영삼의 '부결 자축연'과 이철승의 멱살잡이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철승 의원이 최순주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고 있다.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철승 의원이 최순주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고 있다.
ⓒ 한국근현대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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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1월 28일(일)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 주장을 채택했다. 전날 '부결 자축연'까지 가졌던 김영삼 의원이 이날 의원총회에서 사사오입 주장에 대해 반대했다는 기록이나 주장은 없다. 그리고 다음날 자유당은 번복 가결 동의안을 기습 상정했다.

11월 29일(월) 오전 10시 44분께, 서울 중구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에서 제19회 제91차 본회의가 열렸다. 이틀 전에 같은 자리에서 방망이를 세 번 두들기며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던 최순주 부의장은 "제90차 회의록을 낭독하기 전에 정정할 사항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석명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 11월 27일 제90차 회의 중에 헌법개정안 통과여부 표결발표 시에 가(可) 135표, 부(否) 60표, 기권 7표로 부결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족수의 계산상 착오로서 이것을 취소합니다."

순간 의사당이 술렁거렸다. 야당 의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여기저기서 의장을 부르며 소란이 이는 가운데 최 부의장은 "가만히 계세요"라면서 말을 이어갔다.

"재적 203명의 3분지2는 135표로서 통과됨이 정당한 것으로써 헌법개정안은 헌법 제98조 제4항에 의하여 가결 통과됨을 선포합니다."

이철승 의원이 맨 먼저 의장석에 뛰어올라가 최 부의장의 멱살을 잡아들면서 "내려와"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몇 명이 더 올라가 단상은 난장판이 됐다. 이기붕 의장이 나서 경위를 동원해 소란을 진정시켰다. 이 의장은 최 부의장을 추궁하기 전에 회의록을 정정할지 말지를 먼저 결정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몇몇 의원들이 나서 설전을 벌이다가 곽상훈 부의장과 조병옥 의원의 주도로 야당 의원들은 퇴장해 버렸다.

수학·의학 동원해 '사사오입' 합리화한 해괴한 논리들

여당 의원들만 남은 의사당에서는 사사오입을 합리화하려는 해괴한 논리들이 쏟아졌다.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는 윤성순 의원은 "수학계의 태두인 인하공대 학장 이원철 박사와 서울대 문리대의 최윤식 교수의 입증에 의해서도 135명은 재적의원 203명의 2/3인 것을 확증했다"라고 장황하게 주장했다.

의사 출신 김철주 의원은 번복 선포 문제와 관련 "해산한 후 죽었다는 아기가 가사(假死) 상태에 있다가 살아난 일이 있는데 정족수라고 하는 것은 잘못 선포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135인이 틀림없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짜여진 각본에 따라 박순석 의원이 나서 바람을 잡았다.

"얼떨떨하게 생각하다가 이제 여러 의원께서 나와 수학법리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보아서 천하에 어데 갔다 놓는다 할지라도 이 주장은 틀림없다는 것은 여러분께서 뉘우쳐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 동의하려고 하는 것은 최 부의장이 그저께 선언한 것은 잘못 선언이요, 오늘 아침에 정정 선언한 것이 참다운 선언인 줄 우리는 알았으니 의사록을 정정할 것을 동의합니다."

이기붕 의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순식 의원 외 19분의 동의가 들어왔습니다"라고 밝히고 이미 서면으로 제출된 동의안의 주문(主文)을 읽기 시작했다.

"제1, 현 재적의원의 3분지2는 135명이며 따라서 135명의 찬성투표로써 개정안은 가결되는 것이다. 제2, 11월 27일 제90차 본회의에서 사회자인 최순주 부의장이 '찬성 135표임으로 개정안은 부결되었다'는 취지의 선포를 한 것은 착오에 기인한 것임으로 동 회의록은 찬성 135표로서 개정안은 가결되었다고 수정함."

'부결 자축연' 벌인 김영삼·현석호, 다음날 '가결 동의안' 서명

1954년 11월 29일 당시 '사사오입 개헌' 가결 동의안에 서명한 자유당 의원 20명이 기록된 국회 제19회 제91차 본회의 회의록. 27일 '부결 자축연'을 벌인 김영삼-현석호 의원의 이름이 '가결 동의안'에 올라있다.
 1954년 11월 29일 당시 '사사오입 개헌' 가결 동의안에 서명한 자유당 의원 20명이 기록된 국회 제19회 제91차 본회의 회의록. 27일 '부결 자축연'을 벌인 김영삼-현석호 의원의 이름이 '가결 동의안'에 올라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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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식 의원 외 19명의 동의안 제안자 중에는 개헌 추진에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이틀 전에 개헌안이 부결되자 술집에서 자축연을 벌인 현석호·김영삼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이 의장은 이 동의안을 거수 표결에 부쳤다. 즉각 만장일치로 가결됐음을 선포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문제의 동의안이 재석 125명 중 김두한·민관식을 제외한 123명 찬성으로 통과된 것으로 나와있다). 국회는 곧바로 개정헌법을 정부로 이송하고 정부가 당일 공포함으로써 이 헌법은 효력을 발생했다.

이 헌법개정은 사실상 누가 봐도 위헌이었다. 야심찬 최연소 의원 김영삼은 '부결 축하연'을 벌인 다음날 '가결 동의안'에 이름을 올린, 겉과 속이 다른 양태를 보임으로써 헌정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회의록(동의안)에 이름이 올라있는 데도 대다수 언론 보도나 기록은 김영삼이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해 탈당한 것만 부각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에 동의안 제안 사실을 완곡하게나마 지적한 보도는 <한겨레>가 유일했다.

"이때 김영삼 후보 등 자유당 의원 20명은 이 사사오입이 정당하다는 내용의 법안동의안을 제출해 야당 의원들이 모두 불참한 가운데 동의안은 가결됐다.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김 후보는 그해 말 자유당을 탈당해 이듬해인 1955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고 1990년 3당합당으로 여당으로 되돌아가기까지 35년간을 야당에 몸담았다."[<한겨레>, 대통령 후보들의 모든 것 – 정치역정(상) 1992년 8월 26일]

이승만의 3선개헌 이후 15년 뒤에 박정희의 3선개헌이 추진됐다. 1969년 9월 김진만 의원(공화당) 등의 명의로 개헌안이 발의되자 국회는 본회의에서 제안설명 및 질의답변, 대체토론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신민당 의원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 개헌으로 독재자의 길을 걷다가 쫓겨난 사실을 거론하며 박정희의 3선개헌을 경고했다. 그러자 김진만은 김영삼 의원도 사사오입 개헌에 찬성한 사실을 거론하며 4.19가 일어난 것은 개헌의 문제가 아니고 3.15 부정선거가 문제였다고 반박했다.

김영삼 의원은 9월 12일 본회의 대체토론에서 "김진만 의원이 '김영삼이가 자유당 때 개헌을 찬성했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라며 "나는 그때 이승만 박사를 만나 3선개헌을 포기하도록 주장했고 표결 때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표결과 탈당 사이에 있었던 '사사오입 의원총회 및 동의안 가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김영삼은 회고록에서도 '개헌에 반대표 던지고 자유당 탈당후 민주당 창당'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도 대부분 언론 보도를 통해 그렇게만 알고 있다. 그러나 개헌안 표결은 비밀투표였기에 사실 '가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이틀 뒤 그가 사사오입 개헌 '가결 동의안'에 서명했고, 그 동의안에 대한 거수표결에서 찬성했다는 사실이다.

○ 편집ㅣ손병관·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나까프'는 나쁜X놈들 까발리기 프로젝트의 줄임말입니다.



태그:#사사오입, #김영삼, #이승만, #이기붕,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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