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그림 그리고 싶어." 하고 말합니다. 여느 때와 달리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감판하고 그림종이를 내줍니다. 작은아이는 물을 쓸 수 있는 부엌바닥에 종이를 펼쳐서 그림을 그립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다가 저도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종이뿐 아니라 부엌바닥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겉그림
 겉그림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아이들이 그림놀이를 마친 뒤, 부엌바닥을 걸레로 훔칩니다. 부엌바닥을 더 깨끗하게 닦으라는 뜻으로 부엌바닥에 그림을 그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두 아이는 갓난쟁이였을 적에 사흘이 멀다 하고 이불이 쉬를 누거나 똥을 발랐습니다. 기저귀를 갈랴 이불을 빨랴 그야말로 손이 쉴 겨를이 없었어요. 아기를 돌보는 집은 깨끗해야 하니까 이불을 자주 빨라는 뜻으로 그렇게 쉴 새 없이 이불에 쉬와 똥을 발라 주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 땅에서 / 뾰족 나온 / 우리나라 // 거기에 / 점 하나 찍으면 / 우리 마을 (점 속에 내가 있다)

한 바퀴 세계를 돌고 보면 /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길 // 북극에서 오는 길도, /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도 이 길이라죠 // 우리 집 골목에서 / 끝나는 길 (우리 집 골목길은)

신현득 님이 빚은 동시를 모은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문학동네,2010)를 읽습니다. 1950년대부터 동시를 쓴 분이 바라보는 201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1950년대에 어린이를 바라보는 눈길하고 2010년대에 어린이를 헤아리는 눈길은 어느 만큼 다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 자리에서 바라보는 어린이 삶이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서 흐른다고 할 만합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썼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나라와 아시아와 지구별을 넓게 살필 수 있도록 북돋우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그리기도 했다고 느낍니다.

이름만 듣고도 알 수 있지 / 이쁘다고 이쁜이 / 순한 아기 순단이 / 야무진 차돌이 / 힘이 센 센둥이 (이름이란 그런 것)

내 이름은 김개나리야 // 전학 서류 가지고 찾아간 / 학교 이름도 / '개나리초등학교'였지 (개나리초등학교)

속그림
 속그림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나 어른더러 시를 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기를 바라고, 함께 놀지 않더라도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면, 함께 노는 대로 즐겁습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아 주지 않아도, 저희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새 놀이를 지어서 까르르 웃고 뒹굴고 달리고 뛰면서 지냅니다.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함께 놀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시라고 한다면, 또 동시라고 한다면, 굳이 꾸며서 쓸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노는 이야기를 쓰면 모두 동시가 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거이 바라보는 삶을 고스란히 쓰면 언제나 동시가 돼요.

땀을 흘리면서 달리는 이야기를 씁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을 빨래터에서 함께 물이끼를 걷고 노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당이랑 뒤꼍에서 풀을 뜯는 이야기를 씁니다. 철마다 달리 부는 바람을 마시면서 꽃을 보고 열매를 얻는 이야기를 씁니다. 심부름을 하고 살림을 거드는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한테는 '학교'만 학교이지 않습니다. 집도 마을도 숲도 모두 학교, 곧 배움터입니다. 살아가는 터가 배우는 터요, 살아가는 터에서 사랑을 누립니다.

"어둠나라 개가 달을 먹네." / 월식날 밤, 옛사람들이 / 달을 보며 말했지 (달을 먹는 개)

속그림
 속그림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 흐르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동시를 쓰는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건네려고 하는가를 되새깁니다. 옛이야기는 먼 옛날부터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고,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면서 다시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또 아이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는 사이에 새로운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달을 먹은 개 이야기도, 제비와 흥부 이야기도, 어린 개구리와 어미 개구리 이야기도, 베짱이 이야기도,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이 들려줍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아버지로 지냅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어른으로 우뚝 서면, 이 아이들은 새롭게 아이를 낳을 테고, 그때에 나는 할아버지로 지내면서 새로운 삶과 이야기를 지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하루가 삶으로 모이고, 이러한 삶이 이야기가 되며, 이러한 이야기가 사랑이 되어 흐릅니다.

돋아난 / 새싹을 / 손끝으로 / 톡, / 건드려 봐 // 놀라서 / 옴싹 / 움츠리지 (새싹 간질이기)

장독대 돌봐 놓고 / 둘레에 맨드라미, 봉숭아 몇 포기도 / 만져서 피워 주고 // 해거름에 해님은 배고프다며, 휘딱 / 저녁 먹으러 가 버렸어요 (해님은 손으로 장맛을 들여요)

해가 뜨는 아침에 해를 바라보면서 놉니다. 햇볕이 뜨거운 낮이 되면 구름이 와라, 바람아 불어라, 노래하면서 놉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이 되면 발그스름하다가 노르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놉니다. 별이 돋는 밤하늘을 그리면서 놀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크게 하품을 하고는 잠자리에 듭니다.

즐겁게 놀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아이한테는 근심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없이 신나게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나 어른한테도 근심이나 걱정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 어버이와 어른한테는 무엇이 깃들까요? 바로 사랑이 깃들어요. 어버이와 어른은 저마다 사랑을 가슴에 담고서 아이들을 어루만집니다. 이불깃을 여미면서 가슴을 토닥입니다. 입맛을 다시면서 자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가슴속에 꿈을 품습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사랑을 헤아리면서 삶이 기쁘고, 아이는 꿈을 지으면서 삶이 재미납니다. 동시는 사랑하고 꿈이 만나는 삶자리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게 노는 아이들 가슴에서 꿈이 자라나기를 빕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게 노는 아이들 가슴에서 꿈이 자라나기를 빕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aladin.co.kr/hbooks)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신현득 글
전미화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0.12.8.
8500원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신현득 지음, 전미화 그림, 문학동네어린이(2010)


태그:#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신현득, #동시읽기, #어린이문학, #삶노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