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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물쇠'로 몸살을 앓고 있는 퐁네프 다리
 '사랑의 자물쇠'로 몸살을 앓고 있는 퐁네프 다리
ⓒ 안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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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사랑의 도시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다. 누가 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센 강변에 가서 보니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듯한 착시현상을 겪는다. 그 강이 한국의 4대강이 아니라 센 강이라는 사실 때문에 괜히 가슴이 뛴다.

센 강변에는 예술과 낭만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잡다한 예술소품과 기념품을 펼쳐놓은 노점상들이 분위기 있는 풍경화를 구성하고 있다. 강에 걸쳐있는 돌다리 하나하나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역사적인 조형물이다. 그 자체가 품격있는 작품이다.

그렇게 어설픈 딜레땅뜨(dilettante) 처럼 센 강변을 소요하다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된다. 눈에 띄는, 또는 눈에 익지 않은 장면을 마주치는 순간이다. 어김없이 센 강변의 다리 난간마다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전 세계의 연인들이 파리로 달려와 오직 사랑 하나에 목을 매달고 있는듯하다. 좀 섬뜩하다.

이미 그런 열렬한 사랑의 시절을 한참 지나친 나로서는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든 지나치면 늘 문제가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영원할 수 없다. 사랑을 좀 해봐서 안다. 아무리 사랑의 도시 파리에서 벌이는 행위라고 해도 지나치면 별 수 없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파리는 지금 그 너무 지나친 사랑의 자물쇠 때문에 크게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름다운 다리가 사랑과 예술과 낭만의 징표나 문신이 아니라 심각한 도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센 강의 다리들마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이름을 새긴 자물쇠가 수십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파리에서 불멸의 영원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전 세계의 연인들이 수십만 쌍이 넘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랑을 잃고 상심한 파리 시민들에게 자물쇠는 그저 차가운 쇠덩어리일 뿐이다. 유치한 연인들의 치기어린 사랑의 장난일 뿐이다. 게다가 다리에 자물쇠를 매단 후 열쇠를 센 강에 쓰레기처럼 투기하다니. 그걸 영원한 사랑을 추억하려는 '사랑의 의식'이라니. 눈에 거슬리고 못마땅할 뿐이다.

사랑을 힘겨워하는 파리시민들이 적지 않았나보다. 마침내 수천 명의 파리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자물쇠가 보기 싫다며 부착을 금지하자는 청원을 제기했다.

'사랑의 자물쇠는 이제 그만(No Love Locks)'

청원의 명분과 이유는 다분히 설득력이 있다 수십만 개의 자물쇠 무게 때문에 센 강변의 다리가 구조적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다는 것. 실제로 퐁데자르 다리의 난간 일부가 자물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고작 몇 유로 짜리 사랑의 자물쇠로 사랑을 증명하려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 셈이다. 한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라는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하지 않았다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 흐르는 센 강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 흐르는 센 강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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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파리는 사랑을 하기 좋은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애초 시민들이 사랑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설계하고 건설한 도시가 아니었을까. 오늘날 파리를 배경으로 한 몇 편의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진다. 주로 운명적인 사랑을 주제로 삼은 많은 사랑영화들이 파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줄리 델피의 '비포 선셋',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코엔형제가 연출한 '사랑해,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중 단연 내가 선정한 불멸의 박스오피스 1위는 줄리엣 비노쉬의 '퐁네프(Pont Neuf)의 연인들'이다. 아마도 청년 시절 프라하의 봄에 이어 그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불란서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를 특별히 좋아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비참한 신세다. 사랑을 잃고 또 시력까지 잃어가어가는 그림 그리는 여자 '미셸'이다. 걸인처럼 거리를 방황하다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비슷한 처지의 곡예하는 남자 '알렉스'를 만난다. 그리고 서로 치열하고 처절하게 사랑을 나눈다. 마치 내일이란 없는 것처럼. 그리고 숙명처럼 헤어진다. 3년 후 크리스마스에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약속은 지켜진다.

그런데 레오 카라 감독에 의해 영화로나마 불멸의 사랑이 실연된 퐁네프 다리는 실제 다리가 아니다. 25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거대한 세트다. 30만 평 규모의 세트장에 '퐁네프'를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조각가, 연극무대 디자이너 등 2만 여명이 세트 제작에 총동원되었다. 심지어 센 강까지 실제 수심 20m 정도로 운하처럼 파서 만들었다. 세기적인 사랑의 명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그저 시나리오 한편으로 뚝딱 탄생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퐁네프 다리는 퐁네프의 연인들로 인해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센 강에 놓인 36개의 다리 가운데 9번째 다리다. 놓은 지 400년이 넘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당초 목조였으나 석조로 재건되면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양식으로 건축했다는 이유로 '새로운(Noef)'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맞다. 퐁네프의 다리에서는 지금도 늘 새로운 사랑이 만나고 헤어질 것이다.

14억 중국인 소비자가 사랑하는 관광상품, 파리

파리를 사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점령(?)한 개선문
 파리를 사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점령(?)한 개선문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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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세계적인 사랑의 도시임에 틀림없는 증거는 또 있다. 중국인들이다. 14억명의 중국인들도 파리를 사랑한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파리에서 파리시민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을 더 많이 목격했다. 에펠탑,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등 가는 곳마다 중국인들이, 중국인 관광객들이, 중국인 소비자들이 파리를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차이나타운이었다. 마치 '유쿼(游客)'가 장악한 한국의 명동이나 제주도 같았다.

프랑스 사랑이 지나친 중국인들은 지난 5월 프랑스 관광 기네스 신기록을 세우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중국 모 그룹에서 창립 기념으로 전체 직원의 절반이 넘는 6400여 명을 단체로 프랑스 관광을 보낸 것이다. 전세기 84대, 칸과 모나코의 객실 7900개, 버스 146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파리에서는 루브르박물관, 에펠탑 등을 돌아보는데 1300만 유로(약 160억 원)를 지출했다. 돈을 물 쓰듯 한 셈이다. 물론 프랑스관광청이나 프랑스 정부에서 이 중국인들을 귀빈 대접한 것은 물론이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프랑스를 찾는 외국인 순위에서 일본을 제치고 5위에 올라섰다.

이렇게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갈 법한 이른바 세계적인 관광명소는 가지 않겠다는 게 이번 여행에서 나름대로의 원칙이었다. 그래서 파리에서는 에펠탑,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등을 관광 기피 목록에 적어놓았다. 하지만 원칙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에펠탑과 개선문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가 보려고 간 게 아니다. 지나던 길에 에펠탑이 눈에 띄었다.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없을만큼 인상적인 모습으로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에펠탑은 너무 높고 커서, 개선문은 숙소 옆이라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존재감이란 게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에펠탑보다 네모 반듯한 가로수가 더 인상적

네모 반듯하게 머리를 깎은 가로수가 인상적인 에펠탑
 네모 반듯하게 머리를 깎은 가로수가 인상적인 에펠탑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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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은 생각보다 더 크고 더 멋졌다. 큰데 아름다웠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교량기술자 귀스타프 에펠이 독특하게 디자인한 덕택이다. 그토록 큰 철구조물을 불과 몇 달만에 뚝딱 건축했다고 한다. 당시 경이로운 철구조물 토목공학과 건축설계술로 화제가 되었다. 높이 324m로 1930년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오늘날은 4개의 반원형 아치 기단 등 미학적 가치가 더 평가받고 있다.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에펠탑에 오른다고 한다. 에펠탑 주변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들이 줄을 서고, 엘리베이터 앞에는 중국인들이 줄을 서 있다. 나는 관광지든, 식당이든, 극장이든, 승진이든, 파벌이든 줄을 서는 모든 행위를 싫어한다. 굳이 위에서 아래 쪽을 내려다보려는 욕망도 거의 없다. 아래에서 땅을 딛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에펠탑의 정점을 올려다보는 게 더 좋다. 그래서 에펠탑 앞에 줄을 서지도, 에펠탑을 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나에게는 에펠탑보다 더 인상적인 게 있었다. 가로수다. 광장에서 육군사관학교까지 열병하듯 도열한 가로수. 네모 반듯하게 머리를 깎은 모습이 잘 훈련된 근위병의 모습처럼 보였다. 에펠탑과 서로 조화를 이루고, 대화를 자꾸 시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에펠탑보다 가로수를 더 많이 바라보고 왔다.

높이가 50m나 되는 웅장한 개선문은 로마의 개선문을 따라 한 것이다. 그런데 로마 콜로세움경기장 앞의 개선문보다 더 크고 높았다. 파리의 것은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이라 부른다. 개선문이 세워진 샤를 드골광장을 축으로 12개의 거리가 갈라져 위에서 보면 마치 별(Etoile)모양으로 보인다고 붙인 이름이다. 1806년 나폴레옹이 기공했다.

개선문 안의 무명용사 무덤에는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헌화도 시들지 않는다고 한다.
비가 내렸지만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거리까지 걸었다.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Élysées)는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약 2㎞에 걸쳐있는 대로다. 명품 상가, 식당, 영화관, 기념품점 등이 몰려있다.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면서 이 거리의 이름을 딴 'Aux-Champs-Elysees'란 노래를 자꾸 흥얼거렸다. 물론 '오 샹젤리제' 구절만 계속 반복해서.

마침 거리에는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데 샹젤리제 거리에는 그냥 비를 맞고 걸어다니는 파리 시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비를 피하려 걸음을 재촉하는 다급한 모습도 아니었다. '비가 오는데 왜 우산을 안 쓰는지' 몹시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웬만하면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쫓기듯 뛰지 않는다. 우산 없이 몸으로 비를 맞고 걸으면 하늘과 접선하는 기분이 된다. 그리고 비를 좀 맞아도 죽지 않는다.

샹젤리제는 엘리시온 들판(Elysian Field)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행복한 영혼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고 믿었다. 우리나라의 도시에도 그런 행복한 이름과 뜻을 가진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 행복한 도시의 행복한 거리를 걷는 행복한 시민이라도 되고 싶다. 돈이 드는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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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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