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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이라고? 지하철역 이름이 정말 '9월 4일'이라고? 아니, 프랑스 파리에 그런 역이 있다고?"

나는 순간 전율했다. 파리에 '9월 4일(카트르 셉탕부르, Quatre-Septembre)'이라는 이름의 지하철역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서는. 더군다나 그 날짜가 프랑스 제3공화국이 시작된 날을 기억하는 의미라서 더 기가 막혔다.

그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목수정 작가의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책을 뒤적이다 116p에서 숨이 잠시 멈췄다. 그 페이지의 첫 문장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9월 4일(4 Septembre), 이런 이름의 지하철역이 파리에 있다."

그건 마치 대학에서 지질학을 처음 배우면서 전기석(tourmaline)이라는 보석광물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느꼈던 묘한 흥분과 비슷한 감정이다. 마치 출생의 비밀을 밝혀낸 듯한. 전기석은 내 탄생석이다.

메트로 3호선 페레르(pereire) 역에서 9월 4일 역으로
 메트로 3호선 페레르(pereire) 역에서 9월 4일 역으로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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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의 거친 질감을 맨손으로 주물르는 듯 왠지 뭉클한. 운명이란 사는 동안 헤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고, 제 손으로 더 모진 굴레를 가시면류관처럼 머리에 얹는 그런 심정.   
  
이 세상에, 프랑스 파리에 9월 4일 역이란 게 있다는 그토록 놀라운 사실을 인지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대체 쉰 살을 넘어 살 때까지 그런 중요한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니. 그것도 그 지하철역이 1904년부터 그토록 오랜 세월을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데.

아무리 외국과 서양문물에 관심을 멀리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프랑스에, 유럽에 벌써 다녀왔을 텐데. 아예 눌러 앉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럼 그 이후의 내가 처해있는 세상과 생활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몹시 안타깝고 억울했다.

내 생일은 제3공화국 9월 4일

9월 4일 역(Quatre-Septembre)으로 가는 메트로3호선 노선도
 9월 4일 역(Quatre-Septembre)으로 가는 메트로3호선 노선도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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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다소 충동적인 이번 유럽여행을 결정하는 데 '9월 4일'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리에 9월 4일 역이 있다는 사실, 그 역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8할은 넘게 작용했다. 믿음이 깊은 신앙인들이 성지순례를 염원하듯 죽기 전에 한번은 꼭 그 역을 가봐야할 것 같았다.

이쯤에서 내가 왜 '9월 4일' 가지고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지 밝히는 게 좋겠다. 대체 그 날짜가, 그런 숫자 따위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낱낱이 고백하는 게 좋겠다. 나한테 그 날짜와 숫자는 그냥 날짜와 숫자가 아니다.    

나는 9월 4일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9월 4일은 내 생일인 것이다. 비록 음력생일이라 프랑스 같은 서양의 그 9월 4일과는 서로 다른 날짜를 말하겠지만 상관없다. 내가 태어나자 대한민국도 9월 4일 역의 그 프랑스 시대처럼 제3공화국이었다. 1963년 가을 내가 태어나고 두어달 후쯤 5.16 군사정변 세력들은 제3공화국 간판을 본격 내걸었다. 대한민국도, 나도 공식 접수한 것이다.

그로부터 먼 훗날, 내가 태어난 1963년이라는 해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했을 때, 그 불쾌하고 불행한 심정을 '혁명적인 1960년대'라는 시의 형식을 빌어 기록한 적이 있다. "제3공화국에서 태어난 건 참 재수없는 일이었다"고.

"천구백육십사년 김승옥씨는, 무진기행을 무심코 꺼내 보였다 세상 사람들은 놀라 자빠졌다 아직은 세상 사람이던 전혜린 성균관대 독문과 교수도 놀라 자빠졌다

전교수는 명동 옛 국립극장 뒷골목으로 칠년 연하의 김씨를 끌고 들어갔다 오늘날 최불암씨가 된 아이의 엄마가 술과 밥을 팔던 은성 대폿집으로 두 남녀는 밤새도록 동반 통음했다

이건 혁명이에요 글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게 이런 비루한 나라에 승옥씨 같은 세련된 작가가 살고있다는 건 기적이에요 구라파적이며 세기말적인 솜씨에요 이런 동양에서

그만 하시죠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그러신다면, 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천구백육십팔년 김수영씨는, 시인답지 않게 버스에 치어 죽었다 혁명적 시인은 고사하고 더 이상 일반시민일 수도 없었다 프라하에서는 쏘련놈들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들을 빼앗았다 곧 봄 마저 빼앗아갔다 빠리에서는 학생들의 데모가 동학혁명처럼 기승을 부렸다

천구백육십년대대 내내, 나의 유년과는 무관한 혁명들은 성황을 이루었다 나는 매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허구헌날 어린 애 취급을 당하거나 스스로도 어린 애 행세를 하며 지냈다 한낱 어린 애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나무랄 데는 없는 어린 애의 태도였다 당시 나는 생존했을지언정 실존할 수는 없었다는 변명을 어른이 되면 꼭 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천구백육십삼년 제삼공화국이었다 더럽게 재수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생일도 9월 4일

9월 4일 역(Quatre-Septembre)
 9월 4일 역(Quatre-Septembre)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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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3공화국은 1870년에 탄생한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프러시아에게 연전연패한다.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국민방위군 정부는 저항을 주도한다. 마침내 1870년 9월 4일 파리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아돌프 티에르 대통령의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고 해방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역사에 밝은 이들은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듬해이자, 보불전쟁이 종전된 1871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기어코 파리코뮌(Paris Commune)의 기억을 되살려낼 것이다.

그해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역사는 '파리코뮌'을 이렇게 기록한다. 프랑스 민중들, 특히 노동자 계급이 주도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 정부. 파리코뮌에 참여한 파리 민중들은 야간 이념 학습까지 불사하며 일치단결했다. 규칙과 질서를 철저히 엄수하는 운명공동체였다.

그래서 70일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자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10시간 노동, 노동자의 야간노동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 사회 개혁안을 주장했다. 프랑스 제국주의 정부의 무능함으로 잉태된 제3공화국. 그리고 3공화국의 프랑스 민중들의 항쟁이 파리 코뮌의 씨앗이자 불씨가 된 셈이다.

'9월 4일 역'은 노래가 되고 소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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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지하철의 2층 열차 -
ⓒ 안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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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도시, 꼬뮌의  도시 파리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9월 4일'을 단지 역에만 새겨두지 않았다. 광장에도, 거리에도 9월 4일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기억하고 있다. '9월 4일 역'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고 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 그리고 배우 조니뎁의 부인이었던 바네사 파라디(Vanessa Paradis)가 부른 'Station Quatre Septembre'라는 노래다. 조니뎁과 결별하고 나서 부른 노래라 그런지 더 애틋하고 처연하게 들린다. 한번 쯤 들어보시기를. 특히 이 부분.

"Les nuits moites allongé sur le coco et la cendre(재 위로 길게 누운 습한 밤들), Le vin chenu, la misère nue mais quel bonheur ensemble(최고급 와인, 비참한 가난, 그래도 함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9월 4일 역'은 프랑스 사람들에게만 의미를 남기지 않았다. 다소 뜬금없지만 유럽과 유럽인을 동경하는 일본에서도 새로운 의미로 부활했다. 일본 소설가 오오사키 요시오에 의해 9월 4일 역을 제목이자 소재로 삼은 <9월의 4분의 1>이라는 단편소설로 재탄생한 것이다.

소설 <9월의 4분의 1>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다소 상투적이거나 통속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일본 현대소설 특유의 다소 가볍고 사소한 이야기다. 마침 '9월 4일 역'의 존재를 알고난 직후 동명의 자전적 소설을 진지하게 구상하고 있는 나로서 좋은 점수는 줄 수 없다.

남자주인공은 유럽여행을 떠난 소설가 지망생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비오는 거리에서 우연히 한 일본인 여자를 만난다. 이쯤 되면 결말은 뻔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하룻밤의 풋사랑이거나 한여름밤의 꿈.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 여자는 홀연히 떠나면서 남자에게 급히 짧은 편지를 남긴다.

"지금부터 파리로 떠나요. 함께 하고 싶지만, 겐지와 함께 있으면 슬픔을 모두 이야기해버릴 것 같아서, 그것이 무서워서 우선 여기를 떠납니다. 소설, 쓰세요. 체념하면 안돼요. 당신은 반드시 쓸 수 있어요. 나도 열심히 할게.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동양인의 연대감에 건배. 다음에는 9월 4일에서 만나요. - 나오"

나처럼 파리의 '9월 4일 역'의 존재를 모르던 겐지는 "'9월 4일에 9월 4일 역에서 만나자"는 나오의 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사랑이 스쳐 지나갔다. 13년이 지나 겐지는 원하던 유명 작가도 되고 프랑스 9월 4일 역도 다시 찾았지만 나오는 더 이상 그곳에 없다. 아무 데도 없다.   

9월 4일 역에서 9월 4일을 한참 돌아보다

나도 이번에 파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 지하철역 근처에서 빵집을 하고 있다는 한국인 제빵사다.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는 바게트를 만드는 10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인이 친구라고 알려줬다. 파리 가면 찾아가 만나보라고 했다. 프랑스 10대 바케트에 드는 유명한 빵맛도 좀 보고.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마침 빵집이 쉬는 날이었다. 빵집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많은 이로부터 들어서 잘 안다. 그런 나로서 객지 프랑스에서 프랑스 빵을 만들다 지쳐서 쉬고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기약할 수 없는 다음 기회를 형식적으로 기약했을 뿐. 

어디서든, 만날 사람은 만나고 만날 수 없는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연은 거의 숙명적이다. 비록 만날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파리 '9월 4일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역 여행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한국의 제3공화국에서 9월 4일에 태어난 내가, 프랑스의 제3공화국이 열린 날을 기억하는 파리의 9월 4일 역에 가 보다니.

9월 4일 역(Quatre-Septembre)을 열차가 천천히 지나치면서 50여 년 전 내가 태어난 시대와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태어난 9월 4일을 자꾸 되돌아 보고 있으려니, 마치 9월 4일 역에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9월 4일 역의 터널이 고향역 지붕처럼, 어머니의 자궁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나는, 착해지고 자유롭고 평화로워졌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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