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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언론계에 회자되던 농담이다. 한 식당에서 기자와 검사, 세무 공무원이 모여서 소주를 마셨다. 술값은 누가 냈을까? 정답은 '술집 주인'이었다고 한다. 워낙 '공짜'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누구도 끝까지 지갑을 꺼내지 않는 바람에 가장 '을'인 술집 주인이 부담하고 말았다는 우스개다.

검사와 세무 공무원이야, 공권력을 다루는 사람들이니 일견 이해가 간다. 그런데 기자는 왜 '공짜'에 익숙할까. 기자는 비록 '보이는 권력'은 없으나 기사를 통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의도한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 수도 있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허물을 캘 수도 있다. 그래서 기자를 다른 말로 '무관의 제왕'이라고도 칭한다.

연합통신(현 연합뉴스)과 문화일보를 거치며 언론인으로 살았던 김영인 기자는, 과거 기자들이 촌지를 받아먹던 이야기를 묶어 책 <촌지>를 냈다. 모두 본인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라고 말했다. 책에서 '기레기'란 이름으로 표현된 기자는 결국 저자의 선배·동료·후배 기자들인 셈이다. 

기자가 기자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불특정 '다수'가 아닌 불특정 '소수'의 '과거사'라고 강조했다.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정말 과거의 일부 기자들은 '무관의 제왕'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갑질'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이들이었다. 

기자 2명에 침실 6개 있는 객실... 비용은 '정부 예산'으로

여론과 권력 사이, 침묵의 대가로 행해진 촌지실화 <촌지>
▲ 책표지 여론과 권력 사이, 침묵의 대가로 행해진 촌지실화 <촌지>
ⓒ 지식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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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은 촌지를 촌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낑'이라는 은어를 사용했습니다. 기자들은 그 낑을 '슈킹'하고, '콜'도 하고 있었습니다. 슈킹은 '돈을 거둬 모은다'는 '슈킨(集金)'이라는 일본말이었고, 콜은 아마도 영어의 'Call'이었습니다. 촌지도, 촌지를 챙기는 것도 은어였습니다. 스스로도 '거시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 <촌지>에서

기자들은 항상 '낑'에 목말라 있었다. 특종을 놓치는 '낙종'은 참아도 '파이 나누기'에는 비분강개했다. 그래서 알짜배기 기자실에 새로운 언론사가 들어오는 게 못마땅했다. '텃새'가 심했다. 출입기자가 되는 기자실 등록은 취재만큼 엄격하고 편집회의만큼 진지했다.

그토록 소중했던 이 '낑'이 구체적으로 뭘까. 그 시절, 일부 기자들의 출장비는 세금으로 충당됐다. 출입처에서 취재 요청을 하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지방의 산하 기관이나 유관 기업 취재를 가야하니 준비해달라고 말하면 그대로 이뤄졌다. 차량과 숙소 제공은 물론 맛 좋은 식사와 술, 거기다 '봉투'까지. 물론 취재 간 곳에서 돌리는 '낑'은 또 별개로 챙겼다. 취재는 뒷전이었다.

해외 출장도 마찬가지다. 비행기 예약부터 도착해서 가이드를 해줄 사람까지 모두 출입처의 몫이었다. 한 기자는 노골적으로 출입처의 홍보실장에게 팔로 날갯짓을 해대며 해외 출장을 요구했다고 한다.

기자들이 해외출장병에 걸리는 이유는 뭘까. 다녀올수록 '이익'일 수 있었다. 우선 신나게 놀고, 즐기고, 물건을 살 수 있다. 어떤 기자는 해외출장을 떠날 때 초라한 점퍼바람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는 '일류 신사'로 변해 있었다.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고 온 것은 물론이고, 구두까지 사 신고 들어온 것이다. - <촌지>에서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데도 지갑은 오히려 불어난다. 책은 이를 '요술지갑'이라고도 표현했다. 기사 부담에서도 해방되고, 즐기고, 거기다 '낑'까지 챙기니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데스크도 이런 출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신문사가 따로 비용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낑'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기자들은 선물을 한 아름 안아 오곤 했다.

'낑'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대우도 달라진다. 한번은 '기레기'가 장관을 따라 미국으로 취재를 간 적이 있다. 장관 수행기자는 2명이었는데, 제공된 호텔 객실은 침실이 6개에 욕실이 7개였다. 특급 중의 특급이었던 것. 이는 모두 '정부 예산'으로 지불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 신문에는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우려하던 목소리가 실리고 있었다.

잘나가는 기자는 민원도 해결해준다. 다만 '기레기'에게는 억울한 약자의 민원이 아닌 '낑'에 좌우되는 민원이 우선이었다. 공공기관의 뒤편 상인들이 봉투를 찔러주자 "기자들의 출입이 불편하다"면서 후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출입처의 승진과 인사에도 개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촌지, 시장 할머니의 '2만 원'

그래도 '기레기'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낑'은 따로 있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가던 시절, 침묵하던 언론은 그제야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기사를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책의 주인공 '기레기'도 제보를 받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 양동시장에서 좌판에 과일을 팔던 60대 할머니에게 당시 정황을 들었다. 할머니는 앞의 물건만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신의 사연을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광주 민중항쟁 때, 두 아들을 잃었다.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충격으로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시장에서 과일을 팔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던 것. 시력이 좋지 않은 이유도 그 충격에서였다.

'기레기'는 할머니의 집에도 들리고 아들이 실종됐다는 전남 화순의 너릿재에도 할머니와 함께 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할머니와 아들을 찾아다녔다. 쉽지 않았다. 마지막 날, 작별 인사를 고하자 할머니가 '기레기'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기자 양반 정말 고마워. 그동안 한을 안고 살았는데, 그래도 조금은 후련해…." - <촌지>에서

한사코 사양했지만, 거듭 권하는 호의를 사양할 수만은 없어 받아서 보니 '2만 원'이 들어있었다. 차마 쓰지도 못하고 책상 서랍에만 넣어뒀다. 할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려 참을 수 없었다. 이듬해 다시 쇠고기를 사들고 할머니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 사이 할머니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기레기'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낑'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사자들은 평온한데... '김영란법' 왜 흔드나

2016년 9월 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은 언론인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일부는 여전히 "전 국민을 범죄자로 만들 셈이냐"고 어떻게든 맹탕을 만들고자 애쓰는 모양새다.

정작 거리낄 것 없는 당사자들은 평온했다. 한 현직 사회부 기자는 "주변 기자들과 김영란법의 언론인 적용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본 적이 없다"면서 "김영란법이 발효된다 해도 바뀌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영란법에 저촉될 일이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다만 "다른 기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관행이다, 사람 사이의 정이다, 하면서 1년 6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어떻게든 '김영란법'을 흔들려는 자들이 있다. 굳이 '벤츠'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 애끓는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은 대다수의 국민은 그런 식으로 사랑과 정을 표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정작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 놓는 게 두려우면서 '국민'이란 어정쩡한 수사를 동원하지 말라. 소수를 위해 잃는 게 너무 많다. '김영란법'을 더 이상 흔들지 말라.

덧붙이는 글 | <촌지> (김영인 지음 / 지식공방 펴냄 / 2015.05 / 1만3500원)



촌지 - 여론과 권력 사이 침묵의 대가로 행해진 촌지실화, 한국사회에서 촌지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김영인 지음, 지식공방(2015)


태그:#김영인, #촌지, #지식공방, #언론, #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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