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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죽고 100년 정도 지나, 춘추 시대가 전국 시대로 넘어간 시점에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에서 약 20km 떨어진 쩌우청(鄒城) 마안산(馬鞍山)에서 아성 맹자는 태어났다. 맹자는 어릴 적 공자의 손자, 증자의 제자였던 자사(子思)에게 배움을 받고, 저술에서 공자를 29회나 인용하며 스스로 공자의 후계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상적인 면에서 맹자의 민본주의는 사회주의를 닮아 있고, 때론 의(義)를 짓밟는 군주를 과감히 몰아내야 한다는 급진적인 혁명 사상을 표방하기도 한다. 공자의 고향 근처, 공자의 문하에서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을 맹자가 어떻게 그만의 독특한 사상을 빚어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공자를 모신 취푸는 여러 번 다녀왔는데, 맹자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있어 사람이 많은 노동절 연휴지만, 아들과 함께 손에 <맹자역주(孟子譯注)> 책을 들고 기차에 올랐다. 중국은 과일, 고기는 물론 계란, 가스 등도 모두 근(500g)으로 무게를 달아 파는데, 백화점 앞에서 책을 무게로 파는 것이 신기하고 괘씸해 샀던 거다. 책의 내용도, 사상도 근으로 달아 파는 중국에 사는 씁쓸함이 묻어 있는 책이다.

흥륭탑이 유명해진 것은 2008년 한 도굴단이 다량의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치아를 해외로 밀반출하다가 적발되면서다.
▲ 옌저우 흥륭탑 흥륭탑이 유명해진 것은 2008년 한 도굴단이 다량의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치아를 해외로 밀반출하다가 적발되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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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맹자님께 미안한 마음을 안고 기차 창밖을 보니 기차가 취푸를 지난다. 한 정거장을 더 가서 옌저우(兗州)에서 내렸다. 맹묘(孟廟)를 가는데 취푸보다 옌저우가 약간 더 가깝기도 하지만, 지난(濟南) 가는 길에 우연히 보았던 예사롭지 않은 높이로 우뚝 서 있던 탑이 바로 옌저우역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치수에 성공한 후 전국을 9주로 나누며 이곳을 '옌저우'라고 명했다는데, 지명 외에는 안 쓰이는 한자라 읽기도 쉽지가 않다. 역사가 4000년이나 되는 도시 옌저우는 인구 805만 명의 지닝(濟寧)시의 한 구(區)로, 인구 55만 명의 작은 도시에 머물러 있다. 취푸, 옌저우, 쩌우청이 삼각형을 이루는 지역인데, 공자, 맹자, 증자 등의 유교 문화가 잘 간직된 고대 도시라는 점을 잘 활용해 서로 연대해서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탑 얘기를 했더니 흥륭탑(興隆塔)이라고 알려준다. 6세기 말 수나라 때 세워진 13층 흥륭탑은 54m 높이로 꼭대기에 오르면 공묘의 대성전이 보일 정도로 높다. 아마 수천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하부의 7층은 두툼한 탑의 기초를 이루고, 상부의 6층은 큰 탑 위에 작은 탑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현재 복원 공사 중이라 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외부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흥륭탑이 유명해진 것은 2008년 한 도굴단이 다량의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치아를 해외로 밀반출하다가 적발되면서다. 출처를 추적하다보니 바로 이 흥륭탑 지하에서 도굴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11세기 북송 시기 만들어진 탑의 지하궁전에는 다량의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진신사리를 담은 금괴와 유리병, 비각 등이 있었는데, 모두 국보급 문화재다. 이 지역이 비록 유교의 본고장이지만 불교 또한 크게 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흥륭탑이 유명세를 타면서 주변으로 흥륭사가 한창 복원 공사 중인데, 택시로 한 바퀴 둘러보고 맹묘가 있는 쩌우청으로 향한다.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의미 있는 제방이지만 잘 관리가 안 되고 있는 느낌이다.
▲ 금구파(金口?)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의미 있는 제방이지만 잘 관리가 안 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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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우청 입구에 맹자의 고향이라는 패방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 맹자고리(孟子故里) 쩌우청 입구에 맹자의 고향이라는 패방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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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저우에서 쩌우청으로 가는 길이 지금은 새로 도로가 났지만, 과거에는 꼭 금구파(金口壩)라는 방죽을 지났다고 한다. 택시기사의 안내로 가보니 5세기 초 북위 때 건설된 제방인데, 돌과 돌 사이를 쇠로 묶어 놓아 금구파라고 불린다고 한다. 굴원이 <어부사>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겠다"고 했는데, 금구파의 물이 더러워 무엇도 씻기가 꺼려질 정도다.

쩌우청은 맹자의 본 고장답게 '맹자고리(孟子故里)' 라는 도로를 가로지르는 큰 패방으로 시작된다. 택시는 맹모가 맹자를 위해 세 번째로 이사했을 법한 맹자소학(孟子小學) 앞에 멈춰 선다. 그 바로 앞이 맹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아성묘(亞聖廟)로도 불리는 맹묘다.

맹묘는 송대인 1037년, 공자 45대손 공도보(孔道輔)가 맹자의 묘를 찾아 건설했다고 하는데, 성에서 멀어 불편하고 수해도 잦아, 112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동서 95m, 남북 458.5m로, 맹묘의 건축물은 송, 원, 명을 거치며 38차례 보수 확장되다가, 현재는 1715년 강희연간에 세워진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보수 확장 때마다 새로운 문, 건축, 비석 등이 들어섰을 터이니, 당연히 그 수가 적지 않을 것이다. 

공묘의 두 번째 문인 영성문(?星門)이 맹묘의 입구 정문에 자리해 있다.
▲ 맹묘의 정문 영성문 공묘의 두 번째 문인 영성문(?星門)이 맹묘의 입구 정문에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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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의 두 번째 문인 영성문(欞星門)이 맹묘의 입구 정문에 자리해 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기 전에 문성(文星)인 영성에 먼저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맹자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공묘와 마찬가지로 영(欞)자 아래 무당 무(巫)를 쓰지 않은 것은 맹자가 귀신을 섬기지 않았음이다. 원래는 음력 2월과 8월 제례 때만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객에게 늘 개방돼 있다.

영성문을 들어서 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면 동쪽 성벽에 계왕성(繼往聖), 서쪽에 개래학(開來學)이라고 적힌 나무로 된 패방 건축이 보인다. "공자 학문을 계승하고 계속 발전해 나가다(承先啓後, 繼往開來)"는 의미다. 공자가 죽고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유가사상이 빛을 잃어갈 때 맹자가 구원 투수처럼 등장해 유학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 넣고 발전시켰다는 것인데, 맹묘 구석구석에 이런 업적을 찬양한 곳이 많다.

“공자 학문을 계승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다(承先啓後, 繼往開來)”는 의미다.
▲ 계왕성(繼往聖)과 개래학(開來學) “공자 학문을 계승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다(承先啓後, 繼往開來)”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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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묘의 다섯 개 정원 중 첫 번째 정원을 지나면 아성묘 석방이 나온다. 석방 동쪽에 1581년 명대 만력제 연간에 세워진 '추국아성공묘(鄒國亞聖公廟)'라는 비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명대 맹묘의 정문임을 알 수 있다. 네 개의 석각 기둥 위에 구름, 용이 간결한 디자인으로 조각되어 있다.

아성묘 석방 안 두 번째 정원에는 송나라 때부터 심어진 수령이 천 년 가까운 측백나무 고목들이 즐비해 있다. 노동절 연휴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니, 옛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산책하기 안성맞춤이다.

정원의 서편에 종이 하나 걸려 있는데 김대안철종(金大安鐵鐘)으로 불린다. 금나라 때 제조된 것으로 가운데에 '중신천추, 황제만세(重臣千秋, 皇帝萬歲)' 여덟 자가 새겨져 있는데, 신(臣)자가 뒤집혀 있다. 제조과정의 실수인지, 일부러 신하들의 마음이 황제를 향하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세 번째 문인 태산기상문(泰山氣象門)은 원대 건축 당시 의문(儀門)이라 했는데, 명대에 보수되며 북송의 유학자 정호(程顥)가 "공자는 하늘과 땅이고, 안회는 바람과 구름이며, 맹자는 태산의 높은 기상이다"고 말한 데에서 '태산기상' 네 글자를 따온 것이다.

370여 그루의 고목이 풍기는 세월의 향기와 깊이가 상당하다.
▲ 천년 고목의 정원 370여 그루의 고목이 풍기는 세월의 향기와 깊이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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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기상문을 지나자 고목 정원이 은은한 맹묘의 멋을 한껏 뽐낸다. 370여 그루의 고목이 풍기는 세월의 향기와 깊이가 상당하다. 정원의 동서로 동쪽에 성성소(省性所), 서쪽에 제기고(祭器庫)가 보인다. 제례 때 쓰던 제기와 물품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그 바로 위로 동서에 또 각각 문이 하나씩 있는데, 명대 건축 당시 '천지의 정기가 서린 곳에서 인재가 나온다'는 의미로 종령문(鐘靈門), 육수문(毓秀門)이었으나, 1739년 건륭제가 보수하며 문의 이름을 각각 지언문(知言門)과 양기문(養氣門)으로 바꾸었다.

<맹자>에서 취한 것인데, 제자 공손추가 맹자에게 장점을 묻자 맹자가 "나는 말을 잘 알며,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답한 대목에서다. 논리적인 언어 표현으로 유명한 맹자가 상대방의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능력이 '지언'일 테고, 도덕적 함양을 통해 의로움을 행함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용기를 기르는 것이 '양기'가 아닐까. 그 가늠하기조차 힘든 지고지순한 경지를 그 문가에서 천년 가까이 서 있는 고목은 헤아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측백나무에 거북이 모양으로 혹이 나서 마치 거북이가 고목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고목 사이에 멋진 정자, 강희비정(康熙碑亭)이 서 있다. 손자인 건륭제가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남긴 맹자에 대한 찬사와 제례에 관한 비석에 정자를 지어준 것으로, 맹묘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은 주로 찬사로 승선성(承先聖), 성인 공자의 업적을 잘 계승했다는 것이다.

매년 정월 16일, 이곳에서 묘회(廟會)를 지낼 때 이 비석을 받치고 있는 용의 여섯 번째 아들 '삐시(贔屭)'를 만지면 16개의 병이 사라진다는 믿음이 있어선지, 머리 부분이 반들반들 윤이 나 있다. 강희비정 담장 너머로 건륭비정이 있으니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맹자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강희제가 남긴 맹자에 대한 찬사와 제례에 관한 비석에 정자를 지어준 것으로, 맹묘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 강희비정(康熙碑亭) 강희제가 남긴 맹자에 대한 찬사와 제례에 관한 비석에 정자를 지어준 것으로, 맹묘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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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비정을 보고 나니 중앙에 승성문(承聖門), 동쪽에 계현문(啓賢門), 서쪽에 치경문(致敬門)이 있는데, 관람 안내도에 따라 동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다섯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오통비(五通碑)가 이어진다. 맹모가 공부를 그만두고 온 맹자를 깨우치기 위해 베틀의 날실을 끊은 곳이라는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자사가 <중용>을 저술한 곳이라는 자사자작중용처(子思子作中庸處), 맹모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을 기린 사당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 맹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술성유상비(述聖遺像碑), 건륭제가 자로의 업적을 찬양한 술성자로자찬(述聖子思子贊)인데, 전란 등으로 고성 도처에 산재해 있던 비석들을 모아 이곳에 세워둔 것이다.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의 계승자란 의미의 계현문을 들어서자 270여 개의 비각들이 사열하듯 양옆으로 서 있다. 송, 원, 명, 청을 거치며 황제의 성지, 제례와 맹자의 공덕을 기리는 등의 내용이 다양한 서체로 남아 있다. 맹묘비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송대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한 맹자묘비와 지금은 사라진 원대의 파스파(phagspa)문자로 기록된 비각이다.

다양한 서체의 270여 개의 비각들이 사열하듯 양옆으로 서 있다.
▲ 맹묘비각 다양한 서체의 270여 개의 비각들이 사열하듯 양옆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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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원대에 아성으로 추대되었다.
▲ 원대의 파스파 문자로 된 비각 맹자는 원대에 아성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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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묘비각 끝에 맹자의 아버지를 모신 계성전(啓聖殿)이 있다. 명대 건축 당시 주국공전(邾國公殿)이라 불리다가 아성 맹자를 길러냈다는 의미로 계성전으로 바꾸었다. 공자, 증자의 부모님을 모신 사당도 모두 '계성전'이라 불린다. 문혁 때 크게 훼손되었으며 갔을 때도 공사 중이었다.

사실 맹자의 아버지 맹손격(孟孫激)은 맹자가 세 살 때 세상을 떠 맹자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뒤 계성침전(啓聖寢殿)에는 맹부와 맹모 장(仉)씨가 함께 모셔져 있다. 노나라 평공이 맹자를 만나려하자 신하 장창(藏倉)이 맹자는 아버지보다 어머니 장례를 더 후하게 치른, 예의를 모르는 자이니 만나지 말라고 해 오늘날까지 소인배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맹자가 세 살 나이에 치른 아버지 장례와 관직에 있을 때 치른 어머니 장례가 다를 수밖에 없을 터인데, 괜한 트집을 잡아 장창이 맹자를 폄훼했다는 이유다.

아성전은 공자의 대성전보다 아담하지만, 2인자의 여유로움과 멋이 풍겨나는 건물이다.
▲ 아성전 아성전은 공자의 대성전보다 아담하지만, 2인자의 여유로움과 멋이 풍겨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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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성전에는 26개의 둥근 돌 받침 위에 연꽃과 목단 등이 은은하게 수놓아져 있다.
▲ 아성전의 돌기둥 무늬와 내부 아성전에는 26개의 둥근 돌 받침 위에 연꽃과 목단 등이 은은하게 수놓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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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묘의 동쪽 라인에서 중앙으로 들어서자 드디어 아성전(亞聖殿)이 모습을 드러낸다. 1121년 송대에 건축되었다가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1672년 강희제가 중건한 것이다. 가로 27.7m, 세로 20.48m, 높이 17m 겹처마에 녹색 기와를 얹은 아성전은 공자의 대성전보다 아담하지만, 2인자의 여유로움과 멋이 풍겨나는 건물이다. 대성전 돌기둥에는 용이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 양각되어 있지만, 아성전에는 26개의 둥근 돌 받침 위에 연꽃과 목단 등이 은은하게 수놓아져 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성전 입구에는 건륭제가 쓴 '니산 공자의 도를 전하다'는 뜻의 도천니산(道闡尼山) 편액이 있고, 안에는 옹정제가 쓴 '선대의 업적을 지켜 후대에 전하다'는 수선대후(守先代後) 편액 아래로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맹자상이 있는데, 문혁 때 훼손되어 1986년 복원한 것이다. 맹자 곁에는 맹자가 선인(善人), 신인(信人)이라 칭찬하고, 노나라 정계에 진출하자 기뻐서 잠을 못 이뤘다는 애제자 낙정자(樂正子)가 맹자를 모시고 있다.

아성전 앞 동서 양무(兩廡) 곁채에는 맹자의 제자인 고자(高子), 계손씨(季孫氏), 팽경(彭更) 등이 모셔져 있다. 그 가운데에 강희11년 봄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생긴 우물인 천진정(天震井)이 있다. 천진정을 보고 있는데 낯익은 한국어가 들려 와 돌아보니 밀양에서 왔다는 한국관광객들이다. 맹자의 인기가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좋은 것 같다.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며 한국과자를 한 움큼 집어 아들에게 준다. 공묘와 증묘에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이 없던 맹묘에 하늘이 벼락으로 우물을 내린 것처럼, 모국이 아들에게 맛있는 과자를 선물해 준 셈이다.

아성전의 돌기둥은 송대, 26개의 둥근 돌 받침은 명대 건축되었다.
▲ 26개의 둥근 돌 받침 아성전의 돌기둥은 송대, 26개의 둥근 돌 받침은 명대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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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성전 뒤로 아성침전은 맹자의 생애와 사적을 소개하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간결하고 논리 정연한 전개와 명쾌하고 적절한 비유로 고전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맹자>의 유명한 글귀와 <맹자>에서 유래한 200여 개 성어 중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 알묘조장, 오십보백보, 호연지기, 적자지심 등이 보인다. 가져온 <맹자역주> 책을 꺼내 몇 군데 줄을 쳐보다가 아들 타박에 사진만 찍고 후일을 기약한다.  

맹묘의 서편을 따라 나오는데 비단으로 된 제문을 불태웠다는 분백지(焚帛池), 제사에 앞서 목욕을 했던 치엄당(致嚴堂) 등이 배웅해 준다. 맹자를 기리는 비석 옆을 슬렁슬렁 지나치려니, 물은 구덩이를 메운 후에야 앞으로 나아간다고 했던 맹자의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이 퍼뜩 떠오른다.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철저한 도덕성과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걷는 단호한 용기와 의를 실천하는 맹자의 호연지기를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으로 맹묘 관람을 마치고 양기문을 빠져 나와 맹부(孟府)로 향한다. 양기문 뒤 천년 고목이 이방인 부자에게 정답게 손을 흔들어 주는 듯하다.

간결하고 논리 정연한 전개와 명쾌하고 적절한 비유로 고전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맹자>의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다.
▲ 맹묘 서편의 비각 간결하고 논리 정연한 전개와 명쾌하고 적절한 비유로 고전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맹자>의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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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맹묘, #맹자, #흥륭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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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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