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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체성이 잘 드러난 시 <58년, 개띠>를 썼던 서정홍 시인이 이번에는 '꿈'을 모아 시집을 냈다. 그런데 그냥 꿈이 아니고 '못난 꿈'이란다. 시집 제목은 <못난 꿈이 한데 모여>(나라말 펴냄).

한때 노동자로 살았던 시인은 요즘 합천 황매산 기슭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 그는 '공동체 삶'을 꿈꾼다. 그는 농사짓는 사람들과 '열매지기 공동체'를 하고, 청소년과 함께 '담쟁이 인문학교'를 열어 이웃이나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서울에서 도덕 선생하다/산골에 들어와 농부가 된/인성이 아버지가//멋있는 말을 해서/사람들을 웃겼습니다//-농촌에 들어와서/가장 쓸모없는 게 도덕이더라고요!/도시에서 입만 살아서 도덕 도덕 떠들었지/삶은 빵점이었다니까요!"(시 "쓸모 있는 시" 전문).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시인이다. 서정홍 시인은 같이 사는 이웃과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을 시 속에 담아 놓았다. 이웃은 무심코 했던 말일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시인이 하고 싶었던 말일 수도 있다.

서정홍 시인.
 서정홍 시인.
ⓒ 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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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외할머니"에서, 백화점에서 30만원 짜리 옷을 본 할머니는 "가슴이 벌렁거려서 그냥 왔다 아이가"라며 "30만원이모/감자가 서른 상자/들깨가 사십되"나 된다고 했다.

시 "산골 아이 정욱이"에서, "초등학교 3학년 정욱이가/아버지한테 달 보러 가자고 조르는데요/아버지는 바쁘다고만 하네요"라며 "시를 좋아하고 시를 잘 쓰는/정욱이 가슴에/달이 찾아온 게 아니라/시가 찾아온 줄도 모르고/아버지는 바쁘다고만 하네요"라 했다.

또 시 "미안해요"에서, 설거지하던 시인이 아내한테 "-여보, 밥 푸고 나서/밥주걱을 설거지통에 바로 넣지 않았으면 좋겠소"라 하며 "밥주억에 붙은 밥알이/설거지통에서 자꾸 나를 쳐다보며 막을 걸어요/쌀농사 지은 농부들한테 미안하지 않느냐고"라 했다. 쌀 한 톨도 귀하게 여기는 농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한 며칠, 도회지 다녀왔더니/잡초란 놈도/산밭 주인인 나를 깔보고/쑥쑥 자랐습니다/까치란 놈도/비웃으며 나를 내려다봅니다//내가 화려한 도회지에/정신이 팔려/잠시 마음이 떠나 있었다는 걸/잡초란 놈도 까치한 놈도/모를 리가 없습니다/다 압니다 알고 말고요"(시 "스승" 전문).

사람은 누구나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는 '스승 '

농촌에 사는 서정홍 시인은 '잡초'도, '까치'도 스승이란다. '잡초'와 '까치'를 '스승'으로 여기고 사는 그가 시를 읽는 사람들한테는 '스승' 같은 느낌을 준다.

시인은 감자 주문을 받고 고맙다고 하는 아내를 보고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그는 사람은 누구나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는 '스승 역할'을 한다.

"감자 주문 전화를 받으면서/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머리를 꾸벅거리는 아내//눈앞에 사람도 없는데/왜 머리를 꾸벅거리느냐고/내가 여러 번 말했는데도/그 버릇, 아직도 못 고치는 아내//사람은 모두/남의 덕으로 사는 건데,/머리 꾸벅거리는 게/무어 이상하냐고/오히려 나를 바라보는 아내//머리 숙일 줄 모르고/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나를/다 안다는 듯이…"(시 "산다는 것은" 전문).

"땅에 무릎을/수백 번 꿇지 않고서야/어찌 밥상 차릴 수 있으랴//땅에 허리를/수천 번 숙이지 않고서야/어찌 먹고살 수 있으랴//끝없이 무릎 꿇고/끝없이 허리 숙이지 않고서야/어찌 목숨 하나 살릴 수 있으랴"(시 "먹고 사는 일" 전문).

쌀 한 톨이 생산되고 밥이 되어 사람 입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시간도 필요하지만 정성이 그만큼 들어간다. 흔히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하는 말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시인은 농사처럼 사람이 사는 일 또한 '끝없이 무릎 꿇고 허리 숙이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서정홍 시인이 새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를 펴냈다.
 서정홍 시인이 새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를 펴냈다.
ⓒ 도서출판 나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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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공동체학교 김희정 교장은 "가난하고 못났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흔하게 피어나 따뜻한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한 들꽃,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도 서정홍 시인은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며 "이 세상 모든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안은 시인의 애틋한 사랑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나눈다"고 추천의 글에서 썼다.

남해 상주중 교장인 여태전 시인은 "서정홍의 시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감추고 싶은 우리들 내면을 콕콕 찌르는 따끔한 비수"라며 "탐욕과 허영으로 찌든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되묻는 구도의 노래다, 하늘·땅·사람을 섬기며 빚어낸 간절한 기도문"이라고 소개했다.

서정홍 시인은 "이 시집은 남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썼다"며 "농부 나이로 겨우 열 살이라 아직 철없는 나이지만, 살아가면서 여태 보고 듣고 겪고 배우고 깨달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 편 한편 말하듯이 썼다, 나이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시를 읽고 시를 쓰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삶의 새순'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했다.

서정홍 시인은 시집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동시집 <윗몸 일으키기> <우리 밥상> <닳지 않는 손> <나는 못난이>, 산문집 <농부 시인의 행복론> 등을 펴냈다.


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지음, 나라말(2015)


태그:#서정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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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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