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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다보탑, 감은사 터 쌍탑, 석가탑
 (왼쪽부터) 다보탑, 감은사 터 쌍탑, 석가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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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에서는 무덤을 "스투파(stupa)"라 했다. 스투파가 불교 전파를 타고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탑(塔)"이 되었다. 탑이 본래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놓고 예배를 드리는 공간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물론 탑은 법당보다도 먼저 생겼다. 법당은 건물인데다 규모도 커서 상당한 재정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건립할 수 있었지만, 탑은 그에 비해 손쉽게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의 불교 신자들은 탑 앞에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불교가 들어왔다. 당연히, 처음에는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여러 층의 누각 형태 목탑을 지었다. 하지만 나무 제품은 보존 기간이 짧은데다, 몽고군이 황룡사 9층 목탑을 태워 없앤 예에서 보듯이 화재에 약한 단점이 있었다. 그 탓에 현재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 지은 집이나 목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왼쪽부터) 안동 법흥동 전탑, 분황사탑, 정림사터 석탑
 (왼쪽부터) 안동 법흥동 전탑, 분황사탑, 정림사터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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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중국에서는 전탑(塼塔)이 유행했다. 본래 벽돌(塼)집 짓기를 좋아했던 중국다운 발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전탑이 별로 없다. 안동시 법흥동 8-1번지 소재 7층 전탑(국보 16호), 운흥동 231번지 소재 5층 전탑(보물 56호), 조탑동 139번지 소재 5층 전탑(보물 57호),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91-6번지 소재 송림사 5층전탑(보물 189호), 그리고 경기도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이 현전 전탑의 전부이다.

그 후 만들기 어려운 벽돌로 탑을 쌓는 대신 돌을 벽돌(塼)처럼(模) 다듬어서 만든 모전(模塼)석탑이 창조되었다. 최초의 모전석탑은 634년에 세운 분황사 석탑(국보 30호)이다. 그 뒤를 이어 경북 의성 탑리 5층 석탑(국보 70호) 등이 세워졌다.

본격적인 석탑은 백제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7세기 초반, 백제인들은 돌을 나무처럼 자유자재로 다듬어 전북 익산의 미륵사터 탑(국보 11호)을 세우고, 부여 정림사터 5층석탑(국보 9호)도 세웠다.

그 후 682년(신문왕 2) 통일신라 최초의 일가람쌍탑인 감은사의  5층 석탑(국보 112호)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751년(경덕왕 10)에는 우리나라 탑의 최고 걸작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이 완성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이 백제사람 아비지의 작품이었듯, 다보탑과 석가탑 또한 백제사람 아사달의 작품이었다.

대구에는 어떤 탑들이 있을까

동화사 금당암 전경과 동서쌍탑
 동화사 금당암 전경과 동서쌍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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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된 탑들만 살펴보면 7기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동화사 금당암의 동서 3층 석탑(보물 248호)이다. 동서라는 수식어가 붙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쌍탑이다. 즉, 감은사터 쌍탑보다는 시기적으로 뒤인 통일신라 시기에 세워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 쌍탑은 일반인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동화사 안에서도 일반인 출입 금지구역인 금당암 안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동화사 경내의 비로암에 가면 금당암 쌍탑과 같은 보물급인 3층석탑(보물 247호)을 볼 수 있다. 863년(경문왕 3)에 세워진 이 탑은 높이 3.71m로, 비로암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앞뜰에 자리하고 있다. 나직한 흙단 위에 2층의 받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1967년에 해체와 복원을 겪었다.

이 석탑은 규모는 작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1층 몸돌 아래 부분과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에 굄돌을 별개의 돌로 끼워넣듯이 조각한 수법은 특이한 모습으로, 대체로 신라 하대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래서 보물로 지정을 받은 것이다.

(왼쪽부터)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과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
 (왼쪽부터)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과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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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보다는 등급이 낮지만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아 보호되고 있는 3기의 탑도 제 각각 출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대구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3기의 탑은 팔공산 동화사 염불암의 청석탑(유형문화재 19호), 비슬산 대견사터의 3층 석탑(유형문화재 42호), 그리고 팔공산 부인사의 서탑(유형문화재 17호) 이다.

염불암의 청석탑은 말 그대로 청석탑이라는 특징을 자랑하고 있어 반드시 한번은 찾아볼 만하다. 특히 염불암은 927년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 간신히 목숨만 살려 이곳까지 도망쳐 왔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답사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후백제 군대가 경주에서 동화사로 진격해 왔다는 사실과, 염불암이 동수대전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왕건이 염불암에 머물렀다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로 여겨진다.

(왼쪽부터) 비슬산 대견사터 3층석탑, 동화사 부인사 서탑.
 (왼쪽부터) 비슬산 대견사터 3층석탑, 동화사 부인사 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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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유형문화재인 비슬산 정상부의 대견사지 3층 석탑은 작품보다도 주변의 뛰어난 경관을 특별히 자랑한다. 천연기념물 435호이자 세계 최대의 빙하기 암괴류 유적으로 이름이 높은 비슬산 암괴류의 장관을 사방으로 두르고 있고, 아득히 내려 보이는 낙동강 방면의 풍경 또한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게다가 5월에 찾으면 100만평을 가득 메운 고위평탄면의 참꽃 축제를 즐길 수 있다.

(왼쪽부터) 비슬산 용연사 탑, 경북대 야외박물관에옮겨져 있는 인흥사터 탑, 앞산 법장사 탑
 (왼쪽부터) 비슬산 용연사 탑, 경북대 야외박물관에옮겨져 있는 인흥사터 탑, 앞산 법장사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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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2기의 탑도 빼놓을 수 없다. 앞산 법장사의 3층 석탑(문화재자료 5호)과 비슬산 용연사의 3층 석탑(문화재자료 28호)이 그 주인공들이다. 물론 문화재자료이니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탑들보다 예술적 아름다움에서 한 수 아래이다. 하지만 그들 문화재자료 탑 앞에서 절을 하며 극락왕생을 빈 불도의 신앙심만은 국보탑 앞 불도의 신앙심에 결코 뒤지지 않았으리라.

그런가 하면,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월파원)에 옮겨져 있는 인흥사터 석탑은 비지정 문화재이지만, 대학 구내에 있어 찾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특히 잔디가 새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나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날에는 그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또 본래 달성군 인흥사에 있었는데 숭유억불 정책이 한창이던 때에 탄압을 받아 절이 훼손되는 바람에 지금의 자리로 끝내 이전되고 만 애잔한 역사도 서려 있어 볼 때면 어쩐지 슬픈 느낌이 잔잔하다.


태그:#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동화사, #비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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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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