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른둘 갑작스런 '갑상샘암' 선고와 투병 생활로 망가진 몸. 그로 인해 바뀌어버린 삶의 가치와 행복의 조건.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잖아"라며, 가족조차도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았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란 것을. 꿈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라! '내일'이면 늦어버릴지도 모른다. - 기자 말

건강검진에서 나를 포함해 우리부서에만 총 3명이 갑상샘에 결절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사람들. 나는 내가 암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결국 이 병원 저 병원에서 똑같은 검사만 받다가 결국은 암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면 이 두 명은 혹시 모를 상황에 잘 대비해 처음부터 대학병원을 예약하고 검사를 받았다. 그런 철저한 준비에 감동해서였을까? 두 명은 양성결절로 판정을 받았다.

그중 나와 띠동갑이 차이나는 한 명은 직장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선배였다. 평소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이라 살갑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는데 우연히 둘 다 갑상샘 결절을 발견하고는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날 저녁,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됐다.

선배는 검사결과 암으로 확진이 되면 회사에 휴직계를 낼 것이라고 했다. 휴직.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휴직이라는 제도가 있는지 평소에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분의 말은 이랬다.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보니 알겠다. 남들보다 1년 빨리 승진해봤자 월급 10만~20만 원 차이인데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버리고 살았던 것 같다."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오고 있지만 난 그 선배의 말이 충격으로 남았다. 나도 지금껏 '월급쟁이' 신분에 길들여져 살아와서 그런지 내 권리를 찾아먹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바보같이 '이대로면 내 1년 농사 말아먹는다' '일주일 입원하면 연차가 몇 개나 남나'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고졸 입사'라는 꼬리표

사람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에서 갑상샘암 자료를 뒤져보고 있었다.
▲ 텅빈 사무실 사람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에서 갑상샘암 자료를 뒤져보고 있었다.
ⓒ 강상오

관련사진보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형이 나를 불러 이야기했다.

"우리 집안 형편을 너도 알다시피 널 대학에 보내줄 수 없으니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기술이나 배워라."

그 길로 나는 가기 싫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재미없는 학교를 다니는둥 마는둥 했다. 그렇게 겨우 졸업장만 받을 수 있을 커트라인의 출석과 성적으로 졸업했다. 착실하고 공부 열심히 한 친구들은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에 잘만 취직하는데 내게는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이름모를 중소기업에 취직했고 몇 년간을 죽어라 일만 했다. 그렇게 조금씩 실력을 인정받아 나름 업계에서는 잘나갔지만, 여전히 '고졸'이라는 학벌은 대한민국에서 꼬리표처럼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그 꼬리를 자르기 위해 산업체 특별전형으로 '사이버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졸업을 하기 전에 집에 홀로 계시던 어머니께서 쓰러져 수술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고, 타지생활을 접고 집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모 대기업 지역공채 공고를 보게 됐다. 근무지가 '김해'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원서를 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라 여전히 '고졸'이었는데 정말 운 좋게도 나는 그 회사에 합격을 했다. 고졸이라 처우가 형편없었지만 열심히 하면 지금처럼 해왔던 것처럼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시스템은 중소기업과 달랐다. 아무리 열심히 해서 주변 동료들과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예전 중소기업처럼 파격적인 인사는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높은 실적으로 몇 번 추천받아 '발탁 승진'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형평성과 명분이라는 명목 아래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결국 발탁 승진했고, 조금씩 꼬인 내 고졸 입사의 늪에서 빠져 나올 희망이 보였다.

제일 길게 쉬어본 휴가가... 병가라니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내가 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극복하고 앞으로 더 달려야만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빨라야 1~2년, 많아야 10만~20만 원'

나는 처음으로 '취업규칙' 파일을 다운받아 뒤지기 시작했다. 근속년수에 따라 '병가' 휴가를 내면 몇 달간 급여의 70%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결국 암에 걸리면 휴가를 내겠다던 그 선배는 양성결절로 판정돼 계속 회사를 다녔다. 반대로 아무 생각도 없던 내가 '병가'를 제출하고 몇 달간의 휴가에 들어갔다.

열아홉 어린나이에 사회에 나와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일만 해온 내게 그 병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오래 쉬어본 휴가가 됐다. 그리고 이 휴가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계기가 됐다.


태그:#갑상샘, #직장, #병가, #욕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