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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깊은 태안사로 가는 길

구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중 나온 대원거사 부부의 차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전남 곡성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대원거사는 오전에 서울에서 태안사 참배를 하기 위해 미리 와 있었다. 내가 최전방 경기도 연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곳 태안사까지 오는 데는 꼬박 1박 2일이나 걸렸다.

오전 6시 경기도 연천에서 출발해 목포에 도착, 전남 무안 고향 선산에서 문중 시제를 지내고, 오후 2시 반에 목포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갔다. 목포-광양간 고속도로가 개통돼 전보다는 훨씬 빨라졌지만, 목포에서 순천까지는 1시간 반이 걸렸다.

순천에서 나는 초등학교동창회에 참석하고 있는 아내를 만나 하루를 묵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순천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구례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대원거사 부부의 차를 타고 태안사로 향했다.

곡성 동리산(현재 봉두산) 자락에 깊숙히 자리잡은 태안사 전각
 곡성 동리산(현재 봉두산) 자락에 깊숙히 자리잡은 태안사 전각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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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으로 가는 섬진강변은 아름답다. 지리산 자락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강변에 고즈넉이 뻗혀있는 신작로, 그리고 추억의 곡성 기찻길….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가는 신작로와 기찻길 곡선도 아름답다. 강변을 따라가다보니 먼 태곳적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든다.

구례구역에서 우회전해 섬진강로를 따라 8km를 달리니 압록사거리가 나온다. 압록사거리는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압록에서 주암 방면으로 좌회전해 보성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태안사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해 보성강을 건넌다. 보성강은 작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다.

태안사는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이곳은 찾아오는 이가 드물고 고요해서 마음 닦는 수행자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용이 깃들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구름이 깊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또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삼한의 명승지라 할 만한 곳이다. 이곳 동리산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연 신라 혜철국사(惠哲國師, 785~861)의 비문에 나와 있는 태안사에 대한 설명이다.

태안사 일주문
 태안사 일주문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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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득히 멀고 깊은 곳에 위치한 태안사가 한때 승보사찰 송광사와 태고종 본산인 선암사 그리고 지리산 제일의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지금은 거꾸로 화엄사의 말사가 돼 있다. 그 찬란했던 옛 문화재는 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고 돌로 깎은 부도만 남아 태안사의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토록 깊고 먼 동리산 자락에 숨어 태고의 숨결을 간직한 태안사는 우리 시대에 아픈 상흔과 상처를 껴안고 있다.

저항시인 조태일이 태어난 곳

보성강을 건너 죽곡면 유봉리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해 순천, 월등 방면으로 가다가 비포장도로로 꺾어지자 곧 <조태일 시문학관>이 나온다. 1941년 대처승의 아들로 태안사에서 태어난 저항시인 조태일. 그의 영혼은 어느 곳에 방황하고 있을까? 1970년대 시퍼런 독재정치권력에 대항해 식칼을 들이댔던 조태일. 아마 그는 지금도 시대의 아픔을 안고 뜬 눈으로 식칼의 날을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
 태안사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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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중략) /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 꺾어 버리며, 내 단 한 칼은 / 후회함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 말을 갈고 자르고 /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 늘 뜬 눈으로 있다 /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조태일, <식칼론> 중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순결성을 유린하는 제도적 폭력에 맞선 시인의 꼿꼿한 자세와 역사의식은 지금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독재시대의 턱밑에 '식칼'을 들이대고 당당히 맞선 시인이다.

"벼랑을 건너뛰는 이 무적의 칼 빛은 /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 단 한 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 /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 메마른 땅 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국가 위에서 /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놓고 / 더욱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 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 /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조태일, <식칼론> 중에서)

세상이 답답해서 소주에 밥을 말아 먹었다는 조태일은 57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앓은 간암은 독재시대의 억압과 폭력이 그의 정신을 옭아매어 앓게 했던 시대암 아닐까.

붉은 동백처럼 사라저간 충혼불멸 전사들

조태일 기념관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우거진 숲속을 거슬러 올라가니 동리산문(桐裡山門)이란 편액을 단 일주문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정심교((淨心橋)를 지나 반야교(般若橋), 해탈교(解脫橋)를 건너 조금 더 올라가니 좌측 언덕에 경찰충혼탑이 나타난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북한군 제603기갑연대를 섬멸한 보복으로, 태안사에 설치한 우리 경찰 작전지휘본부를 북한군이 기습공격해 48명의 경찰관이 전사한 곳이라고 한다.

6.25전쟁 당시 48명의 경찰관의 전사를 기리는 경찰충혼탑
 6.25전쟁 당시 48명의 경찰관의 전사를 기리는 경찰충혼탑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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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은 우리 경찰관을 대웅전에 가둬둔 채 불을 질러 산채로 태워 죽였다고 한다. 결국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태안사의 모든 전각은 불타 사라지고 부도와 돌무더기 그리고 나무로 만든 것은 능파각과 일주문만이 옛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장렬히 전사한 경찰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참전동지들의 성금과 국가의 지원으로 1985년에 건립한 충혼탑에서는 매년 8월 위령제가 거행된다.

충혼문을 들어서면 48명의 이름을 새긴 충혼탑이 높이 솟아있고, 우측에는 '충혼불멸(忠魂不滅)이라 새긴 작은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탑 뒤에 새긴 진혼시가 가슴을 적신다.

전사들의 영혼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
 전사들의 영혼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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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코 지키신 땅 백일만에 풀린 사슬 / 뫼뿌리 자욱 자욱마다 / 꽃이 엉켜 피서라"(충혼탑에 새겨진 허 연의 진혼시 중에서)

진혼시처럼 충혼탑 주변에는 동백꽃 붉게 피어 목이 부러진 채 붉을 피를 토하며 여기저기 뚝뚝 떨어져 내린다. 못다 핀 채 사라저간 젊은 영혼들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시대암'에 걸렸던 인권변호사 조영래

충혼탑을 뒤로 하고 태안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는 검은 돌무더기가 오랜된 무덤처럼 지키고 있다. 돌무더기를 올라서니 둥근 연못 가운데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바람결에 연못이 고기비늘처럼 파르르 떨며 주름을 일으킨다. 나는 그 물결 위에서 또 한 사람의 영혼을 떠올린다. 시대암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인권변호사 조영래. 그는 이곳 태안사에서 요양을 하다가 폐암으로 귀천한 인권변호사가 바로 그다.

태안사 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돌무더기
 태안사 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돌무더기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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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비에 한 문장으로' 그렇게 줄담배를 피워가며 변론 원고를 썼던 그는 '진실을 감방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라는 명문을 탄생시키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씨를 변호해 승소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이듬해 6월 민주화의 도화선 역할을 한다.

그런 조영래 변호사의 방에는 늘 큰 재떨이가 있었다고 한다. 시대의 아픔을 줄담배로 달랬던 그는 1990년 가을 폐암 3기 선고를 받고 이곳 태안사로 내려와 투병생활을 한다. 유난히 절집 풍경을 좋아했던 그는 태안사에서 방을 하나 얻어 조용히 살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정리해 나간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1990년 12월 12일 43세에 짧은 생애를 마치고 귀천했다.

태안사 지천에 피어 있는 민들레
 태안사 지천에 피어 있는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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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자신이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 목숨을 스스로 끓은 사람들에 대해서 천도제를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아내 이옥경은 노동열사들에 대해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제를 지냈다. 그 후 <조영래 평전>을 쓴 안경환 교수(서울법대 학장 역임)는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내린 진단은 '시대암'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태안사에 다녀 온 후 나는 <KBS 인물현대사> 시리즈로 방영됐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 - 조영래'편을 인터넷을 뒤져 다시 봤다. "진실을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진실은 감뤄지지 않는다. 진실은 무덤 속에서조차도 감춰질 수 없다.

댓돌 밑에 피어난 민들레
 댓돌 밑에 피어난 민들레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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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기만 한 태안사는 이처럼 전란의 상흔과 우리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있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허물어졌던 태안사는 1985년 청하큰스님이 조실로 주석을 하면서부터 중창해 오늘의 모습을 간직하게 됐다.

30여 년 전 청화큰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오곤 했던 추억을 더듬으며 일주문을 들어서니 이끼 낀 부도비가 천년고찰 태안사의 역사를 일러주고 있다. 조태일 시인은 어느 방에서 태어났으며, 조영래는 어느 방에 머물렀을까? 태안사 경내에는 유난히 민들레꽃이 많이 피어 있다. 댓돌 밑에도 여리고 노란 민들레가 비시시 피어나고 있다. 시대암을 앓다가 떠난 이들의 영혼이 다시 부활를 한 꽃일까.


태그:#천년고찰 동리산 태안사, #조태일시문학관, #태안사 경찰충혼비, #인권변호사 조영래, #청화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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