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근대문학관에서는 유네스코 선정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을 기념해, 지난 3월 10일부터 '책과 출판을 만들다. 그 기획의 다양성'이라는 제목으로 문화기획 아카데미(총7강)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7일, 박진영 연세대 교수가 '초창기 출판인과 출판문화'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대중적인 책의 출판으로 독자를 확대하고 그 독자가 저자가 돼 다양한 책을 만들어 더 많은 독자를 생산하는 선순환구조를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 '책'은 100년의 역사

박진영 연세대 교수가 ‘초창기 출판인과 출판문화’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박진영 연세대 교수가 ‘초창기 출판인과 출판문화’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 김영숙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에서 '책'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물건이자 상품은 언제부터 상용됐을까? 박진영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고작 100년 밖에 안 됐다고 주장했다.

"인류에게 늘 책과 같은 종류의 물건은 있었다. 가까운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책은 아니다. 종이뭉치라 할 수 있으며, 좋게 얘기하면 기록이고 문서다."

그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도 책이 아니라고 했다. 종이 위에 문자로 기록했지만 읽으려고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보관하기 위해 한 부만 만들려 했는데, 전쟁 등 외부 환경으로 유실될 것을 대비해 세 부를 만들었다.

책이란 읽기 위해 만든 것인데, 10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 문맹률이 90%가 넘었다며, '책'이라는 상품이 만들어진 건 100년의 역사밖에 안 됐다고 했다. 예전의 문집, 경전, 실록 등과 구별되는 상품으로서 책의 발명은 100년 전이라는 것이다.

"책은 독자가 읽기 위해 사야하는 것이고, 종이 값이 싸 대중적 출판이 가능해야한다. 예전 양반들이 족보나 문집을 만들려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종이가 귀했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양반이 아닌 사람이 촛불이나 호롱불 아래 책을 읽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불과 100여 년 전에야 종이와 잉크 등, 인프라와 기술이 갖춰져 대중적 출판이 가능했다."

박 교수는 이어, 책은 상품이자 미디어고, 콘텐츠(내용)와 테크놀로지(기술)의 결합이라고 했다.

"책은 돈을 주고 사는 상품이다. 일부 학자는 고귀한 정신을 담은 책에 천박하게 '상품'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을 거부하지만, 가격표가 붙어 거래되는 상품이다. 또한 책은 미디어다. 매일 아침 내가 읽고 있는 신문을 전국에 있는 많은 국민이 함께 읽고 있다. 인터넷은 더 하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을 보고 있다. 대량 생산되고 유통되는 책은 확장된 미디어이다."

'저자→편집자→문선공→식자공→활판공→교열자→인쇄공→재단공→제본공→운송업자→독자'

박 교수는 책 한 권을 만드는 게 얼마나 복잡한 과정인지 설명하며 '공'이 장인 '공(工)'임을 강조했다. 예전에 책을 만드는 사람은 글을 아는 지식인 계층이었으며, 이렇게 다양한 과정인 테크놀로지가 결합돼야 한 권의 책이 나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100년 전에는 책을 만들 콘텐츠가 부족했고, 독자가 없었다. 투자해서 콘텐츠를 개발해 독자층을 늘렸다. 독자를 늘리기에 잡지만큼 좋은 게 없다. 책을 쓸 저자를 찾아 새로운 아이템 실험을 계속해야한다. 그래야 새로운 독자가 생긴다. 100년 전에는 기획자가 없었지만 지금 출판을 기획하는 사람은 저자를 개발해 새로운 상상력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야하고, 거기에 적정한 가격이 보장돼야 독자가 생긴다."

최남선의 '신문관'과 민준호의 '동양서원'

1910년대 출판사 풍경은 작은 가게 수준이었고, 서점의 기능도 겸했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어로 출판한 책은 730여 종이며, 그 중 소설이 190여 종이다. 1년에 7, 8권 정도 출간된 것이며, 소설책 외에는 법률이나 경제 서적 등, 학생이나 지식인이 볼 수 있는 책이다. 박 교수는 1910년대 대표적인 출판사인 신문관과 동양서원을 설명했다.

"최남선은 18세인 1908년에 신문관을 설립했다. 출판사를 만들자마자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소년'지를 펴냈다. 그는 편집감각이 있었고 독자가 원하는 걸 알았다. '소년'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는 소년들이 사서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박 교수는 출판기획은 기획력과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 과감한 투자로 독자를 확보해야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신문관을 만든 최남선은 진취적이고 실리에 능통해 직접 편집과 기획을 했다고 전했다.

신문관에서는 잡지와 단행본 외에 소설과 시집, 학술서적 외에 요리책 등의 실용서적도 출판해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했다. 이익을 내는 출판물이 있는 반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책도 있었다. 이익이 생기면 청년학우회 등, 사회실천운동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소년'지가 폐간되자, 최남선은 1914년 종합 교양지 '청춘'은 물론 어린이 전문지인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을 계속 발행했다.

"보통 어린이 잡지라 하면 소파 방정환이 1923년 발행한 '어린이'를 떠올리는데, 그보다 10년 먼저 최남선이 출판했다. 1899년 태어난 방정환은 '소년'지를 보고 자랐으며 '청춘'지에 투고한 기록이 있다. 월간지를 보고 자란 방정환이 그 후 어린이 잡지를 만든 것이다. 최남선은 대단한 문화 투자를 한 거다. 단 한 명의 독자지만 엄청난 독자를 확보한 거다. 잡지는 그런 일을 하는 거다."

민준호가 1910년 창립한 동양서원은 자체 인쇄소와 제본소를 갖추고 신소설을 특화해 전문 출판사로 급성장했다.

"그는 불안정한 잡지 출판은 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경영을 했지만 신진 작가 발굴과 독자층 확대라는 순환구조의 회로가 막혀 재생산이 안 됐고, 콘텐츠 고갈로 1914년 3층짜리 출판사 건물을 팔았다."

그래도 동양서원은 1910년대 최초로 문학총서 시리즈를 출판했다. 총4집 40종을 기획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33권을 냈다. 신소설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지만 단기간이었고 잡지를 생산하지 않아 독자와 저자를 발굴하지 못해 미래가 불투명했다.

문화기획 상품, 이광수의 '무정'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무정'은 1918년 최남선과 민준호에 의해 단행본으로 만들어졌다. 두 출판사가 공동 제작한 배경에는 1000부를 찍어 팔려면 고급스런 기술과 디자인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자본 투자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무정'은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여러 출판사에서 9판까지 찍었다. 630쪽 짜리 소설책을 1918년에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박 교수는 '책은 콘텐츠이기도 하지만 기술력이고 상품'이라 강조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최남선과 신문관의 공적(功績)은 전문적인 기획자이자 편집자 의식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좋은 책을 만들어서 팔겠다는 의지로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했다"고 한 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독자를 저자로 만드는 순환구조다. 어린이 잡지를 읽은 아이가 어른이 돼 저자가 되거나 문화와 기술을 결합한 또 다른 미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출판기획이고, 그 역할이 출판인들의 몫이다"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박진영, #연세대 교수, #한국근대문학관, #세계책의수도 인천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