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봄이 왔다. 세월을 뚫고서 노란 봄이. 세상에 변함없는 것이 있다면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뿐이라던가. 인간이 제 아무리 기를 써 봐야 시절을 보듬어 잡는다는 것은 한낱 '그림자 잡기'일 터. 아쉬움이 커도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리하여 봄이 성큼 왔다. ​

산골의 봄은 할머니들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동네 할머니들이 밭에 나와 등으로 따순 볕을 받으며 지난 가을의 흔적들을 모아 태우셨다. 그리고 겨우내 굳은 흙을 파고, 부수고, 흩뿌리셨다. 이쪽에서 불을 놓으면 저 쪽에서는 괭이로 밭을 팠고, 또 저 쪽에서는 퇴비를 뿌렸다. 어떤 날은 사방에서 거름냄새가 마치 봄볕에 승천하는 아지랑이처럼 날리기도 했다.

이어 마당귀 동백의 붉은 염통이 떨리는 듯 커튼을 젖혔다. 겨우내 고통으로 빚은 사랑이 핏빛으로 물들어있고 작은 꽃 이파리는 순결로 넘쳤다. 산수유가 몽글게 머물더니 제각기 작은 해가 되어 노란 꽃물을 사방으로 뿜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이겨낸 매실나무는 삐죽이던 멍울을 드디어 터뜨려 흰 꽃을 천지간에 드러냈다. 며칠 꿈결 같은 구름이 산자락을 덥더니 비가 내렸다. 메말라 보풀처럼 엎드려있던 마당의 잔디에 푸른 싹이 올랐다. 돌 틈의 철쭉에도 꿈틀꿈틀 꽃을 향한 희망이 연녹색의 알갱이로 맺혀있고,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푸석이던 마당도 기운을 차리고 제법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사위가 봄을 향한 열기로 가득하다. 무수히 오고 갔던 봄. 그러나 지금까지 내 앞에 병풍처럼 펼쳐지는 이런 봄의 설렘을 알지 못했다. 자연의 눈부신 환골탈태- 이 같은 자연의 변모를 마치 술 한 잔 마시고 입을 쓱 닦아내듯 넘겨버렸다. 돌이켜보니 그런 과거가 진심으로 아쉽다. 봄은 늘 오되 매번 다르다는 누군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삶의 변곡점을 지난 이제야 눈을 뜨다니 이 어리석음을 어찌 하리. ​

봄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오래 묵혀두었던 꿈, 공부다. 내 스스로 하고 싶었던 일이다. 지금까지의 삶과 완벽하게 결별하고 장삼이사의 학생이 되어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 마치 이 봄처럼. 모든 것이 낯설다. 알지 못하는 환경이 나를 두렵게 한다. 공부를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져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찾는데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도와줄 사람도 없어 답답하다.

사람들은 또 어떤가. 나이와 성별의 차이만큼 직업과 경력의 차가 많다. 처음 만났던 시간들의 어색함이 떠오른다.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못하고 불안한 어린애 마냥 눈을 굴렸던 날, 그럼에도 한 번 부딪혀보기로 작정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돌아서면 강물뿐인 배수진을 치고 내 몸의 관행을 깨 부쉈다. "너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 아이칸 엔터프라이시스 창업주이자 기업 사냥꾼으로 알려진 칼 아이칸은 '자신만 생각하라'고 말했다. 정말 자신만 생각하며 세상의 트렌드를 거들떠보지 않고 원칙을 고수한다면 마침내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

이제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시간과 책, 자료를 찾는 방법, 효과적인 공부하기의 방안, 그리고 사람 사는 이야기. 화요일이면 배우는 목공예는 아마 묵은 내 몸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복원시켜 줄 것이다. 톱질과 대패질도 날을 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듯 세상의 이치도 계단을 밟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아직 심정적으로 익숙해진 것은 아니지만 아침이면 떠오르는 해를 보듯 규칙적으로 내 몸을 궁글릴 것이다. 그러면 내게도 봄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봄이 왔다고 한다. 산 갈기마다 아직 절망이 엎드려 있는데.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희망은 아직 모호한데. 숲 그늘은 안으로만 잠겨 있고, 경계를 가르는 시냇물 또한 언 몸으로 새벽을 뒤척이고 있는데. 긴 그리움에 싸여 처마 끝 풍경(風磬) 여직 떨고 있는데. 봄이 왔다고 수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밤마다 도회지의 어둠을 서성이고, 당신의 등불은 켜질 줄 모르건만.

새봄이 눈물처럼 왔다고 한다. 지난 세월의 월야독작(月夜獨酌), 달빛 체념으로 베어 낸 그 자리에서 다시 노란 봄이 꾸역꾸역. 봄은 늘 오는 것이고, 오는 봄을 잡는 것은 우리네 마음이니 이 봄에 나는 다시 내 봄을 붙잡고 일어서려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광주일보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산골일기, #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