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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기 쓰기 싫지?"
"네, 일기 정말 쓰기 싫어요."
"그럼 일기장에 그렇게 써. '나는 정말 일기 쓰기가 싫다' 이렇게 말이야."
"에이, 그건 안돼요."
"왜? 일기는 정직하게 생각한 것을 쓰는 거야. 일기 쓰기 싫으면 그렇게 쓰면 되지."

지난 28일, 방학 숙제인 일기 쓰기를 두고 첫째 아들과 나눈 대화다. 잘 놀다가도 일기만 쓰자고 하면 얼굴을 긁고 팔다리를 만져대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물도 마시고 싶고, 귤도 하나 까먹고 쓰자는 아들.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일기 제목을 적는다.

제목 : 일기
나는 정말 일기 쓰기가 싫다. 어떨 때는 일기장을 찢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정말 그렇게 쓰기 시작한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리도 이해한다. 방학 숙제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일기였지 않았나?

일기란 무엇인가? 왜 써야 하나?

초등 1학년인 첫째는 그림그리기와 태권도를 무척 좋아한다. 집에 오면 엄마 아빠 앞에서 태권도 품새 보여준다고 난리다. 이제 자세가 잡히기 시작한다.
 초등 1학년인 첫째는 그림그리기와 태권도를 무척 좋아한다. 집에 오면 엄마 아빠 앞에서 태권도 품새 보여준다고 난리다. 이제 자세가 잡히기 시작한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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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날 맞춰 쓴다는 건 보통 아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매 학기 방학이 되면 개학 며칠을 남겨두고 기억력에 상상력을 보태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열심히 쓴다고 해서 담임 선생님이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대개 '참 잘 했어요' 도장만 꾸욱 찍혀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그 날의 느낀 것과 생각한 점 혹은 자기 반성일 수도 있고, 아쉬웠던 점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에세이나 소설의 형식을 따르기도 하고, 시나리오처럼 대화체로 쓰기도 한다. 그렇게 꾸준히 써서 습관이 되면 일기장이 모여 훗날 자신의 기록물이 된다. 글쓰기 능력이 향상되며 문장 이해도가 빨라지고 다양한 지식 축적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커다란 자취를 남긴 사람들에겐 어김없이 품 속에 간직했던 일기나 메모장이 등장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이 기록으로 남겨질 정도면, 그 글을 쓴 사람에겐 예상을 초월한 많은 양의 정보와 그 정보를 습득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일기를 쓰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발견과 아울러 여러 방면에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말처럼 일주일에 며칠씩 혹은 인간 관계의 상황과 충돌에서 오는 감성을 메모하는 습관은 절대 쉽지 않다.

필요성과 의무감보다는

필자도 일기를 쓰지 않는다. 대신에 블로그를 운영하며 그 날의 기분과 날씨 등을 주제로 기록하는 습관이 붙었다. 때로는 고사성어를 메모하기도 하고, 영화 리뷰나 책을 읽고 느낀 점, 나에게 와 닿는 문장을 등을 기록한다. 고등학교 시절 잠시 노트 두 권을 메모로 채운 후 20년이 넘어서야 다시 '나만의 메모'를 시작한 것이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지만 상당량의 자료가 축적돼 있고 가끔 지난날의 메모를 읽어볼 때면 그 글을 쓸 때 내 삶의 모든 것이 새롭게 와 닿는다. 이것이 기록이고 나 개인의 역사가 되어간다.

시사성이 있는 글이나 책, 혹은 영화, 음악회, 미술 전시회, 여행기를 모아 놓은 카테고리는 정말 다양한 분야의 글이 모여 있다. 2년이 채 안 된 기간에 쓴 글이 이 정도면 30년이나 40년을 일기와 메모하는 습관으로 기록으로 남겼을 때 그 양은 정말 방대하고 지금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회의 변화상과 내 생각의 줄거리, 그리고 각종 언론과 문화 매체의 역사가 담길 것이다.

일기와 메모 습관은 나의 기록물

2000년대 초반부터 내가 본 영화 포스터들을 모두 스크랩해 두었다. 200여편이 넘는다. 당시 모아놓은 포스터를 볼 때마다 난 추억에 젖는다. 포스터뿐만 아니라 영화 리뷰도 함께 스크랩했다. 나에겐 엄청난 재산이다.
▲ 스크랩 해 놓은 영화 포스터 2000년대 초반부터 내가 본 영화 포스터들을 모두 스크랩해 두었다. 200여편이 넘는다. 당시 모아놓은 포스터를 볼 때마다 난 추억에 젖는다. 포스터뿐만 아니라 영화 리뷰도 함께 스크랩했다. 나에겐 엄청난 재산이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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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의 재산이 하나 있다면 30대 초반부터 봤던 모든 영화의 포스터들을 모은 책이다. 다섯 권을 다 채워가니 약 200여 편의 영화 포스터가 모여 있는 셈이다. 전문 수집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양이지만, 나에겐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도 영화를 보면 반드시 포스터를 구해서 스크랩을 해둔다. 이 자료는 마치 도서관과 같아서 내 기억의 한구석에서 희미해지는 것이 있다면 꺼내보고, 회상하고, 다시 생각을 구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하루를 더듬으며 정지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일기라는 것, 참 습관 붙이기 힘들다. 자동적으로 연필에 손이 간다면 좋겠지만, 필요성에 의해 혹은 의무감에 노트를 펴는 것은 중노동이다. 노동이란 재화를 얻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바탕으로 한다. 쉽게 말하자면 빵을 얻기 위해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닌, 빵을 얻기 위한 화폐나 등가교환을 위한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해서다. 이런 노동의 바탕 위에서 창의적이고 순수한 의도의 결과물을 얻기란 정말 힘들다.

메모와 수집 습관을 키워주는 것도

일기도 마찬가지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사고의 깊이와 문장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것도. 그래서 학교에서도 일기 쓰기를 강요하듯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주 적은 수의 학생이라도 일기 쓰기에 습관이 붙는다면 정말 좋은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생에게는 짐이 되고 방학숙제로 주어지는 일기는 소설을 능가한다. 아직은 그럴 만한 나이가 되지 않는 것일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로봇 장난감, 그림딱지 등... 보통 일기나 그림일기 형식을 좋아하고 자주 쓰는 습관을 들인 아이들이 아니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수집하거나 스크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은 만화 캐릭터 카드나 그림 딱지 등을 모으길 좋아한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계획 없이 수집하는 것보다 모델별, 연도별, 스타일 별로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나중엔 좀 더 확장시켜 좋아하는 분야의 기사나 방문했던 장소의 사진과 입장권 등을 정리하는 것도 좋은 시작일 것이다. 일기는 그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글로 저장하는 것도 좋지만 당시의 기억과 관련된 실물을 수집하는 것이 어쩌면 아이에게 더 많은 추억거리를 안겨 줄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아이와 부모 간 정서적 유대감이 필요하며, 항상 아이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이의 방학숙제. 일기는 다 썼다. 독후감도 두 편 작성했다. EBS 청취 숙제도 했다. 현장 체험 학습은 이번 주 무주리조트 눈썰매장을 가는 것을 바탕으로 작성하면 된다. 방학 숙제가 여러 개의 카테고리로 돼 있어서 그 중 한 카테고리만 골라서 하면 된다. 이번 방학 숙제도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이면 개학이다.

지난 28일 아이가 마지막 일기를 쓰면서 고민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쓰기 싫은 걸 어떡하라고. 일기는 솔직한 심정을 적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쓰라고 했다. '일기 쓰기 싫다. 정말 싫다'. 나중에 문득, 쓰고 싶어질 때 쓰거라, 아들아!


태그:#일기쓰기, #수집, #스크랩,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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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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