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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매달 25일이 되면 동네 서점에 전화를 걸었다. 영화 잡지 <스크린>과 <키노>가 나왔냐며 재촉했고, 이번 달 부록은 브로마이드인지, 엽서인지 묻는다. 비디오 가게에는 신작 영화를 먼저 빌리기 위한 눈치 작전이 있었고,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보기 위해서 며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유선전화에서 삐삐로,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통신 기기가 빠르게 변화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영화 예매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일상 업무를 휴대전화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은 영화와 음악 등 모든 콘텐츠를 갖고 있는 마술 상자였다. 이전의 TV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점점 영화가 갖는 상징성과 영화를 대하는 대중들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졌다.

학창 시절, 비디오 대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날은 기념일이거나, 이성과의 특별한 데이트 날이었다. 이전의 영화가 문화의 한 장르였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일상이 되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극장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PC와 TV를 통해서도 신작 영화를 감상할 수 있으며, 검색 한 번이면 영화에 대한 자세한 정보까지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스크린 쿼터 사수'에서 '스크린 독과점'까지

2006년 12월, 스크린쿼터 축소 법안 국무회의 의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연 영화인들.
 2006년 12월, 스크린쿼터 축소 법안 국무회의 의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연 영화인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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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외화가 스크린을 모두 장악했을 때,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쳤다. 스크린쿼터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작품 중, 한국영화의 일정 상영일수를 보장하는 것으로 정치, 문화적인 이슈가 되었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를 선두로 하는 외화의 스크린 독과점이 해결 과제였다면, 요즘은 대형 영화관의 스크린 독과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핵심은 같다. 거대한 자본력과 물량 공세로 대중의 반응이 좋은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상영하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흥행보증이 어려운 영화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한국영화를 죽인다는 외화들의 무차별적인 수입과 지금의 대형 영화관의 스크린 독과점은 결코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심각하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는 대표적인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다. 90%가 넘는 스크린 점유율을 보이는 거대한 공룡으로 매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냐고 물을 수 있나.

영화를 제작하는 중요한 요소가 이전에 감독, 배우, 시나리오였다면 최근에는 투자, 배급, 상영관으로 바뀌고 있는 모양새다. 감독, 배우, 시나리오도 결국엔 투자한 돈으로 사는 것이고, 배급과 상영관의 돈줄 또한 기업들이 쥐고 있는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한 영화를 자회사가 배급하고, CGV와 롯데시네마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관에서 판매하는 팝콘과 음료까지. 기업은 이윤 극대화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관객들은 선택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투자와 배급을 받지 못한 영화들은 상영관 확보 및 작품 홍보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스크린 독과점보다 무서운 극장의 눈치 보기

스크린수와 상영시간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스크린수와 상영시간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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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영화, 독립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영화의 제작 환경과 투자 규모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분류된다. 타이틀은 다양하지만 결국 영화관에서 쉽게 찾아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대기업이 투자와 배급을 맡은 작품이다.

작년 한 해, 작은 영화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우아한 거짓말><한공주><도희야>는 CJ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았다. 그만큼 홍보도 잘 되었고, 상영관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다양성 영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규모 자본과 화려한 출연진이 등장했던 <그랜드부다 페스트 호텔> 뒤에도 20세기폭스코리아가 버티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 고발적 영화도 유명 배우와 감독이 제작을 맡았는지 여부에 따라서 상영관이 결정된다.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 임순례 감독, 박해일 주연의 <제보자>는 관심을 받지만, 삼성 노동자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 기독교의 허상을 밝힌 <쿼바디스>처럼 대부분의 사회 고발적 영화는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언론과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개봉작들과 비교해서 높은 좌석점유율과 예매율을 보였지만, 스크린수와 상영 횟수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결국 영화를 극장에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한 채, 흥행 실패를 이유로 리틀빅픽처스의 엄용훈 대표가 사임했다.

<천안함 프로젝트><두개의 문> 등 민감한 주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세월호 수색 구조에는 실제로 투입하지도 못했지만 보수 언론들의 뭇매를 맞았던 '다이빙 벨'과 세월호 참사 현장을 담은 영화 <다이빙 벨>도 그렇다. 부산시장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은 <다이빙벨>의 상영 취소를 요구했다.

시장 경제 원칙이라는 명목으로, 국내 영화의 생존을 지켜주었던 스크린 쿼터를 폐지하자는 정부. 자신들의 영화로 가득 채운 상영관을 통해 어떤 작품이든 흥행작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극장들의 눈치 보기다.

영화를 만들어도 상영할 곳이 없고, 관객들의 작품 선택 폭은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스크린 쿼터 사수와 작은 영화의 상영관 확보는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건 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이지, 눈치를 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hstyle84)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예능작가의 세상읽기, #스크린 독과점,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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