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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춘호 전 국회의원.
 예춘호 전 국회의원.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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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정보기관의 정치공작, 특히 도청(불법 감청)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2005년 8월 5일에는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김대중 정부까지 이어져온 정보기관의 도청을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기관장을 임명하는 대통령의 관여 여부는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다.

지난 6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예춘호 전 공화당 사무총장은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증언을 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공개회의에서 도청으로 얻은 정보로 자신을 다그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은 1969년 4월 8일 오전 10시 52분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작됐다.

공화당 총재였던 박 대통령이 이미 김진만 원내총무에게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부결시키라고 지시한 상황에서 가 89, 부 57로 해임안이 가결된 것이다. 회의장의 공화당 의원 100명 중 40명 이상이 총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결과였다.

대통령의 3선개헌을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충정을 피력하는 자리였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이틀 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공화당 긴급확대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박 대통령의 분노는 약 20분간의 훈시 내내 참석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훈시를 마친 박 대통령이 예춘호 의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그는 약 19개월간 당 사무총장으로서 '총재 박정희'를 보필했다.

박 대통령 : "예 총장, 당의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던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동조자를 규합하고 은어를 써가면서 야당 원내총무(김영삼 의원)와 결탁해 반당 행위를 한 데 대해서 할 말 있으면 해보시오."
예 의원 : "가표를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국회 상공위원장으로서 상공위원들에게 권유한 일이 없고, 은어를 쓴 일도 없습니다."

예씨는 박 대통령이 '은어'를 언급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우리 의원들끼리는 전화 통화하면서 별명 같은 것을 즐겨 썼는데 그게 도청(불법 감청)하는 사람의 귀에는 마치 은어처럼 들렸을 겁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그런 말을 직접 했다는 것은 대통령도 정보부의 도청으로 '4·8 항명 파동'의 주동자들의 동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뜻이죠.

3선개헌 전에 청구동 김종필씨 집에서 전화 쓸 일이 있었는데, 수화기를 드니 공화당 의원들이 비공개 회의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도청팀 사이에 혼선이 생긴 거죠. 당시 도청 장비의 수준이 그랬어요."

- 그렇다면 도청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누구였겠어요? (김형욱의) 중앙정보부가 그랬죠. 그때는 유선전화밖에 없었는데, 통화 중에 끓는 소리 등의 잡음이 심하게 들리면 '이 친구들이 다 엿듣고 있구나' 감수하고 대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비밀이 없는 거죠."

 1969년 4월15일자 동아일보 1면. 이날 오후 청와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예춘호 등 항명 주동자들의 징계를 지시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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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에는 "당 총재직을 그만두더라도 반당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분노에 찬 발언들이 대서특필됐을 뿐 문제의 '은어' 발언은 보도되지 않았다.

4월 11일 자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좌담에는 "대통령이 예춘호 의원을 지명해서 '남아답게 솔직히 말해보라'며 즉석고백을 받은 것으로 보아 반란세력을 이미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런 정보를 입수한 경로에는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정부는 "정보부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일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1965년 7월 31일 국회 본회의), "중앙정보부가 전화를 도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도청이 발견되면 즉각 시정할 것"(1966년 11월 30일 국회 예결위, 이상 정일권 국무총리 답변)이라는 뻔한 거짓말로 대응했다.

박 대통령의 1969년 발언은 정보기관의 도청이 상시적으로 이뤄졌고, 대통령이 그런 정보를 정치에 이용하는 데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예씨는 "대통령이 일찍부터 3선 개헌을 추진했다는 것도, 정보기관 도청이 비일비재하다는 것도 기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라면서 "하지만 이런 사실이 신문 지면에 실리지 못하는 시절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어쨌든 공화당은 박 대통령의 지시 1주일 뒤 예춘호 등 5명의 의원을 출당시켰다. 대통령의 권위에 맞선 의원들의 운명을 지켜본 같은 당 의원들은 이후 3선개헌의 '돌격대'로 나서게 된다.


태그:#예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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