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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몸담고 있는 단체인 <우리술과천연식초연구회 (약칭: 향음)> 회원들이 빚어 놓은 술 단지들을 보면 참 흥미로운 일이 많다. 같은 선생, 같은 재료, 같은 물로 빚은 술인데도 가양주인家釀酒人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과 향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술 맛은 물맛도, 누룩 맛도 아닌 김장 김치와 같은 손맛이 중요한가 보다. 정말 재미있던 경우는 10년이 넘게 살아 온 부부가 같은 날 나란히 담은 막걸리가 각각 다른 발효 양상과 맛을 보였을 때이다.

부인이 담은 술은 초기 너무 빨리 끓어올라 잠깐이지만 품온이 30℃ 넘게 치달아 애를 태웠고, 남편이 담은 술은 초기에 산막産幕이 너무 두껍게 생겨 애를 태우다 서서히 완만하게 맛과 향이 잡혀갔다. 결과적으로 부인이 빚은 술은 약간의 산미와 함께 청량감이 참 좋았고, 남편이 빚은 술은 뒷맛이 약간 쓴맛이 돌면서도 입안에 콱 차는 묵직한 맛이 좋았다. 이 부부는 술병을 각각 다르게 표시해 두고 어느 술이 더 맛있는지 친지들이 올 때마다 '즐거운 배틀'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풍류와 학문이 어우러진 인문향人文香 넘치는 술'이라는 뜻으로 '금서주琴書酒'라는 이름도 붙였다.

바로 이거다! <향음>에서 하고자 하는 일, 아마도 많은 세월을 공들여 우리 술 복원에 매달린 전통주 명인들이 또한 꿈꾸었던 일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지금은 물만 국산인 막걸리가, 사케라고 해야 할 술을 전통 청주라고 둔갑시켜 유통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제대로 바가지를 '술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1세기 가량을 이렇게 지내다 보니 1천원 안팎의 소주, 막걸리가 우리 전통 술인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새해부터는 내가 빚은 맛있는 술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청하여 오늘처럼 설핏설핏 산 위에 앉은 하얀 눈을 보며 술을 마신다면 이 얼마나 장쾌한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대로 된 술을 만나볼 수 없겠느냐?"는 어느 외국계 기업 CEO는 본인이 직접 전통 청주를 빚어 '그대를 생각하며 빚은 술'이라는 뜻의 '여상로如想露'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비즈니스 석상에서 자신의 빚은 '여상로'를 소개하면 "화제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풍부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바로 이거다! 과거 일제침탈 직전 37만여 장이 넘던 가양주 제조 면허자 수가 불과 10년이 채 안되어 단 1명으로 급감했던 뼈아픈 과거. 이것을 되돌리는 일. 빼앗긴 청주와 빼앗긴 문화를 되찾는 일. 그래서 마을마다 집집마다 술 익는 향기가 넘쳐나고, 세대 간 소통과 향음주례鄕飮酒禮 문화가 살아난다면,  지금의 어렵고 힘든 경제 파고를 가쁜 하게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경제는 심리'라고도 하지 않는가. 이 CEO처럼 외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인들이 비즈니스 석상에서 와인이나 사케 대신 제대로 된 우리 청주를 그것도 호스트 가문에서 직접 빚은 술을 건배주로 한다면 이 얼마나 장쾌한가!

경기도 옥천에 가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미담양조美淡釀造'라는 전통 술 도가를 고집스럽게 운영하고 있는 분이 있다. 고집스럽다고 하는 것은 편하게 적당히 할 꾀를 내지 않고 자식 키우듯이 온갖 정성을 쏟아 부으며 술을 빚기 때문이다. 이 분의 술은 '여걸'이라는 도가 대표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곱기까지 한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향음> 연구진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내로라' 하는 셰프들이 여럿 있다. 이들로부터 "서양요리와도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듣는 술이다. 무엇보다 독한 소주에도 전혀 밀리지 않으니, 최고급 식당 셰프들로부터 "모든 한식 요리에 다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중국인들은 황주黃酒를 와인, 맥주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술이라며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 술이 서양 술을 제치고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했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실제는 그리 호평 받고 있지 못하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에는 '미담양조'처럼 조그마한 마을에서 빚은 술이 깜짝 놀랄 만한 풍미와 맛을 지닌 것이 많다. 그러나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은 술맛이 모자라서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향음>에서는 지난 16일 한 해를 마감하며, 사단법인 주한글로벌기업대표자협회가 후원하고 한국작가회의 부의장인 김사인 시인이 우리 술과 詩를 접목시킨 해설에 나서는 등 <2014 향음예찬>이라는 실험적인 행사를 개최했다.  '고운孤雲', '사리娑離', '가라뫼', '초우招友', '오래해' 등 향음회원 가양주 출품행사이면서, 무엇보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전통주 명인들이 내놓은 술들을 소개하는 생산자와 소비자, 기관참여자 간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와인 벨트가 있듯이 우리가 꿈만 꾼다면 청주 벨트가, 막걸리 벨트가 형성될 수 있다. 우리 전통 술은 쌀, 누룩, 물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충분히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술이 서양 와인의 아성을 뛰어 넘는 날. 그래서 "와인을 모르면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고 하듯이, 막걸리와 청주를 모르면 외교를 할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이 또한 장쾌하지 아니한가! 밝아오는 새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 연말연시 건배주로 와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기업 주류 마케팅에 밀려 제대로 된 우리 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농산물로 빚은 우리 술들이 빛을 보려면 생산자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날카로운 안목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 전통 술은 아무런 첨가물 없이 '곡식, 누룩, 물' 이 세가지로 빚어낸 것입니다. 유통 상, 주조 상 여러가지 이유로 첨가물이 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이를 바로 알리지 않고 전통 술이라고 우기는 것은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성분과 주조방식을 올바로 표기하지 않은 술은 시장에서 퇴출시켜야 합니다.



태그:#향음, #우리술, #GCCA, #캘리그라피 이상현, #오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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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술과 천연식초 등 발효식품을 교육연구, 제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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