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을 두고 전화위복이라 하는가 보다. 성남 벤치에서는 마지막 승부차기를 위해 후보 문지기 전상욱을 준비시켰다. 대기심도 그를 들여보내기 위해 선수 교체용 번호판을 치켜들 준비까지 했다. 하지만 그라운드 안에서는 곧 주심의 종료 휘슬 소리가 들렸다. 비장의 카드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박준혁이 그림 같은 슈퍼 세이브 두 개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역시 축구는 드라마다.

김학범 감독이 이끌고 있는 성남 FC가 23일 낮 2시 15분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제19회 2014 FA(축구협회)컵 결승전 FC 서울과의 방문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이어진 120분의 싸움을 득점 없이 끝내고 승부차기에서 4-2로 이겨 대망의 우승 트로피를 들여올렸다.

통한의 에스쿠데로

경기 시작 후 12분 만에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안방 팀 에스쿠데로는 그로부터 10분 뒤에 결정적인 선취골 기회를 잡았다. 방문 팀 성남 FC 문지기 박준혁이 공을 잡았다가 놓치는 것을 가로채 빈 골문을 향해 혼자 공을 몰고 들어간 것이다. 누가 봐도 이것은 골이었다.

그런데 에스쿠데로는 순간의 여유를 즐기는 듯 슛 타이밍을 놓쳤다. 여기서 따라붙은 문지기 박준혁이 자신의 치명적 실수를 만회하려는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고 에스쿠데로의 슛이 걸렸다. 곧바로 뜬 공을 잡아낸 에스쿠데로는 2차 슛 기회를 잡았다. 바로 앞에 수비수 곽해성이 있었지만 아래로 살짝 방향을 틀어 굴려넣으면 되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발리슛이 터져나왔지만 곽해성은 머리를 들이밀고 기막히게 막아냈다. 골문 뒤에 있던 성남 FC 서포터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에스쿠데로와 FC 서울 벤치는 울상을 짓고 말았다.

30경기를 넘게 치르는 리그 일정에서는 에스쿠데로의 이러한 실수가 용납될 수 있지만 이 경기는 다음 기회가 없는 결승전 바로 그것이었다. 74분에 윤주태가 들어오면서 벤치로 물러난 에스쿠데로의 굳은 표정에 모든 것이 그려져 있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FC 서울은 81분에 골대 불운까지 겪었다. 미드필드 왼쪽 옆줄 가까이에서 얻은 프리킥 세트 피스 기회에서 이상협이 감아올린 공을 수비수 김진규가 머리로 슬쩍 방향을 바꿔 골을 노렸다. 하지만 오른쪽 기둥은 야속하게 공을 밀어내버렸다.

성남 문지기 박준혁의 반전 드라마

이대로 득점 없이 연장전까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양쪽 벤치에서는 후보 문지기를 준비시켰다. 최용수 감독은 연장전 종료 1분 정도를 남겨놓고 김용대 대신 유상훈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성남의 김학범 감독도 전상욱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공 소유권이 성남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공은 계속 FC 서울 선수들의 발끝에서 돌고 있었다. 이 웃지 못할 상황을 간파한 최용수 감독은 공을 더 뒤로 돌리라는 손짓까지 했다. 전상욱의 노련한 몸놀림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야속하게도 김종혁 주심은 120분의 공식 시간을 에누리없이 끝냈다. 장갑을 끼고 교체하기 위해 대기심 옆에 서 있던 전상욱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전반전에 결정적인 실수까지 저지른 박준혁이 승부차기의 긴장감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박준혁의 반전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FC 서울 서포터즈 앞 골문에서 진행된 승부차기에서 성남 FC 문지기 박준혁이 펄펄 날았다. 첫번째 키커로 나온 오스마르의 왼발 슛 방향을 읽고 왼쪽으로 몸을 날려 잡아낸 것이다. 11미터의 처절한 승부에서 쳐낸 것도 아니라 잡아낼 정도라면 얼마나 순발력이 뛰어난가를 입증한 셈이었다.

박준혁의 활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번째 키커로 나온 왼발 특급 몰리나의 왼발 슛 방향도 정확하게 읽고 오른쪽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오른손은 황금 장갑 바로 그것이었다.

3-2로 앞선 상태에서 마지막에 공을 내려놓은 성남 골잡이 김동섭은 침착하게 오른발 킥을 오른쪽 구석에 정확하게 차 넣으며 두 팔을 벌렸다. K리그 클래식에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강등 위기에 몰려 있던 성남 FC가 기적의 드라마를 쓰면서 대망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1년 성남 일화 시절의 감격을 3년 만에 다시 누린 것이지만 그 감회는 남달랐다. 시민구단 성남 FC로 전환한 첫해에 이룬 위업이기에 기쁨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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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19회 2014 FA컵 결승전 결과(11월 23일 낮 2시 15분, 서울월드컵경기장)

★ FC 서울 0-0 성남 FC
- 연장전 후 승부차기 4-2로 성남 FC 우승
- 승부차기 내용(왼쪽이 FC 서울)
오스마르 왼발 슛 박준혁 선방 - 정선호 왼발 슛 성공
김진규 오른발 슛 성공 - 제파로프 왼발 슛 성공
몰리나 왼발 슛 박준혁 선방 - 임채민 오른발 슛 성공
강승조 오른발 슛 성공 - 김동섭 오른발 슛 성공

◎ FC 서울 선수들
FW : 윤일록(95분↔몰리나), 에스쿠데로(74분↔윤주태)
MF : 고광민, 이상협(107분↔강승조), 오스마르, 고요한, 차두리
DF : 김주영, 김진규, 이웅희
GK : 김용대(119분↔유상훈)

◎ 성남 FC 선수들
FW : 김동섭
AMF : 김동희(87분↔황의조), 제파로프, 김태환
DMF : 이요한(76분↔이종원), 정선호
DF : 곽해성, 윤영선, 임채민, 박진포
GK : 박준혁

◇ FA컵 역대 우승 팀
2013년 포항 스틸러스
2012년 포항 스틸러스
2011년 성남 일화
2010년 수원 블루윙즈
2009년 수원 블루윙즈
2008년 포항 스틸러스
2007년 전남 드래곤즈
2006년 전남 드래곤즈
2005년 전북 현대
2004년 부산 아이파크
2003년 전북 현대
2002년 수원 블루윙즈
2001년 대전 시티즌
2000년 전북 현대
1999년 천안 일화
1998년 안양 LG
1997년 전남 드래곤즈
1996년 포항 스틸러스
축구 FA컵 성남 FC FC 서울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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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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