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무명배우 성근 역의 배우 설경구가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무명배우 성근 역의 배우 설경구가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오마이스타 ■취재/이선필 기자·사진/이정민 기자| 촬영 당시 찌는 듯한 더위도, 5시간에 걸쳐 견뎌야했던 특수 분장도 설경구에겐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아버지'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한 노인을 연기해야 했던 게 오히려 큰 숙제였다.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설경구는 무명 연극배우로 변변찮게 지내다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비밀리에 김일성 연기를 준비해야 했던 김성근 역을 맡았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대통령의 리허설을 도와야했던 캐릭터이다. 밖에선 비루해 보였을지언정 아들 태식(박해일 분)에겐 따뜻한 아빠였던 성근은 점차 김일성을 내면화하며 정신을 놓기 시작했다. 1972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94년. 성근과 태식의 거리는 딱 그만큼 멀어져 있었다.   

첫 대사부터 울컥...감독과 다시는 안 볼 정도로 싸우기도

"김일성 역할을 제안받았다면 안 했을 겁니다. 김일성의 대역을 연기하는 보통 사람이었기에 한 거죠. 김일성이 어디 매력이 있나요? 제겐 하찮은 김성근이 더 끌렸습니다. 이 영화는 곧 그 하찮음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입니다. '내 아버지는 슬픈 악역이었다'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내레이션부터 짠했어요.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되게 무겁게 보였어요. 예민한 문제도 있고, 공격적인 대사라고 생각했죠. 출연을 고민하고 답을 안주니까 이해준 감독님이 다시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가볍게 읽혀요. 어찌 보면 코미디 같은 인생이더라고요. 1972년, 1994년 둘 다 김일성과 관련한 일이 있었고, 실제로 김일성 대역도 있었고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도 정상 회담을 위한 대역이 있었다는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우린 알잖아요. 이 설정에 아들 이야기를 넣은 거였어요."

그렇게 해서 출연을 결정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지난 언론 시사회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이해준 감독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현장에서 퍼붓기도 했다"던 설경구는 왜 그렇게 예민했는지 털어놨다.

"영화 마지막 부분 촬영 때였어요. 정상회담 장면에서 김일성 대역을 연기하는데 첫 대사부터 어떻게 쳐야할지도 모르겠고, 날이 서 있던 거죠. 나도, 이 영화도 그 장면을 위해 달려온 거잖아요. 김성근은 미친 게 아니라 수 십 년 간 아들을 위한 연극을 준비한 거예요. 그렇게 난 해석했고 믿었습니다. 생명줄과도 같은 설정이었죠. 광인과 아버지 사이에서의 묘한 줄타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거죠."

최적의 캐스팅..."박해일의 배려가 컸다"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무명배우 성근 역의 배우 설경구가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어찌 보면 설경구는 던지는 역이었고, 아들 역의 박해일이 오히려 그걸 받는다 볼 수 있었다. 설경구는 "박해일이 <은교> 때 이미 노인 특수 분장의 고충을 겪어서 알기에 현장에서 진정으로 날 배려해줬다"며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공감하는 고통이 있는데 박해일이 그걸 알아주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아들이 참 든든했죠. 촬영장 특성상 같이 술 먹을 일이 많았는데 해일이가 술 취하면 또 아버지라고 불러요(웃음). 더운 날씨에 특수분장이 녹으면 다시 수정할 수 없거든요. 최대한 녹지 않는 선까지 제 분량부터 촬영해야 했죠. 제 중심으로 촬영을 하다보면 본인 흐름이 끊길 수도 있는데도 해일이는 그걸 마음으로 이해하더라고요. 함께 출연한 이병준 형도 '편하게 먼저 해!' 이랬지만 왠지 미안했거든요. 근데 해일이에겐 안 미안했어요(웃음). 그만큼 불편함이 없었다는 거죠."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함께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윤제문이 연기한 오계장이라는 캐릭터다.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성근을 김일성 대역으로 선택해 각종 고문으로 고통을 줬던 그는 22년 후 정부 부처의 장관으로 등장해 성근과 재회한다. 권력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제문이는 만날 악역만 한다고 짜증도 내는데 진짜 연기를 잘해줬어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윤제문의 윤계장이 덜 늙게 묘사되는데 제가 아이디어를 냈거든요. 오계장만은 덜 늙게 하자고요. 권력이 안 늙는다는 걸 보이고 싶었던 거예요. 장관이 된 건 곧 권력의 끝까지 간 거예요. 시대가 지나고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그 권력이 어디 갈까요. 감독님 역시 흔쾌히 동의해서 나온 설정입니다."

설경구의 미래? "어떤 작품이든 하나만 제대로 하자!"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무명배우 성근 역의 배우 설경구가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설경구 스스로는 <실미도> <오아시스> 때 본인이 지니고 있었던 짱짱함이 사라졌다고 다소 아쉬운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의 독재자>로 긴 호흡의 캐릭터를 노련하게 소화해낸 건 분명하다. 이해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배우의 인생에 대한 얘기도 하고 싶었다"고 한 만큼 설경구에게 배우의 삶을 물었다.

"충분히 배우 지망생도 공감할 작품이에요. 배우라면 다들 캐릭터에 매달리고 잘 해보려 하죠. 영화 속 성근은 자신의 목표를 이뤘다고 봐요. 비록 아들을 위한 작은 목표였지만요. 하지만 저 역시 성근처럼 일상을 버릴 정도로 연기에 몰입하진 않아요. 그렇게 살기 진짜 어렵습니다.

<박하사탕>을 끝내고 그 캐릭터에서 오랫동안 못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김성근을 해보니 그건 약과더라고요. <오아시스> 당시에도 결혼식이나 행사에 갈 때 영화에서 입었던 허름한 복장 그대로 입고 갔어요. 그래야 그 캐릭터를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거죠.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내 일상은 유지되더라고요. 못할 짓이에요. 주위 사람이 더 힘들어하죠."

설경구는 이창동 감독과의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오아시스> 촬영 당시 이창동 감독은 설경구에게 "지금 다 좋고, 분명 관객들도 인정할만한 연기였는데 그래도 너 자신이랑 난 속이지 말자!"라며 "한 번 더 찍어보자"고 했다고 한다. 소름이 돋았던 설경구는 그때 이후 '속이지 않는 연기'가 평생 숙제가 됐다.

"모든 배우의 목표가 아마 '제대로 하나만이라도 잘 하자'일 겁니다. 해냈을 때 희열이 있거든요. 잘 되든 안 되든, 본인은 분명히 압니다. 해내면 정말 애처럼 기뻐요. 반대로 연기가 막힐 땐 죽을 정도로 절망하고요. 배우는 결국 부침이 있는 인생이에요. 제가 지금 잘 한다고 다음에도 잘 할 보장은 없습니다. 그저 마음을 비워놓는 거죠. 그렇게 힘들지만 재미를 느끼고, 고통스럽지만 또 다른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며 사는 게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무명배우 성근 역의 배우 설경구가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설경구 나의 독재자 박해일 윤제문 이병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