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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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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

온 나라를 얼어붙게 한 유신 폭압 하에서도 민주주의와 생존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투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오로지 강권과 폭압으로 국민들을 억눌러 침묵을 강요했지만, 강요된 침묵 속에서도 불만과 저항의지는 보다 더 광범위하고 강렬하게 쌓여갔다. 유신독재는 이성을 잃은 탄압을 자행하였다.

1973년 8월 8일, 유신독재의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 귀국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납치 도중 김대중을 현해탄에서 수장(水葬)시키려고 했다. 이 사건은 각계로부터의 즉각적이고도 거센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해 10월 2일, 서울대의 문리대 학생회는 교내 4·19 기념탑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2시간여 동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1. 정보·파쇼통치 즉각 중지, 자우민주주의 체제의 확립 2. 대일 경제예속 관계 즉각 중지 및 국민생존권 보장 3. 중앙정보부 즉각 해체 4. 김대중 씨 사건 진상규명 등 4개항을 주장하였다. 이 시위는 유신 이후 최초의 공개시위로 기록되면서 유신폭압체제에 대한 민주세력의 공격이 개시되었음을 예고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기폭제로 하여 11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전국의 각 대학이 일제히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나갔다. 재야인사들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새롭게 투쟁의 결의를 다져나갔다. 1973년 12월부터 재야 민주인사들이 유신헌법 개헌청원운동을 공개적으로 감행했다.

백만인 서명을 목표로 한 이 운동이 전개되자 박정희는 12월 29일 담화문을 통해 개헌운동을 즉각 중단하라고 발표하였다. 이어 1974년 1월 8일에는 개헌운동을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선포하였다. 이 긴급조치 1호로 개헌청원운동을 벌이던 장준하, 백기완씨 등이 구속되고 종교계에서도 이규상 전도사 등이 구속되었다. 서강대의 박석률 군을 비롯하여 다수의 학생들 역시 구속되었다.

1974년 개학과 동시에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권 퇴진을 요구하면서 학생들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밤 10시를 기해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관련하여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것이다.

"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으로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 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그 동안 우리 사회와 같은 공개사회가 지니는 특성을 역이용하여 표면상으로 합법성을 가장, 그들의 정체를 위장하고, 우리나라 각계각층에 침투를 획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민혁명의 수행을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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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표와 동시에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어 가거나 수배됐다. 동시에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발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주동학생들은 4단계 혁명을 통해 이른바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하여 과도적 통치기구로서의 민족지도부 결성까지 계획했으며, 이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1.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일본공산당  2.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표와 함께 학생을 포함한 1,024명이 조사를 받고 이 중 254명을 군법에 송치하여 54명이 1차로 기소됐다.

민청학련 사건 발표를 바라보며 이소선은 순간적으로 섬찟했다. 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학생들이 체제전복을 꾀한 사건이기 때문에 최고 사형에서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장기징역을 살리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발표 앞에 그는 두려웠다.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중징역을 살리겠다는 의도도 무서웠지만 관련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더욱 놀랐다. 전태일이 죽어서 성모병원에 있을 때 그를 찾아와 자신들이 사체를 인수해 장례를 치루겠다던 학생들과 그 당시에 경찰에 잡혀갔던 유인태·이철 등이 수배되고, 영안실에 맨 처음 찾아왔던 장기표도 찾는다고 난리법석이었다.

경찰은 민청학련 사건 수배자를 잡는다고 그들의 사진이 박힌 전단을 수없이 뿌리고 다녔다. 길거리의 벽에는 온통 도배를 해놓은 듯 수배벽보가 붙었다. 특히 방학동에서 그들이 모의를 했다 하여 방학동을 중심으로 도봉구 일대에는 검문 검색하는 경찰들로 가득 찼다. 동네방네 그들을 신고하라는 스피커 방송이 요란했고 형사들은 큰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경계망을 쳐 놓고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증을 조사했다. 뿐만 아니라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면서 집집마다, 하다 못해 간장독까지 뒤질 정도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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