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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이 당신에게 인사를 건넸다는 뜻이 담긴 '나마스테' 인사말을 건네는 시크교 할아버지.
 나의 신이 당신에게 인사를 건넸다는 뜻이 담긴 '나마스테' 인사말을 건네는 시크교 할아버지.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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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를 뒤로하고 암리차르로

3박 4일 동안 다람살라를 다 둘러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델리에서부터 동행한 다섯 명의 동료들은 30여 일이라는 짧은 여행 동안 둘러볼 곳이 많았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의 인도 일정은 그들과 달리 150여 일. 일정에 쫓겨 서두를 일도 없었지만 얼떨결에 젊은 동료들을 따라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암리차르로 향하는 7인승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비는 여섯 명이 나눠서 부담했다. 버스비와 비교해 큰 차이가 나지 않았고, 중간중간 원하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가며 쉴 수 있었다.

나는 본래 다람살라나 암리차르를 마지막 여정지로 잡아 놓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모든 일정이 젊은 동료들을 따라 나서고부터 뒤죽박죽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랴' 싶었다.

시크교도들이 대부분인 암리차르로 향하면서 장대한 체구에 긴 수염, 흰옷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 사람들을 떠올렸다. 시크교 사람의 모습은 인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박혀 있기도 했다.

깊은 신앙심으로 수백 년 동안 전통을 고수하고 살아가는 시크교인들. 나는 그 유명한 암리차르의 황금사원보다는 인도의 다양한 종교 중 하나인 시크교를 만나보고 싶었다. 시크교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암리차르는 1919년 영국 식민지 시절 독립을 외치는 인도인들에게 영국군이 자행했던 대학살의 현장이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시크교 분리 독립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암르차르 가는 길. 인도 최대 곡창지대인 편자브 주의 밀 밭이 도로 양편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암르차르 가는 길. 인도 최대 곡창지대인 편자브 주의 밀 밭이 도로 양편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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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가 속해 있는 히마찰프라데시 주 경계선을 벗어나 펀자브 주로 접어들자 도로 양옆으로 온통 밀밭이 펼쳐졌다. 문득 학창시절 시험 답안지를 채우기 위해 머릿속에 구겨 넣었던 인도 최대 곡창지대 '뻔잡'이 떠올랐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니 여전히 인도 대부분의 쌀과 밀이 이곳 펀자브 주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했다.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달리는 택시

택시로 두 시간 이상을 달려왔는데도 여전히 도로 양옆으로 밀밭이 펼쳐져 있다. 히말라야 설산이 올려다보이는 다람살라 주변은 이제 겨우 푸른 잎에 대가 오르고 있었는데 이곳 밀들은 제법 여물어 가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우리는 봄에서 여름을 향해 내달리며 드넓은 인도 대륙을 실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암리차르로 향하면서 도로가 비좁은 면 단위의 작은 도시와 만났다. 시장 바닥 주변에는 우리나라의 오일장처럼 호박을 비롯한 몇몇 이름을 할 수 없는 모종들이 나와 있었다. 비포장도로 주변으로 들어서 있는 낡은 건물들의 상점에 붙어 있는 조악한 간판들, 한가롭게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소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1960~1970년대 풍경과 흡사했다.

"인도의 작은 도시는 한국의 1970년대와 흡사하네요."

암리차르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 운전기사. 열차 예매와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지체했는데도 천하태평이었다.
 암리차르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 운전기사. 열차 예매와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지체했는데도 천하태평이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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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로 가족들과 통화하고 있는 택시 기사 발민다르에게 그 말을 하고 나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우리는 인도의 낡은 겉모습을 보고 시대적 착오를 일으키곤 한다. 인도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전화와 오토릭샤 사이로 달리고 있는 승용차들, 도롯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펩시콜라와 코카콜라 간판들, 시골 곳곳에 들어서 있는 삼성 간판들은 2014년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형형색색의 전통 옷차림과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현대 문명과 뒤섞여 있는 나라, 인도. 형편없이 낡은 건물과 소똥들이 널려 있는 작은 면 단위 지역에는 단지 과거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인 연극배우 이준씨를 위해 바탕콧이라는 곳에서 잠시 택시를 세웠다. 암리차르에서 사막 지역인 자이살메르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이준씨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열차표를 예매하지 못하고 혀를 차며 돌아왔다.

함께 동행한 젊은 동료들, 고마웠다

"아이고, 정전이라네요. 전산 처리가 안 돼 예매가 안 된다네요."

우리는 다시 암리차르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능통한 영어는 물론이고 힌두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줄 아는 우리들의 친절한 가이드 주상씨. 버스 터미널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보고 오더니 우리에게 선택권을 줬다.

"어떻게 할까요. 버스는 직행이 없고 로컬 버스가 전부인데..."
"로컬 버스가 뭐죠?"
"우리 시골 버스처럼 중간중간에 사람들을 태우고 달리는 버스인데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요. 사람들 틈에 끼어서 고생도 많고요."

나는 로컬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다들 힘들어하는 바람에 그냥 다람살라에서 타고 온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펀자브 주에 들어서면 어디서고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들을 쉽게 볼수 있다.
 펀자브 주에 들어서면 어디서고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들을 쉽게 볼수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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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택시를 세워놓고 열차 예매와 버스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해찰을 부렸다. 그럼에도 택시 기사 발민다르는 천하태평이었다. 중학교 과정의 큰딸과 초등학교 과정의 두 아들이 있다는 그는 본래 자신의 부친과 함께 집 짓는 일을 해오고 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택시를 몬다고 했다. 바탕콧에서 암리차르 황금사원까지 택시로 대략 2시간 거리. 버스비는 백 루피도 채 안됐지만, 택시비는 한 사람당 사백 루피를 부담해야 했다.

그 어떤 불편을 감수해 가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여행하기로 작정한 나였지만 깍듯이 선생 대접을 해주고 있는 젊은 동료들을 무조건 따랐다. 7인승 지프 택시이긴 했지만 다람살라에서부터 줄곤 뒷자리보다 편한 앞자리에 앉아 온 것도 미안한 노릇이었기에 내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나와 달리 짧은 여행기간 동안 한 군데라도 더 둘러보고 싶은 젊은 동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영어가 달려 기차표 하나 끊지 못하는 나이만 먹은 중년 사내가 젊은 동료들에게 대접받아가며 편하게 여행하는 것이 내내 미안했다. 중간 자리에 앉은 주상씨와 자리를 바꿔 가고자 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키가 190센티에 이르는 그는 고개를 숙여 나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다. 서로를 배려할 줄 하는 우리 동료들은 다람살라에서 출발한 지 대략 6시간여 만에 기분 좋게 암리차르에 도착했다.

황금사원 부근의 암리차르 거리. 오토바이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황금사원 부근의 암리차르 거리. 오토바이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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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릭샤와 오토바이, 승용차와 택시들로 뒤엉켜 있는 암리차르에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인도 펀자브 주의 서쪽에 위치한 암리차르는 파키스탄과의 국경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120여만 명이 살고 있는 암리차르는 1577년 시크교의 4대 구루 람다스 시절에 시크교 신앙의 중심지로 건설됐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우리는 황금사원에 들어가기 앞서 짐을 풀어놓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는 숙소를 찾아갔다. 외국인 숙소 앞에는 터번을 두른 두 사람의 시크교도들이 문지기처럼 앉아 있었다. 숙소를 이용하는 절차는 단순했다. 여권을 제시하고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방명록을 기록하면 무사통과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몇 대의 선풍기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숙소 내부는 창고 건물처럼 침침했다. 줄줄이 이어져 있는 몇 개의 침상과 출입문이 따로 붙어 있는 방 몇 개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비어 있는 침상은 없었다. 먼저 온 외국인 방문객들이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누울 자리는 없었다.

우리는 암리차르에서 1박 2일의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기에 따로 숙소를 잡을 생각이 없었다. 침상이 비워질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자물쇠 단속이 가능한 짐 보관대에 대충 배낭을 구겨 넣고 귀중품을 챙겨 황금사원으로 향했다.

BBC가 꼽은 세계 50대 문화유적, 황금사원

시크교도들은 황금사원에 들어서면 기도를 올리고 옷을 벗어 생명수로 여기는 호수에 몸을 담근다.
 시크교도들은 황금사원에 들어서면 기도를 올리고 옷을 벗어 생명수로 여기는 호수에 몸을 담근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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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입구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인뿐만 아니라 머리에 스카프나 수건을 두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그 앞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신발을 받아 정리하거나 신발을 내주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바쁘다. 사원을 찾는 모든 방문객은 신발을 벗고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신발을 맡기고 나오면 사원 입구 사이사이로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다. 신발을 맡기는 것에서부터 사원에 들어서기까지 모든 것이 무료다.

영국의 BBC가 꼽은 세계 50대 문화 유적이기도 한 황금사원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선 돈을 받지 않는다. 델리에서 '꾸뜹 미나르' 탑을 보기 위해 인도 현지인들의 입장료보다 무려 열 배에 가까운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낯설게 다가온다.

대리석이 깔려 있는 연못 한가운데 황금사원이 보인다. 1604년 시크교도들은 연못 한가운데에 사원을 건설했고, 이어서 1802년 이 사원의 지붕에 약 400㎏에 달하는 황금을 입혔다고 한다. 황금사원에는 시크교도들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몰려온 다양한 종교를 가진 순례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들은 사원에 들어서자마자 기도를 올리고 물에 들어가 몸을 담는다. 이들에게 황금사원의 호수는 성스러운 생명수나 다름없다.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인도 가족. 종교와 상관없이 인도 전역에서 몰려온 황금사원을 찾은 밝은 미소 하나 하나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인도 가족. 종교와 상관없이 인도 전역에서 몰려온 황금사원을 찾은 밝은 미소 하나 하나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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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교도들은 대부분 건장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 건장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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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은 시크교도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고 있음에도 이를 지키는 삼엄한 경계의 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열려 있었다. 종교의 우월성을 내세워 전도하려는 시크교도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들, 호수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 사원 대리석 구석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 사람들, 여기저기에서 미소 띤 얼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다가왔다.

시크교도들은 대체로 보통 사람보다 몸집이 장대하다. 무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체격과 부리부리한 눈망울에서 번져 나오는 미소들은 황금사원보다도 더 빛나 보였다. 그 당당한 미소들은 '이 수많은 사람 틈에서 지갑이나 여권을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으로 사방 경계하는 낯선 이방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무장 해제하고 있었다.

가장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 성지를 경계심 없이 활짝 열어 놓은 시크교의 보이지 않는 당당한 힘이 사원에 감돌고 있는 평화로운 기운과 뒤섞여 온몸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 기운에 휘말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빛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합장했다.

'나마스테' 인사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시크교도
 '나마스테' 인사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시크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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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을 찾은 인도 가족. 시크교인이 아니더라도 머리에 두건을 쓰고 신발을 벗어야 입장할수 있다. 입장료와 식사 모두 무료다. 사진을 찍기에 앞서 '나마스테' 인사를 나눴다.
 황금사원을 찾은 인도 가족. 시크교인이 아니더라도 머리에 두건을 쓰고 신발을 벗어야 입장할수 있다. 입장료와 식사 모두 무료다. 사진을 찍기에 앞서 '나마스테'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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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나마스테."

사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의 종교를 내세우지 않는다. 눈빛이 마주치면 서로 '나마스테'라는 인사말을 건넨다. 인도 사람들에게 '나마스테'는 '안녕하세요'라는 단순한 인사말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뜻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동료들이 다람살라에서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사소한 다툼 없이 기분 좋은 평화의 여정을 밟아 왔던 것은 누구를 제 식대로 가르치려 하거나 제 방식대로 이끌어가려 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나마스테'의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곳 황금사원의 평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 다른 종교를 배려하는 사소한 인사말 '나마스테'와 함께 피어나는 작은 미소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황금사원 밤 풍경. 한 낮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황금사원 밤 풍경. 한 낮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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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도 사람들 틈에 끼어 사원 안을 둘러보면서 알 수 없는 그 어떤 기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현기증처럼 몰려왔다. 홀로 하늘 높이 붕 떠서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 만 미터 이상의 고도로 날고 있는 인도행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그 기운과 흡사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고산증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나는 이런 기운이 고산증과 비슷한 것일까 싶었다. 하지만 황금사원은 고도가 높은 곳이 아닌 평지다. 그럼에도 고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처럼 흡사한 증세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롭기만한 사원의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몸에 잠재돼 있던 빈혈증 같은 병세 때문일까. 종잡을 수 없는 어지럼증이 몰려오긴 했지만 그 기운은 기분 좋은 기운이었다. 나는 현기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대리석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뜨기를 반복하면서 사람들의 미소를 지켜보는 즐거움에 푹 빠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들을 아무 조건 없이 평화롭게 바라보면, 저들 역시 나를 평화롭게 바라볼 것이다. 결국 그 평화는 나와 너 모두의 평화가 될 것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조명을 받은 황금사원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고, 사원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한낮에 보는 운치와 또 다른 황금사원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오히려 더 많이 늘어난 듯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시크교도들이 하는 황금사원 식당으로 들어섰다. 사원을 찾은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된다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충격적인 장면에 아까처럼 또다시 현기증이 몰려 왔다.




태그:#암리차르 가는 길, #인도최대 곡창지대 펀자브 주, #외국인 무료 숙소, #황금사원과 시크교,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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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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