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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불을 지피다.
▲ 부엌 군불을 지피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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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비웠던 집, 나는 묵혀둔 숙제를 하듯이 마당에서 우거진 풀을 뽑았다. 눅눅한 방에 군불을 지폈다. 툇마루의 거미줄을 걷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묵혀둔 숙제를 풀 준비에 나섰다.

지난 8월 7일, 법원에게 '피고인 소환장'을 받았다. 얼떨떨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피할 수 없는 후폭풍이었나?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9개월 가까이 지리산을 떠나 외국에 나가 있었다. 그러니 "이게 무슨 고약한 귀국 환영식인가" 싶었다.

6년 만에 법정에 서다

피고인소환장
 피고인소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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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지리산을 나와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법정에 다시 섰다. 6년만이다.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는' 피의자의 신분으로 섰다. 처벌의 내용으로 보니, 나의 죄질이 악질이다. 죄명은 형법 제185조 일반교통방해죄였다.

지난 2008년 당시 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4대강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정책들을 비판하기 위해,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그때 집회 참가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무더기로 줄줄이 연행됐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나는 2008년 6월 25일, 경북궁역 부근 차도에서 1차 연행. 8월 15일, 남대문로에서 2차 연행. 각각 48시간을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나왔다. 그리고 4개월 후, 검찰에 의해 불구속기소 됐다.

죄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형법의 '일반교통방해죄'였다. 2009년 2월, 첫 공판이 열렸다. 공판은 시작되자마자 중단(기일 추정) 됐다. 당시 검찰에게 기소를 당했던 1200여 건의 공판 중 절반가량이 중단됐다. 5년이 지난 올해 2014년 3월부터 다시 관련 재판들이 시작됐다.

이처럼 재판이 미뤄진 이유는 집시법 제10조 '야간 집회 금지'와 '야간 시위금지'에 대하여 2008년, 2010년에 각각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심판결과가 나오기까지 6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결과는 '헌법불합치(위헌)'와 '야간 시위는 같은 날 24시까지만 가능하다는 한정(조건부)위헌' 이었다. 따라서 나의 죄명은 '일반교통방해죄' 하나만 남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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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으로 가는 길, 머리를 스쳐간 법정영화들

3일 아침,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서울 지하철2호선 교대역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전에 봤던 법정영화들이 떠올랐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다룬 <필라델피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음모론을 다룬 <JFK>, 군대의 비리를 폭로하는 <어 퓨 굿 맨>, 부패세력과 싸우는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 그리고 최근에 본 한국영화 <변호인> 등등...

나는 법정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거대 권력, 거대 부정과 맞서 투쟁하는 싸움판이 흥미진진하다. 치열한 논쟁과 법리다툼의 끝, 그 반전의 끝은 "역시 정의가 승리한다"는 감동이다. 법정영화는 그 감동을 열렬하게 선사하는 '결말'이 최고다. 아무렴, 얼마나 통쾌한지, 얼마나 머릿속이 개운해지는지...

나는 과연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법정에서 그런 통쾌한 감동을 맛볼 수 있을까. '반전'을 기대해도 될까. '역시, 대한민국은 살만한 곳이야! 정의가 살아있네!' 쾌재를 부르며 법정을 나서게 될까. 걷는 내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낙관적인 결말을 기대하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웠다. 구름이 해를 가렸다. 빗발이 차디찼다.

'피고인 소환장'을 받은 날, 정수희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희씨를 처음 만나 곳은 서부경찰서의 유치장 안이었다. 2008년 6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연행된 후. 그 전까지는 서로 생면부지였다. 당시 수희씨는 직장을 다니며 한 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말마다 행동마다 진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정말 참되 보여, 끌렸다.

그렇게 유치장에서 맺은 인연으로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들이 몇 있다. 4년 전, 내가 서울을 떠나 지리산으로 이사한 후로도 서로 안부를 챙겼다. 수희씨는 당시 유치장에서 풀려나와 100만 원 벌금형을 받았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열애 중이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

오랜만에 전화로 화기애애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수다를 떨다가 내가 "수희씨 재판 어떻게 끝났지?"하고 물었다.

"언니, 말도 마세요. 2심까지 2년 반 넘게 걸렸는데... 결혼하고 임신하고, 만삭의 몸으로... 또 아이를 낳고는 애를 데리고 다니며 재판을 받았으니까요. 마지막 공판 날에는 아이가 많이 아팠는데, 맡길 데도 없고, 설사하고 토하는 애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갔으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마지막 변론을 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죠. 감정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정말이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회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아픈 아이 데리고 법정에 서야 할 만큼,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진 거냐고... 왜, 사람이 사람 말을 안 믿어 주냐고. 내가 울어서 그랬나, 그때 재판장이 당황한 기색으로, 피고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라며 얼버무리는데... 결국, 2심에서 벌금 절반 깎이고 끝났어요. 줄기차게 무죄 주장을 했지만 씨도 안 먹히는 분위기였고... 사실, 너무 지치기도 했고 판결이 또 정치적일 게 뻔해 보여, 3심 청구(대법원 상고)는 포기했죠. 언니는 이제 시작? 힘내세요!"

또 다른 연행자들의 재판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 전모씨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는 2008년 당시, 촛불집회의 첫 연행자들 중 한 명이었다. 200만 원 벌금형을 받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여섯 번의 재판을 거쳐 1심 최종선고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할 무렵, 비가 그쳤다. 날은 여전히 칙칙한 회색빛으로 무거웠다. 나는 곧장 서관 법정을 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각 법정 앞 복도 의자에는 증인인지 피고인인지, 사람들이 죽 앉아 있었다. 살면서 피해 가야 할 곳이 경찰서와 법원이라던데...

오늘의 재판일정을 확인하는 사람
▲ 법정 오늘의 재판일정을 확인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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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526호는 맨 끝 방이었다. 나는 우선 벽에 붙어있는 '오늘의 재판 안내'를 들춰, 내 공판시간을 재확인했다. 오전 11시 20분. 아직 40여 분 남아 있었다. 나는 복도 의자에 앉아 '변론요지서'를 다시 읽으며 윤지영 변호사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윤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아래 민변)에서 활동하는 젊은 변호사다. 민변은 2008년도 당시부터 촛불 연행자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을 맡아주었다. 나는 그동안 윤 변호사와 간간히 이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아왔다.

'변론요지서' 자체가 감동

'변론요지서'는 윤 변호사가 재판 전에 이메일로 보내준 것이었다. 17쪽에 달했다. "이 사건 공소는 기각되어야 합니다"로 시작됐다. 그리고는 조목조목 대법원의 판례와 법 조항들을 예시로 들며 무죄 주장을 펴나갔다. 다시 봐도 감동적인 변론서였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주장을 밀고나가는 신념과 뚝심이 느껴졌다.

"공소사실은 특정되지 않았다. 공모공동정범은 성립하지 않는다. 집회 중 도로 점거는 형법 185조의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법정영화에서처럼 검사의 공소사실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윤 변호사의 열정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변론요지서
 변론요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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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서의 한 대목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검찰이 피고인에 대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에 더하여, 일반교통방해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다. 그 의도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경찰의 위법한 현행범 체포행위를 무마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형사소송법 제214조에 의하면 50만 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가 부과되는 경미사건에 대해서는 범인의 주거가 분명하지 아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행범 체포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경찰은 촛불문화제 참가자들을 체포할 당시 적법절차원리 및 영장주의에 위반하여, 그 주거가 분명한지 여부를 가리지 않은 채 현행범 체포를 강행했다. 결국 검찰은 경찰의 현행범 체포행위가 불법이라는 비난을 면탈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써 집회참가자에 대해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국가가 자신의 불법행위를 감추기 위해 형법을 확대 해석·적용하여 국민을 중죄인으로 몰고 가는 행태라 할 것이다."

짝짝짝! 방청석에서 윤 변호사를 향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물론, 내 상상 속 법정에서의 일이었다.

'변론요지서'를 다 읽고 법정으로 들어갔다. 잠시 방청석에 앉아 진행 중인 공판을 지켜보았다. 성희롱, 성추행범들의 공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 변호사가 들어왔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 차림, 긴 생머리가 깔끔한 인상을 풍겼다. 6년만의 재회인데, 어쩐지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윤지영 변호사
 윤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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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20분이 조금 지났다. 드디어 윤 번호사와 함께 피고인석에 섰다. 먼저 인정심문을 했다. 피고인인 나의 이름과 직업, 주소 등을 확인했다. 이어, 공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법정영화에서처럼 열띤 공방이나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은 없었다. 윤 변호사가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변론요지서'를 재판장과 검사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선고공판 날짜가 확정됐다. 1심 공판이 적어도 서너 번 진행된 후 선고를 받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내 공판은 속전속결이었다. 재판장이 내게 최후변론의 기회를 주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과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애써 삼키며, 짧게 변론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저는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를 행사했을 뿐입니다. 국가정책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법정에서 나왔을 때, 비가 또 내리고 있었다. 윤 변호사가 먼저 우산을 펼쳐들고 떠났다.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약속이 있다고 했다. 나도 우산을 펴들고 천천히 교대역을 향해 걸었다. 다시 질문이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과연 오는 10월 1일에 있을 1심 선고공판에서 '반전'이 일어날까? "역시, 대한민국은 살만한 곳이야! 정의가 살아있네!" 그럴까? 나는 이 길의 끝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까? 문득, 영화 <변호인>에서 진우의 대사가 떠올랐다.

"데모한 사람이 천벌 받으면, 데모를 하게 한 사람은 무슨 벌을 받아요?"


태그:#촛불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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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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