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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첫 명칭은? 당연히 '훈민정음'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데 쓰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한글이 처음 반포되었을 때 일부 사대주의 학자들은 '언문'이나 '진서'라는 이름으로 낮춰 불렀다고 한다. '정음'이나 '국문' 등의 명칭도 쓰였는데,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이는 주시경 선생이라고 전해진다.

'한글'의 고어 표기는 'ᄒᆞᆫ글'이다. '아래아 한글'이라고 읽는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ᄒᆞᆫ글'이라는 고어 표기를 널리 되살려낸 게 바로 'ᄒᆞᆫ글 1.0'이다. 1989년 4월에 처음 출시된 한글 문서작성 프로그램이다. 윈도우가 나오기 전에는 도스에서 'hwp'로 그 프로그램을 불러서 썼다.

이 'ᄒᆞᆫ글 1.0'은 컴퓨터를 이용한 문서작성을 일반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했던 이찬진·김택진·우원식 등은 'ᄒᆞᆫ글 1.0'을 기반으로 1990년 11월에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했다.

㈜한글과컴퓨터는 당시 앞선 기술력으로 국내 IT업계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ᄒᆞᆫ글'은 시장 점유율이 90%에 달했으며, 1993년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 최초로 매출액 100억 원을 넘겼다다. 'ᄒᆞᆫ글 1.0'은 그 후 눈부신 진화를 거듭해서 오늘날의 '한컴오피스' 시리즈에 이르렀다. 현재 가장 일반화된 한글 문서프로그램은 '한컴오피스 2010'이다. 

'한컴오피스 2010'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로 교정

바로 그 '한컴오피스 2010' 프로그램으로 옛 일을 돌아보는 글을 쓰다가 우연히 발견한 게 하나 있다. '국민학교'라는 단어가 필요해서 자판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웬걸, '국민'이 '초등'으로 저절로 바뀌는 것이었다. 한글의 자동 교정 기능이 '국민학교'는 이미 단어로조차 인정할 수 없으니 아예 쓰지 말라며 무언의 부탁이자 명령을 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 '초등학교' 표지판
 어느 '초등학교' 표지판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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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땅의 30대 이상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명칭은 1941년 2월에 공포된 일제칙령 제148호 '국민학교령'에 따라 쓰기 시작했다. 이 '국민'은 오늘날의 개념과 크게 달랐다. '황국신민(皇國臣民)', 즉 '일본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 '신하'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국민학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를 현재의 '초등학교'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은 1995년 8월 11일부터다. 광복 50주년을 앞두고서야 그걸 바로잡았으니 무려 55년 동안이나 그 이름을 '아무 생각없이' 썼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만은 물론, '국민'이라는 말로 '신하'를 강요했던 일본조차 그 명칭을 일찌감치 폐기했었다는 사실이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한 취지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일제 잔재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었다. 민족정기를 하나씩 바로 세워 나가겠다는 뜻에 적극 찬동해마지 않는다. 친일파나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이들을 뺀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그야말로 만시지탄이 따로 없을 일이었다.

을사늑약은 왜 한자변환에 등록되어있지 않나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는 게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고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이름이다. 그걸 과거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이름으로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가르쳤다. 그 뜻이 '을사년에 일본제국이 우리나라를 외세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맺은 조약'인데도 그랬다. 지금은 그걸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이때 쓴 '늑(勒)'은 '굴레'나 '재갈'을 뜻한다.

'한컴오피스 2010'에서 '을사조약'과 '을사보호조약'도 한번 두드려 보라. '국민학교'와 달리 이 말들은 자동으로 수정되지 않는다. 두 단어의 끝에 커서를 두고 F9키도 선택해 보라. 한자로 조합된 '乙巳條約'과 '乙巳保護條約'이 거침없고 당당하게 뜬다. 더 황당한 건 따로 있다. 앞서 언급했던 '을사늑약'은 F9 키를 아무리 두드려도 조합된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 '을사보호조약'과 달리 '을사늑약'은 아직 완성된 단어가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국민적 공감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인가.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간에 소위 '한일합병조약'이라는 것이 체결되었다. 이걸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한일합방'이라고 불러왔다. '을사보호조약'처럼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일제가 만들어 쓴 명칭을 그대로 갖다가 교실에서도 가르쳤으니 말 다했다. 이를 '경술년에 당한 국가적 치욕'이라는 뜻의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바꾼 것 또한 훨씬 뒤의 일이다.

그 '경술국치' 이후 1945년에 광복을 맞기까지 36년간 우리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을 이르는 명칭이 또 여러 가지다. 어렸을 때 어른들 입을 통해 자주 들었던 말은 '왜정시대(倭政時代)'였다. 말 그대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던/통치하던 시대'라는 뜻이었다. 이 또한 바꿔 서야 할 말이다 싶어서 '왜정시대'의 끝에 커서를 두고 F9를 두드려 보았다. 그랬더니 '倭政時代'로 재깍 변환되는 게 아닌가.

'왜정시대' 말고 가장 오래 써 온 명칭이 바로 '일제시대'다. '일제시대'도 '한컴오피스 2010'에서 자판을 두드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대'가 '강점기'로 바뀌며 '일제 강점기'라고 자동으로 띄어지는 것이었다. 이 또한 서너 차례 반복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일제시대'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다스렸던 시대'라는 뜻이니 민족적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점령당했던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일제강점기'를 써야 한다는 뜻이리라.

거기까지는 좋았다. 같은 방식으로 '황국신민'과 '한일합방'을 입력해 보라. '국민학교'나 '일제시대'와 달리 이 둘은 잘만 써진다. '한일합방' 끝에 커서를 두고 F9을 선택하면 미리 조합된 '韓日合邦'으로 금세 변환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아, 알겠다. 이런 말들이야말로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담은 것들이니 한자와 더불어 똑똑히 기억하자는 뜻인가 보다. 그렇게 좋은 쪽으로 이해하기로 했는데, 이별의 뒤끝처럼 미련은 남는다. 국민학교'와 '일제시대'라는 말은 부끄러운 과거사 아닌가, 하는...

가장 최신 버전인 '한컴오피스 2014'는 그런 점을 제대로 개선시켰는지 자못 궁금하다.


태그:#국민학교, #초등학교, #일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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