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달 전 선물 받은 책 중에 좀 특별한 것이 있다. 학교의 역사를 담은 책, 100년의 자취를 꼼꼼히 엮어낸 책의 이름은 <중동백년사(中東百年史>이다. '동문편' '학원편' 두 권으로 출판한 <중동백년사>앞에는 '한국의 민족사학'과 '세계의 명문 사학'이란 수식어가 각각 붙어 있다. 웅장한 교육 목표를 가진 사학임을 금세 알 수 있겠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정독(精讀)할 마음을 갖고 책을 넘기자마자 표지 안 첫 쪽에 있는 '중동정신 선언문(中東精神 宣言文)'이 눈에 들어왔다.

'중동정신(中東精神)'은 민족의 사표(師表)-백농(白儂) 최규동(崔奎東) 선생께서 우리 중동(中東)에서 구현하고자 하셨던 신념과 이상, 즉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겠다"는 정의감(正義感)과 "우리의 자제(子弟)는 우리의 손으로 교육시키겠다"는 민족애(民族愛)가 100년 동안 중동인(中東人)에게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 하나의 정신으로 형성된 것이다(중동정신 선언문 서두).


<중동백년사> 첫 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중동정신 선언문.' 중동인들의 삶의 방향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 중동정신 선언문 <중동백년사> 첫 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중동정신 선언문.' 중동인들의 삶의 방향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학교를 졸업한 지 40여년이 가까워 오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중동고 교가와 이 '중동정신'만은 오롯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선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중동정신은 학교의 설립자이신 백농(白儂) 최규동 선생(초대 서울대 총장 역임)의 교육 이념으로 '신의를 소중히 여기며,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이것을 한 음절로 표현하면 '의(義)'가 될 것이다. 이 의로움을 우리는 학교 입학식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중동 100년의 역사에서 많은 졸업생들이 이 '의'를 실천하며 살아왔다. 보이게 또는 드러나지 않게 더 많이.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동 관련 인사가 국가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적재적소에서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다. 중동정신을 국가 발전으로 확산시킨 결과가 아닌가 한다. 지난 2006년 각계각층에서 일하고 있는 졸업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개교 100주년 기념식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자리였다.

며칠 전, 한 사람이 타계했다는 부음이 휴대폰 문자로 날아들었다. 중동 동문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 그의 죽음을 문자는 '의로운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어떤 죽음이길래, 중동 동문회에서 이런 문자로 부음을 알려오는가.

주인공은 중동고 71회 한증엽 동문이었다. 그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계곡으로 산행을 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집중호우로 물이 불어나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불귀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동문은 서울 광진구에서 이비인후과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로 지역에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실천해서 존경받는 인사로 알려져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4년 전에도 있었다. 중동고 72회 이영수 동문의 경우는 북한산에 등반을 갔다가 계곡 물에 빠져 살려달라는 한 중년 여성의 외침을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을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함께 익사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영수 동문은 동문회를 비롯해 주위 사람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의사자로 지정되었고, 중동의 '의'를 실천한 사람으로 동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작년 5월에는 중동고 축구선수 김지원 군이 생활을 비관해 한강에 투신자살하려는 40대 가장을 몸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막아 목숨을 살린 일도 있다.

최근의 일만 들었지만 일제시대 항일운동에도 중동이 앞장섰던 것을 역사는 증언해 주고 있다. 3.1운동,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의거, 해방 후 4.19에 이르기까지 의로운 일에는 늘 중동이 앞장섰다. 이런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중동의 실질적 설립자라고 할 수 있는 백농 최규동 선생의 교육 이념에서 왔다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다. 백농 선생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덕목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 핵심은 '의(義)'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에는 옳음, 바름, 정의, 신의 등 삶의 기본 덕목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얼마 전(8월 23일) 여수에서 한 음악회가 열렸다. 이름 하여 '순교64주년 손양원기념음악회.'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사랑과 용서 화해의 상징적 인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음악회의 주제가 '라 클레멘자(La Clemenza), 즉 '용서'였다.

이 음악회를 주관한 기관이 유나이티드문화재단이었고 주최는 민족지도자 손양원기념사업회(회장 박세훈) 그리고 후원은 중동고 총동문회(회장 백강수)를 비롯해 7개 기관이 물심양면으로 돕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 행사를 위해 유나이티드문화재단 강덕영 회장의 헌신적 노고는 단연 돋보였다. 강 회장은 중동고 58회 동문이다.

중동 동문 중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자랑스런 사람이다. 손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까지 만 1년 동안 공부했다는 것이 밝혀져 지난 2월 6일 중동고 107회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경남 함안 지역 독립운동 주모자로 지목되어 구속된 탓에 1년 여 만에는 학업을 그만 두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년 중동학교를 다니면서 백농 선생의 중동정신(義로움)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손 목사의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은 기개와 약자 사랑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의 토대 위에 중동의 '의' 정신으로 단련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014년 2월 6일 중동고 107회 졸업식장에서 고 손양원 목사가 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고 있다(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가 대신 받음).
▲ 고 손양원 목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함 2014년 2월 6일 중동고 107회 졸업식장에서 고 손양원 목사가 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고 있다(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가 대신 받음).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손 목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해서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해방 뒤 여순 사건으로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사회주의자 청년의 총에 빼앗겼음에도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받아들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몸소 실천한 목회자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6.25동란 때 한센병 환우 신자들을 두고 피난을 갈 수 없다며 교회를 지키다가 인민군의 총에 희생된 순교자이기도 하다. 사랑을 입술에 올리기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법인데 손양원 목사는 그 일에 솔선수범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손 목사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른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나이가 되었다. 우리 주위에 엄습하는 죽음의 그림자들도 자주 목격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죽음은 슬픈 일이다. 죽음 앞에는 모두 엄숙하고 진솔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죽음을 놓고도 계급과 계층 그리고 세대와 지역 나아가 정파로 갈갈이 찢겨 서로 헐뜯는 세상이다. 정의와 진리가 이들 앞에 발붙일 여지가 없다. 슬픈 일이다.

​이럴 때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이웃을 구하고 산화한 이영수, 한증엽 동문, 또 싸워가면서까지 한 사람을 살려낸 중동고 학생 김지원 군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기적 삶에 매몰되어 사랑과 정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이런 분들 때문에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들 중동정신의 발현자(發現者)들은 이 나라에 따뜻함을 선사하고 산화한 사람들이다. 손양원 목사는 나라를 넘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인물이다. 이들의 의로운 행동 앞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더불어 이들이 우리 동문이라는 게 새삼 마음 뿌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m.blog.naver.com/lmj0691)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태그:#중동정신, #의로운 죽음, #중동고등학교, #백농 최규동, #손양원 목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