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막을 내린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의 한 장면.

지난 6월 29일 막을 내린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의 한 장면. ⓒ KBS


지난 6월 29일, 시청자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막을 내렸다.  이날 최종회의 시청률은 19.0%(닐슨코리아 전국기준, 이하 동일)로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첫 회 11.6%로 시작했던 <정도전>의 시청률은 드라마에 대한 호평이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히 상승했으며, 정도전(조재현 분)과 정몽주(임호 분)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은 36회에선 19.8%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평일 안방극장에서 동 시간대 1위를 차지한 드라마들도 10% 초반의 시청률에 머무르는 추세에서, 정통 사극인 <정도전>이 이례적인 선전을 거둔 셈이다.

<정도전>의 흥행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수많은 명대사를 만들어낸 대본의 힘, 입체적인 해석에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이 합쳐져 되살아난 실존 인물들, 정통 사극 장르에서 새롭게 시도한 여러 연출 기법 등…. 하지만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트렌드, '흐름'이다. 그리고 <정도전>은 이를 기막히게 잡아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정통'에서 '퓨전'으로...한국 사극 변천사

 MBC 새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 공식 포스터. 왼쪽부터 김민서 김수현 한가인 정일우.

MBC <해를 품은 달> 공식 포스터 ⓒ MBC


얼핏 보기에 사극과 트렌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사극에도 분명 유행은 존재했다.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사극은 <정도전>과 같은 정통 사극이었다. 역사고증은 정통 사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고, 따라서 사극의 주인공도 일정량 이상의 정사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 즉 왕족이나 관리, 지식인 등이어야 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은 이 정통 사극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KBS 대하시리즈 히트작이었던 <용의 눈물>(1996~1998)과 <왕과 비>(1998~2000), <태조 왕건>(2000~2002) 등이 방영되었다. MBC <허준>(1999)은 6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SBS <여인천하>(2001~2002)가 국민 남녀노소에게 '뭬야?'라는 유행어를 전파한 것도 이때다.

그러던 중 2003년에 정통 사극의 법칙을 깨뜨린 작품이 등장하였다. MBC 드라마 <다모>는 숙종 재위 기간을 배경으로, 가상의 인물인 다모(관아의 손님 접대, 공무 보조 등을 담당하던 여종) 채옥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주인공이 정사의 주인공이 아닌 천민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주인공의 특성을 이용해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은 당시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같은 해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흥행하며 본격적인 드라마 한류 시대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사극에도 한류에 맞는 전략이 필요해졌다. 정통 사극은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역사 지식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 시청자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반면 퓨전 사극은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데다 이국적인 의상이나 액션, 로맨스 등 즐길 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한류 공략에 더욱 유리한 점이 많았다.

이 때문에 <다모> 이후로 다른 공중파 채널들도 퓨전 사극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MBC는 <태왕사신기>(2007)에서 배용준을 주인공으로 발탁, 해외 수출을 겨냥한 퓨전 사극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2000년대 중후반, 어느새 퓨전 사극은 정통 사극을 밀어내고 역사극의 대세를 이루었다.

퓨전 사극의 유형도 다양해졌다. SBS <바람의 화원>(2008)이나 <뿌리 깊은 나무>(2011)와 같이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을 드라마화한 '팩션 드라마'가 등장했다. KBS <공주의 남자>(2011)의 세희공주(극 중 이름은 세령공주)나 MBC <제왕의 딸, 수백향>(2013)의 다시라카 황녀 등 야사나 학설에서 찾아낸 주인공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는 MBC <해를 품은 달>(2012)처럼 실존 인물이나 사건 등을 배제하고 과거의 배경만 따온 후, 거기에 환상적인 요소를 더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드라마도 등장했다. 다만 이들은 역사적 요소를 빼면서 사극으로서의 특성을 잃었기 때문에, 퓨전 사극보다는 '한국형 판타지'로 분류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정도전'의 성공, '정통 사극' 부흥 이끌까

 KBS 1TV 드라마 <정도전> 포스터.

KBS 1TV 드라마 <정도전> 포스터. ⓒ KBS


반면 퓨전 사극에 밀려난 정통 사극은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오던 KBS의 대하사극 시리즈는 2009년 <천추태후> 이후 제작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MBC 일일사극 시리즈도 고전하다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사실상 정통 사극 노선을 포기, 그마저도 조기에 종영하는 등 아예 사극 편성을 포기했다. SBS는 아예 <왕과 나>(2007~2008) 이후로는 지금껏 정통 사극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류의 단골이었던 옆 나라, 일본의 정치적 분위기가 2012년에 아베 내각이 들어서면서 격변했다. 이들은 독도 영유권 분쟁을 의도적으로 재점화하고, 고노 담화 재검증 주장을 통해 위안부 강제 징집 사실을 부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극우 인사들의 각종 망언이 계속 전파를 탔고, 이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2013년 교학사에서 제작한 한국사 교과서가 파문을 일으켰다. 뉴라이트 계열 사학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 교과서는 부실한 구성, 식민통치와 독재 미화 논란으로 규탄을 받았고, 이는 2014년 초 전국적인 교과서 채택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역사관 붕괴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된 사회적 흐름 속에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사극에 단순한 재미 이상의 의미를 요구하는 시청자도 늘어났다. 하지만 퓨전 사극은 이러한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2013년 방영한 사극은 대부분 시청률 경쟁에서 참패했고, 유일하게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MBC <기황후>(2013)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내내 여론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정도전>의 흥행은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 일단 비슷한 시기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중 유일한 정통 사극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청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완성도가 시쳇말로 '아저씨 취향'의 흔한 대하드라마에 그쳤다면 이 정도로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작진은 대하드라마 시리즈의 고전적인 틀을 유지하면서도 연출 측면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정통사극의 복각에서 벗어나 시청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위화도 회군의 시가전은 역대 사극 중에서 손꼽히는 볼거리였고, 600년 전임에도 현대와 기막히게 들어맞는 인물들의 대사는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정통 사극에 목마른 사람들은 물론 다양한 유형의 시청자층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정도전>은 흐름이 요구하는 바에 성실히 응한 보답을 받았다.

<정도전>의 성공은 장래 사극 트렌드에 새 '대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KBS는 2009년 <대왕 세종>을 끝으로 쇠락한 대하사극 시리즈를 다시 일으켜 세울 추진력을 얻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2003년 <다모> 열풍처럼 <정도전>의 인기 현상이 다른 방송사의 사극 제작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퓨전 사극 일색이었던 사극 판도에 다시 한 번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이 또한 시작 단계다. 사극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데 성공하거나, 또는 실패하여 사극 장르 전체를 다시 위기에 빠뜨리는 것도 모두 다음 제작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정도전 사극 기황후 팩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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