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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홀리 축제. 이동 인구가 많아 바라나시나 꼴카타로 향하는 기차표는 이미 일 주일치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버스 편이라도 알아봐야 하는데 밖으로 나서자니 물감 폭탄이 기다리고 있었다. 꼼짝없이 게스트하우스에 갇혔다.

인도에서 들리는 자진모리...도대체 무슨 일?

행인들을 향해 물을 퍼붓고 있는 내가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 청년
 행인들을 향해 물을 퍼붓고 있는 내가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 청년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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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을 쓰고 있던 성민씨는 휴대폰에 코를 박고 부지런히 검색한 끝에 자신이 가고자 했던 바라나시행 기차표 예약에 성공했다. 그 표도 단 한 장뿐이다. 예약 취소된 표를 대기 명단에 올려 구한 것이라고 한다. 성민씨가 기차표 예매로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빤히 봤기 때문에 홀로 기차표를 예매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찌근거렸다. 인도 기차표는 단순히 돈과 표를 맞교환하는 게 아니었다. 간단한 절차지만 영어를 구사하기는커녕 읽고 쓰는 것조차 어려운 얼치기 여행자인 내겐 힘든 일이다. 나는 차라리 험악한 소문이 떠도는 빠하르간지(아래 빠간) 밤거리를 걷는 게 더 속 편한 일이었다.

인천에서 델리로 오는 기내에서도 간단한 입국 서류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 어리바리 촌놈인 나. 델리 빠간에 홀로 남아 골머리 아픈 기차표 예매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난감했다. 인도에 오기 전 대략 루트는 정했지만 애초 목적 없는 여행길이었다. 홀로 떠나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일행들과 함께 움직이기로 작정했다. 이를 위해선 본래 가고자 했던 바라나시와 꼴카타 방향과는 전혀 다른 북인도로 360도 급회전해야 했다.

일행들이 향할 곳은 히마찰 프라데주, 다람살라의 맥그로드 간즈(아래 맥간)라는 곳이다. 티베트 임시정부가 있고,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다람살라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맥간은 처음 듣는 지역이었다. 사실 맥간은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나 이동하던 카톡 친구들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나중에 합류한 연극배우 출신 이준씨를 얼떨결에 따라나서다 보니 가게된 것이다. 이준씨도 카톡으로 알게 됐다는 유주상씨를 따라 나설 계획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줄줄이 엮여 인도 유학생이라는 주상씨를 기다렸다.

"둥그리 닥닥 둥그리 닥닥."
"둥둥닥닥 둥둥닥닥."
"당당 다다당."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주로 표적이 된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주로 표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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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중모리에서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으로 점점 빨라진다. 어디서 많이 듣던 가락이다. 내가 한국에 와 있나 싶을 정도로 익숙한 장단. 꽹과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신명 나는 풍물 장단과 정말 흡사하다.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델리, 그것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우글우글한 빠간에서 풍물 가락을 두드리는 한인회가 있을 리 만무했다.

3층 숙소에서 한걸음에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얼굴과 온몸에 물감을 떡칠한 인도 청년들이 요란하게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홀리 축제의 흥을 돋우는 패거리들인 모양이었다. 더러 여장한 남자들도 보인다. 바로 이들이 풍물과 흡사한 장단으로 인도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네 대보름날 지신밟기를 하는 것처럼 집집마다 돌면서.

인도 홀리 축제는 우리네 정월 대보름 축제보다 한 달 늦은 음력 2월 15일 보름에 열린다. 고대부터 시작됐다는 홀리 축제는 정월 대보름 축제처럼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농무제이기도 하다. 홀리 축제 하루 이틀 전부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색깔 물감과 가루를 뿌리는데, 우리 일행들은 그 경험을 이미 한 터였다. 빠간 거리를 지나는데 난데없이 물 폭탄이 날아왔다. 특히 흰옷 입은 외국인이 표적이 된다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흰옷을 입고 다니다가 이틀 내내 물 폭탄 표적이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 물감 폭탄을 들이붓는 인도사람들
 사람들에게 물감 폭탄을 들이붓는 인도사람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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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전날에도 이미 봉변을 당했다. 나와 함께 빠간 거리를 걷고 있던 우리 일행의 막내 순이가 된통 당했다. 나를 향해 던진 물 폭탄이 옆에서 걷던 순이의 얼굴에 직통으로 날아왔다. 안경알까지 빠지는 봉변을 당했지만 다행히 순이는 다치지 않았다.

나는 신명 난 패거리를 향해 사진기를 꺼냈다. 그중 한 사람은 게스트하우스 매니저와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게스트하우스 매니저에게 돈을 휙 집어던졌다. 순간 사진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째려보며 사진기를 향해 손짓한다. 사진기를 가져오라는 손짓이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내 잘못이 컸지만 나는 "내가 뭘 어쨌다고"하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내 직감은 적중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들은 자신을 찍는 사람에게 사진값을 요구하거나 공연히 트집 잡아 돈을 뜯어 간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네 지신밟기처럼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빌어 주는 명목으로 떠들썩하게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빠간 상가를 돌고 있었는데, 만약 돈을 주지 않으면 저주를 퍼붓는다고 한다.

홀리는 인도의 봄 축제 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한 축제라고 한다. 북인도에서는 추운 겨울이 끝났음을 기념하는 날로 물감을 탄 물이나 가루를 서로에게 뿌리고 마리화나의 일종인 방(bhang)을 우유에 타 마시면서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하루를 보낸다. 이날만큼은 카스트, 성, 나이, 지위 등이 어느 정도 무시된다. 재밌는 것은 브라즈라는 지역에서는 여인들이 작대기를 들고 남자들을 쫓아다니며 공격한다. 또한 '돌야뜨'라는 '신상 흔들기'가 있는데 잘 치장된 신상들 특히 크리슈나 신상을 모셔놓고 흥겨운 봄 노래에 맞춰 그 신상을 흔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해방 축제, 인도 홀리 축제

물감 폭탄으로 흠뻑 젖은 골목
 물감 폭탄으로 흠뻑 젖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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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홀리 축제는 단순히 물감을 뿌리고 뒤집어쓰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억압된 계급과 성,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는 날이기도 하다. 불평등한 카스트 제도에 눌려 있는 농민들, 남존여비로 남성에 짓눌려 사는 힘 없는 여자들, 신의 발아래에 놓여 있는 모든 인간 군상들. 이날은 모든 약자에게 있어서 해방의 날인 셈이다. 홀리 축제 동안 길거리와 동네가 온통 물감 뿌리기로 소란스럽지만 이 야단법석이 끝나게 되면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친구나 선생님, 친지들을 찾아 친목을 도모한다고 한다.

필자의 유년기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우리 동네는 대보름이 돌아오면 온 동네가 풍장 소리로 떠들썩했다. 풍물패들은 집집마다 돌며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지신밟기를 했다. 그러면 집집마다 얼마의 돈을 내놨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성의껏. 그 돈으로 농악기를 사거나  마을 잔치에 필요한 자금으로 모았다.

내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패거리도 축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줄 알았는데 게스트하우스 사람들 말로는 "순전히 돈을 요구하는 거지 떼들"이라고 한다. 게스트하우스나 상가를 돌며 강제로 돈을 뺐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그 횡포가 심해 상가 사람조차 고개를 내저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돈을 요구하는 패거리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돈깨나 만지는 게스트하우스나 부유한 상가 단지를 도는 그들이 단순히 돈만 요구하는 건 아닌 듯싶다. 온갖 저질스러운 쌍욕에 저주를 퍼붓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에게 퍼붓는 저주이기도 할 것이다.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빌어주고, 나누지 않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인도 거지들이 당당하게 적선을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네 정월 대보름날에 액운을 물리치는 달집 태우기를 하듯이 홀리 축제 전날엔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홀리까라는 악마를 태우는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아쉽게도 그 장면은 보지 못했다.

홀리축제에 물감을 묻히고 다니는 외국인들
 홀리축제에 물감을 묻히고 다니는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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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7일. 이른 아침부터 홀리 축제가 시작됐다. 나는 흰옷 한 벌이 전부여서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애당초 접었다. 간혹 기름이 섞여 있는 물감을 뒤집어 썼다간 대책이 없다. 옷 한 벌 달랑 갖고 왔는데 옷을 한 벌 얼른 사든가 덕지덕지한 물감 옷을 입고 다니던가 아니면 팬티 바람으로 다녀야 할 처지였다.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남녀노소랄 것 없이 건물 곳곳에서 물 폭탄을 들고 여지없이 물감 폭탄을 날렸다. 정오로 접어들면서 거리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사람이든 동물이든 온통 물감투성이가 됐다.

나는 옥상 위에서 구경꾼으로 있다가 인천공항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때처럼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찝찝한 날씨. 땀이 목줄기를 타고 내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인도에서 거지처럼 떠돌고 싶다는 패기는 종적을 감추고 고작 기차표에 쩔쩔 매더니 물감 폭탄에 겁먹고 있다. 겉으로는 거침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떠벌리지만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이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이 아닐까.'

우울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려, 어차피 옷 한 벌 사야 되니께, 한번 부딪혀 보자.'

거리로 나서 젊은이들과 한바탕 심하게 어울려보고 싶었다.

'이것저것 따져가며 미리 걱정할 필요가 무엇인가.'

나를 향해 공격해라! 마음 속이 뻥 뚫린 그날

체면 따위에 갇혀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내 자신을 사정없이 망가뜨려 보고 싶었다. 또한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멸시하고 무시해 왔던 나, 그런 나를 사정없이 공격당하게 하고 싶었다. 억압받은 자들의 해방의 날, 홀리 축제의 숨은 뜻이 그렇듯이 그동안 고집불통으로 살아온 나날들을 되짚어 보면 나는 누군가의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괴롭혔던 유년기의 친구들, 그리고 나로 인해 가슴 아팠을 여자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격적 말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살아왔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내려서는데 잔심부름꾼 인도청년이 환하게 웃어가며 갑자기 물감이 잔뜩 묻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 얼굴로 이미 얼굴에 물감을 잔뜩 묻혀 온 일행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온통 물감투성이가 된 골목을 지나는데 어째 물감 폭탄을 날리는 인간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얼굴에 물감을 떡칠하고 헤벌쭉 웃으며 지나치는 외국인들과 몇몇 인도 청년들만 보일 뿐이다.

외국인들과 홀리축제를 즐기고 있는 이준씨
 외국인들과 홀리축제를 즐기고 있는 이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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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총을 발사하는 인도 아저씨
 물총을 발사하는 인도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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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우리 일행이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홀리 축제가 마무리된 상태였다. 작심하고 나섰는데 허전했다. 하지만 물감 폭탄을 뒤집어쓴다 한들 내 안의 묵은 죄의식들이 그리 쉽게 풀어지겠는가. 홀리 축제가 끝난 오후 4시쯤, 맥간으로 떠나는 5시 버스 시간에 맞춰 이준씨의 카톡 친구인 주상씨가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다. 주상씨는 서른두 살, 연극배우 이준씨와 동갑내기였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인도 푸케 대학에서 3년째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인도에서 3년 동안 생활하면서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해 봤다며 열흘 정도의 인도 여행을 작정하고 나섰다 한다. 영어가 유창하고 힌두어 또한 큰 불편 없이 구사하고 있었다. 인도 여행 초보자들인 우리로서는 더없이 좋은 친구가 생긴 것이다.


태그:#홀리축제, #물감폭탄, #해방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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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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