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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무명옷을 입은 사내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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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배자 사내는 어느새 관병들에게 둘러싸였으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우두머리는 무명배자의 자세가 안정되고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술을 익힌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우두머리는 평소 훈련하던 합격(合擊)을 눈짓으로 지시했다.

두 개의 창과 한 개의 검이 세 방향에서 상중하 높이로 동시에 내질렀다. 무명배자는 왼발을 축으로 옆으로 한 발자국 돌리며 중단과 상단을 찌르는 창을 피함과 동시에 등을 활처럼 휘어 상단의 환도도 비꼈다. 그런 다음 자신의 검을 우두머리의 가슴을 향해 내지르자, 우두머리는 황급히 두세 걸음 물러났다.

무명배자는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관병의 향해 높이 솟았다. 관병은 사내가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뛰어오르자 급히 창을 찔렀으나 허공을 가로질렀다. 관병은 창을 거두어 물러서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더니 이내 물줄기 같은 것이 쏴하고 가슴에서 빠져나갔다. 관병은 자신의 몸이 왜 땅을 향해 곤두박질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명배자는 오른쪽에 있는 관병을 해치우자마자 우두머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취했다. 우두머리는 움찔하며 반월궁벽(半月匑壁)의 초식으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전형적인 관가의 초식이다. 이때 남은 관병이 무명배자의 등짝을 향해 창을 찔렀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체를 숙임과 동시에 허리를 틀어 왼손으로 창을 잡고 오른손으로 관병의 복부를 그었다. 관병이 또 하나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에 자신의 수하 둘을 벤 괴한을 보자 우두머리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우두머리는 환도의 칼끝을 중단전 높이로 쳐들고 무명배자의 공격을 기다렸다. 칼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 자는 공포에게 먹혔다. 공포는 동작을 크고 무디게 한다. 공포에 떠는 자만큼 다루기 쉬운 상대도 없다. 무명배자는 느긋하게 검을 세우고 진전살적세(進前殺賊勢)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씩 전진했다. 그럴 때마다 우두머리도 한 발자국 씩 물러섰다. 승부는 정해졌다. 기다리면 될 것이다. 무명배자는 검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두머리가 후퇴를 하다가 길가의 허방을 짚고 크게 흔들렸다. 급히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차압! 하고 기합을 넣으며 무명배자에게 공격을 가했다.

자세가 무너지자 당황한 그는 선제공격으로 상황을 벗어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결정적인 실착을 낳았다. 당황하면서 내지른 공격은 많은 허점을 보이게 마련이다. 무명배자는 검을 살짝 낮췄다가 치켜올리며 우두머리의 일격을 검배(칼등)로 쳐내고는 우두머리의 목을 향해 사선으로 그었다. 우두머리는 검이 튕겨지자마자 목을 움츠리며 상체를 숙였다. 관모 위로 칼바람이 쌩하고 지나갔다.

꼴에 우두머리라고 일초는 피하는군. 무명배자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어 관룡팔식(貫龍八式)의 하나인 제천도성(劑天渡城) 초식을 전개했다. 검날이 구름을 꿰뚫는 용처럼 번쩍거리며 우두머리의 등과 목에 찍혔다. 쓰러진 우두머리의 등에 칼자국이 채로 썬 면발처럼 나있고 목에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틈이 생겼다. 아직 피가 배어나오기 전이라 그런지 허연 속살이 때에 전 목에 유난히 도드라졌다.  

무명배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 만에 시전한 독문무공인 관룡팔식을 노출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남녀는 지금쯤 멀리 갔을 것이다. 그들이 탄 말의 속도라면 빠르면 한 나절 만에 휘주를 벗어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귀찮은 관군의 검색이 없을 것이다. 그는 검날에 묻어 있는 피를 쓰러진 관병의 옷에 문질러 닦아냈다.

자신도 관에서 녹을 먹는 처지이지만 큰일을 위해 관졸쯤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될 때가 있는 법이다. 무명배자는 혹시 있을지 모를 관군의 추가 인원을 기다렸다. 일다경이 지난 후 더 이상 추격이 없다고 생각하자 얼굴을 가린 천을 풀고 무명배자를 벗었다. 암청색 경장의 가슴에 황금색 수실로 수놓은 '금(金)'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자세히 보면 '금' 자를 두 개의 원이 감싸고 있다. 지위가 높다는 표식이다.

시원한 공기가 피부 속으로 파고들자 한바탕 드잡이질로 거칠어진 숨이 가라앉았다. 사내의 가늘고 긴 눈가로 땀방울이 한 줄기 흘렀다. 조복은 손에 쥔 무명천으로 땀을 훔쳤다. 그는 언덕으로 가서 무명배자와 천을 아무렇게나 숲속에 던지고는 나무에 매어둔 말에 올라탔다. 조복은 말의 뱃구레를 힘차게 차고는 남녀가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렸다.

어느덧 개봉에 도착했다. 개봉에서 정주까지는 천리마가 아니더라도 하루면 충분한 거리였다. 멀리 개봉의 성문이 보이자 관조운이 주변을 살폈지만 이상하게도 검문이나 기찰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개봉은 큰 도시답게 성문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우마차와 가마가 뒤섞여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저잣거리의 혼잡함만으로 보자면 금릉 못지않았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반 시진 이상을 지켜보았지만 검문과 검색은커녕 포졸이나 관군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성문 수비 병졸만 성문 주위에서 의례적으로 얼쩡거릴 뿐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혁련지가 관조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가 휘주부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이상하게도 포졸이나 관병이 보이지 않았어요. 박주에서 우리를 놓쳤다면 검색이 더욱 강화될 텐데 오히려 더 조용하잖아요. 혹시 관할권이 미치지 못하는 건가요?  개봉에 오니까 확실히 달라졌어요."

"그래 나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우리에게 내려진 수배령이 해제된 건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관조운도 맞장구쳤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박주를 벗어나자마자 정주로 바로 가지 않고 개봉으로 살짝 방향을 바꾼 것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추적과 기찰에 대비해서이다. 일단 개봉부에 들어가서 복장과 말을 바꾸고 한편으로 관아의 수배를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자신들의 행적이 들키거나 추적되고 있더라도 목적지가 정주라는 걸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개봉의 저자거리에서 추적을 따돌릴 수 있다면 은화사나 무림맹은 그들이 북경으로 간 것인지, 아니면 낙양으로 간 것인지 혹은 장안으로 간 것인지 더욱 헷갈리게 만들 수 있는 곳이다. 교통의 요충지로 볼 때는 정주가 더 다양한 갈래로 길이 뻗어있지만 이곳 개봉에서 행방을 묘연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객잔에 짐을 풀고 식당으로 갔다. 크고 너른 객점으로 간 탓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음식을 나르느라 부산스러웠다. 두 남녀는 조용한 방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전망 좋고 분위기 아늑한 곳으로 모십죠."

어린 점소이가 눈치 빠르게 이층 구석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곳에 오붓이 앉아 있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정주에서 넷째 사숙을 만나 뵈면 과연 모든 의문이 풀릴까?"

관조운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일단 가봐야 알겠지만 스승님이 임종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새겨보면 넷째 사숙에게 어떤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혁련지가 대답했다.

"일단 오늘은 푹 쉬지. 사매. 이곳 개봉은 너무나 넓어 우리들이 쉽게 드러나진 않을 것 같아."
"좋아요."

이때 음식이 들어왔다. 주요리인 부리집소계(府離集燒鷄)가 나왔다. 부리집소계는 본래 휘주 지방에서 유명한 음식였지만 개봉에서도 널리 퍼진 음식이다. 닭고기를 살짝 튀긴 다음 센 불과 약한 불을 교대로 삶아 고기 맛을 부드럽게 하면서도 원형이 변질되지 않는 요리법이다. 며칠 동안 조야한 음식으로 지내다가 기름진 음식을 보니 관조운은 식욕이 동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젓가락질만 했다.

"근데 사형은 왜 아직 결혼을 안 하신 거예요?"

혁련지가 닭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면서 물었다.

"글쎄. 육년 전 가형의 비보를 듣고 나서 비영문을 떠난 후 관가장에 딸린 안팎 일로 바빴다고 해야겠지. 선대부터 내려온 관가장의 봉토와 소작을 갑작스레 횡액을 당하신 형수님께 맡겨 놓을 수 없어서 내가 나서야 했고, 한동안 손을 놓았던 유학도 다시 잡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유지인 청량서원을 세워야 했어.

한마디로 눈코 뜰 새가 없었던 거지. 삼 년 전부터 겨우 숨 돌릴만 했고, 일 년 전부터는 관가장을 벗어나 따로 외채를 마련했어. 아무래도 청상인 형수와 함께 지내는 게 불편해서 나온 거지. 사실 혼담이 들어오고 혼처에 관한 설왕설래가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관가장을 안정시키는 것과 스승님을 찾아뵙는 일, 이 모든 것을 처리하자면 결혼은 아무래도 거치적거리는 장애가 되겠지."

혁련지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관조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지 그 이유에서라면 핑계로선 매우 빈약한 데요? 관가장을 세우는 일이야 집안의 적자로서 당연한 일상이고, 어쩌면 사형보다는 그동안 장원을 관리해 온 형수님이 더 잘 해내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제가 스승님 곁에서 지낼 때 얼핏 듣기로는 계수씨가 여장부라고 하던데요. 그리고 스승님과의 교류는 생활 속에서 언제든지 이어질 수 있는 것 아니예요? 내 생각엔 딴 속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혁련지의 조리 있는 반박에 관조은 가슴이 따끔했다. 몰래 숨겨둔 비밀장소를 들킨 것 같은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제멋대로 그림을 그렸다. 

"제 생각을 얘기해 볼까요. 사형은 강호에 아직 미련이 있어요. 무림인은 결혼을 잘 안하는 편이죠. 자신의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다 무공을 닦는데 가정은 방해가 되기만 하니까요. 그런 이유에서 사형도 결혼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녀가 관조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관조운의 눈빛이 흔들리다 이내 먼 곳을 향했다.

"맞아, 사매. 이젠 무공에서 손 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야. 아직도 붓을 드는 것보단 검을 들고 한바탕 춤을 춰야 못내 마음이 시원해지니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곳 세계의 동경이 남아 있기 때문에 결혼에 관심이 없다고 봐야겠지. 다시 강호에 나갈 수가 있을까 하는 미련이 심중 어딘가에 남아 있어 뱅뱅 맴돌고 있는 것 같아."

"그런 사매는 왜 결혼을 하지 않은 거야?"

이번에는 관조운이 되물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돌림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염방을 꾸려가야 한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지만 저도 한 사내의 아내로 가정에 안주하게는 영 내키지 않아요. 강호를 주유하며 호걸들과 교류하는 세계가 저한테는 훨씬 맞다고나 할까요."

혁련지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식으로 나온 견풍소(見風消 :찹쌀로 만든 면피)의 달큰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있다. 개봉의 음식은 재료의 맛을 살려내는 화북의 요리와 조리를 중시하는 강남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어 맵되 얼얼하지 않고, 짜되 뒤끝이 없는 중용의 맛을 자랑하고 있다. 전조(前朝) 요(遼)와 북송(北宋)의 도읍이었던 시절 천하의 모든 요리가 개봉에 모였다고 했다. 인접한 황하의 물길처럼 개봉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혁련지가 견풍소를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소흥주가 담긴 잔을 입술에 대고 꺾던 관조운의 눈길과 마주쳤다.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창밖의 저자거리엔 개봉의 사람들이 북적대었다. 내일은 정주로 가야한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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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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