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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3월 1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3월 1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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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노나라에 미생이라는 순박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융통성이 전혀 없을 정도로 우직한 미생은 어느 날 다리 밑에서 한 여인을 만나기로 약속해 시간에 맞춰 다리 밑으로 가 여인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약속 시간에 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때마침 비가 와 다리 밑에 물이 불기 시작했는데, 미생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소를 떠나지 않아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기>의 소진열전(蘇秦列傳), 장자(莊子)의 도척편(盜跖篇), 전국책(戰國策)의 연책(燕策), 회남자(淮南子)의 설림훈편(說林訓篇)에 등장한다. 사기의 소진열전에서만 미생(尾生)의 행동을 신의로 해석하고 그 이외는 모두 작은 명분에 집착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예로 등장한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은 일반적으로 답답할 정도로 우직하고 고지식한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그 외 <십팔사략>에 나오는 송양지인(宋襄之仁)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리석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또는 불필요한 인정이나 동정을 베풀다가 오히려 심한 타격을 받는 것"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다시 등장한 '미생'

춘추시대의 미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돌아와 정치인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부터 4년 전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정몽준 의원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던 박근혜 의원에 대해 "미생이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익사했다"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하여 박근혜 의원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었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박 의원은 "세종시 원안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공약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고 밝혔다.

이번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안철수 대표가 미생을 데려와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했다. 안 대표는 지난 3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 박 대통령께서는 미생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4년 전,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서 미생을 들먹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기초단체 무공천'에 대한 견해를 밝히라고 압박한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로 돌아가 보자. 여당과 야당은 물론 유력 대선주자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기초단체 무공천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중앙정치의 간섭을 막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또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기초단체 무공천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김한길·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30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공약이행을 촉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을 시작, 시민들을 직접 만나 무공천의 취지를 알리고 있다. 무공천 방침을 둘러싼 내홍 속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했던 정당공천제 폐지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강조하며 공천제 폐지를 압박하는 대여공세로 방향을 틀었다.
▲ 정당공천제 폐지 압박에 나선 김한길-안철수 김한길·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30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공약이행을 촉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을 시작, 시민들을 직접 만나 무공천의 취지를 알리고 있다. 무공천 방침을 둘러싼 내홍 속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했던 정당공천제 폐지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강조하며 공천제 폐지를 압박하는 대여공세로 방향을 틀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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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누리당은 지금 정당이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서 규정하는 정당주의 국가에 반하며, 정당공천을 안 하면 토호세력의 장기집권 등 여러 문제점이 발생한다며 공약을 철회했다.

반면에 제1야당은 대선공약은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기초단체 무공천을 선언했다. 결국 이번 기초단체 선거에서 여당은 공천, 제1야당은 무공천을 할 수밖에 없다. 자칫 대선공약을 지킨 야당이 손해를 입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당이 이익을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초단체 무공천의 대선공약이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둔한 행동을 한 미생에 비유될 수 있을까?

우선 미생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우둔하고 융통성이 없다. 그러나 기초단체 무공천의 대선공약은 여러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으며 많은 국민이 지지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명백해서 쉽게 지키지 않아도 될 정도의 우둔한 약속으로 치부할 수 없는 내용이다. 또한 우둔한 내용의 약속이었다면 국민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초단체 무공천 대선 공약은 정치개혁의 일환으로까지 논의된 내용이다. 따라서 그만큼 무거운 약속이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 철칙이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회는 신뢰성이 없어서 그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하물며 국정을 이끄는 정치인의 약속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 정치권은 너무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파기해 버리는 불신의 정치를 거듭해 왔다.

약속은 분명한 명분이 있고, 상대방의 이해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 예의 하나가 사정변경(事情變更)이 있는 경우다. 우리 민법에서도 사정변경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고, 그러한 변경이 있으면 계약의 효력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정치인의 약속, 이렇게 가볍다니

그렇다면 사정변경의 원칙은 어떠한 경우에 적용될까? 약속을 할 당시 기초가 된 사정이 그 후 당사자가 예견하지 못하였거나 예견할 수 없었던 중대한 변경이 생겨서, 애초의 약속을 지키면 오히려 심히 부당한 결과가 생길 때, 그 변경된 사정에 맞도록 약속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기득권 내려놓기의 상징이었던 기초공천 폐지 공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대선공약 폐기를 여당의 원내대표께서 대신 사과하시는지요? 충정이십니까? 월권이십니까?"라며 기초공천 폐지에 대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대리사과를 비판하자 최 원내대표는 즉각 "너나 잘해"라고 고함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 최경환, 안철수 향해 "너나 잘해"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기득권 내려놓기의 상징이었던 기초공천 폐지 공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대선공약 폐기를 여당의 원내대표께서 대신 사과하시는지요? 충정이십니까? 월권이십니까?"라며 기초공천 폐지에 대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대리사과를 비판하자 최 원내대표는 즉각 "너나 잘해"라고 고함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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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정변경으로 약속을 바꾸려면 약속 당시 기초가 된 사정이 현저히 바뀌어야 하고, 약속 후에 변경된 사정이 있어야 한다. 또 약속 당시 당사자들이 예견하지 못하였거나 예견할 수 없었던 일이 있어야 하고, 당사자들의 잘못으로 사정이 변경돼서는 아니되는 경우여야 한다. 더불어 약속을 그대로 지키면 오히려 매우 부당한 일이 생길 때, 바로 이럴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이런 사정변경이 전혀 없어도 여러 가지 변명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흔히 하는 변명이 예산이 없고, 재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거나, 공약을 지키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약 당시에는 예산과 위헌 문제가 전혀 없다가 나중에 사정변경이 발생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연히 공약을 할 당시에도 그러한 문제점들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우선 국민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내세우고 본다. 그러다 선거가 끝나면 하나둘 문제점을 들추어내면서 약속을 파기할 구실을 만든다. 제대로 된 반성이나 사과 한마디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다보니 국민들도 정치인의 약속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다. 그러면서도 정치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들면서 적대감을 드러낸다. 결국 정치불신은 정치인의 잘못에 국민들의 적극 협조한 결과물이다. 

기초단체 무공천에 국한해서 이야기하자. 대선 당시만 하더라도 유력 후보들은 모두 기초단체 무공천을 주장했다. 많은 국민도 그러한 주장에 공감했다. 그 공약은 기득권 내려놓기, 정치혁신 차원에서 논의된 사항들이었다.

그러다가 대선 후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하나둘 대선 공약에 이의를 제기하더니 급기야 대선 공약이 잘못되었으니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선 공약 당시와 지금 어떠한 사정의 변화가 있었는가? 유일한 사정변경은 당시에는 선거가 끝나지 않아서 표가 필요했다는 것이고, 지금은 선거가 이미 끝났다는 것 뿐이다.

또다시 지방선거가 목전에 다가왔다. 지난 대선 때의 공약을 쉽게 파기한 마당에 이번에는 또 어떤 공약을 내세워 국민들에게 다가갈까? 공약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약속을 믿고 표를 달라고 말할 것인가? 이번 지방선거가 끝난 후에는 더 이상 춘추시대의 미생이 한국정치에 등장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김정범 기자는 법무법인 민우 변호사이자 한양대 로스쿨 겸임교수입니다.



태그:#미생지신, #정치불신, #대선공약, #공약파기, #기초단체 무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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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변호사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겸임교수(기업법, 세법 등)로 활동하고 있는 김정범입니다. 공정한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함께 더불어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배치되는 비민주적 태도, 패거리, 꼼수를 무척 싫어합니다. 나의 편이라도 잘못된 것은 과감히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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