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물을 들고 다리를 지나던 한 남자가 갑자기 강물에 뛰어든다. 깊숙하고 고요한 물 속. 남자는 그 속에서 과거에 실패로 끝나버린 사랑, 그 사랑이 남긴 흉터와 마주한다. 물속에서라면 상처가 조금은 씻기지 않을까. 남자는 더 깊이 자신의 몸을 물속으로 파묻지만 그럴수록 선명히 떠오르는 옛 기억은 결국 그를 물 밖으로 들어 올린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구해낸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물에 빠졌다고 변명을 한다. 하지만 그가 직접 물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어찌 된 영문일까.

영화 <투 러버스>의 장면 중 하나다. 다짜고짜 강물에 뛰어든 이 남자의 이름은 레오나드(호아킨 피닉스 분)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세탁소의 일을 도우며 살아간다. 취미로 사진을 찍지만 사진작가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 카메라보다 세탁물을 손에 든 그의 모습이 영화 안에 더 잦게 등장하는데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는 파혼을 겪었다. 파혼의 이유는 유전자 검사의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서다. 나중에 둘이 결혼을 해 애를 낳으면 죄다 죽게 된다는 것이 그 몹쓸 유전자 검사의 결과다. 의학기술이 밝혀낸 결과가 둘의 불안한 미래를 점치고 증명한 셈이다. 가장 안정적인 구속이 되어야 할 결혼에 불안이란 그림자를 들여 놓을 수 없어 둘은 강제적으로 파혼당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책장에 놓인 약혼자의 사진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자신이 선택한 파혼이 아니었기에.

파혼 당한 남자에게 다가온 두 명의 여자, 운명은 바뀔까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영화 <투 러버스>에서 레오나드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와 산드라 역을 맡은 비네사 쇼

▲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영화 <투 러버스>에서 레오나드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와 산드라 역을 맡은 비네사 쇼 ⓒ a tempesta films


영화는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이 가엾은 영혼, 레오나드에게 두 명의 여자를 소개한다. 처음 등장하는 여자의 이름은 산드라(비네사 쇼 분). 레오나드는 비즈니스로 묶인 양쪽 부모의 계획된 만남을 통해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래서 둘의 만남은 정략적이며, 응당 결혼이 전제된다. 산드라는 사랑에 적극적인 타입이다. 단 둘 만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면서도 상대의 대답을 닦달하는 법이 없다. 그녀의 매력이라면 사람의 변화를, 사랑의 시작을 기다릴 줄 아는 배려심이다. 어찌 보면 둔하고 미련해 보이지만 그만큼 그녀는 사랑의 바탕을 신뢰라고 믿고 있다. 산드라는 그 자체로 '안정'의 가치를 담보하는 '결혼'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미쉘(기네스 팰트로 분)은 산드라와 정반대다. 레오나드와 그녀의 첫 만남은 돌발적이다. 성질이 난 아버지를 피해 집 밖에서 발을 구르던 그녀는 민망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레오나드에게 인사를 건넨다. 레오나드는 그녀의 곤란한 상황을 눈치 채고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 잠깐 있다 가라고 제안한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레오나드의 태도는 앞서 산드라를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다. 산드라가 그의 집에 찾아온 데는 양쪽 부모의 비즈니스와 친분이란 명분이 있었고, 그로 인한 방문은 레오나드의 의지가 아니었다.

부모의 집에 얹혀산다고 할 수 있는 레오나드는 그저 부모의 결정에 따라 산드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미쉘에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는 레오나드의 행동에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장면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알 수 있다.

미쉘이란 여자를 좀 더 알아보자. 그녀는 감정기복이 심하며 애교를 가장해 어리광을 부릴 줄 안다. 그녀는 레오나드를 만나기 전부터 유부남을 사랑했으면서도 레오나드의 마음을 간 보는 여우같은 여자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레오나드와의 관계를 불분명하게 설정한다. 그녀가 레오나드와의 관계를 애매하게 설정하기 위해 언급하는 단어는 두 가지, '이웃' 그리고 '오빠'다. 그녀는 이 두 단어를 사용해 레오나드의 구애를 차단한다. 그녀는 힘들 때, 심심할 때, 결정적으로 유부남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때 레오나드라는 남자를 이용하지만 그를 자신의 애인으로 두는 것은 꺼리는 영악한 여자다. 유부남이 가정을 깨고 자신에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레오나드 쯤은 가볍게 버릴 수 있는 여자가 바로 미쉘이다.

레오나드의 마음은 누가 보더라도 미쉘에게 기울어 있다. 그렇다고 레오나드가 산드라를 밀어내는 것은 아니다. 이들 관계의 '키'는 레오나드와 미쉘이 쥐고 있고, 이 모든 상황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도 이 둘 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레오나드가 산드라와 미쉘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영화는 흔한 삼각관계, 사각관계 로맨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좀 더 이들의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그 전에 레오나드와 미쉘의 행동의 근거가 될 전제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미성숙한 그리고 유약한 자아가 곧 사건을 만들다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영화 <투 러버스>에서 미쉘 역을 맡은 기네스 팰트로(왼쪽)와 레오나드 역의 호아킨 피닉스.

▲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영화 <투 러버스>에서 미쉘 역을 맡은 기네스 팰트로(왼쪽)와 레오나드 역의 호아킨 피닉스. ⓒ a tempesta films


전제는 레오나드와 미쉘의 자아는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자아와도 같다는 것이다. 먼저 레오나드를 보자. 레오나드는 아버지 명의의 세탁소에서 배달일 등을 돕고 있다. 전문적인 세탁 기술을 배우는 장면이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짐작건대,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운영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의 취미 겸 특기는 사진이지만 이를 두고 그를 사진작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미쉘의 질문에 그는 무엇을 다시 한다면 사진을 배워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제대로 사진을 배워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드는 30대 중반쯤 보이는 외모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어 노쇠한 부모의 등에 업혀 사는 '어른아이'형의 남자인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의 정신적 미성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충동적으로 강물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서는 숨이 턱 끝까지 차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급히 물 밖으로 얼굴을 빼고 살려 달라 소리친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난 그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피한다.

이런 레오나드의 모습은 데이빗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데이빗은 산드라의 동생이다. 산드라의 가족이 레오나드 가족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에서 데이빗은 다짜고짜 화장실을 찾는다. 레오나드의 아버지가 화장실을 알려주며 마술사 흉내를 내더니 작은 사탕 하나를 선물한다. 데이빗은 사탕을 받고 곧장 화장실을 간다. 데이빗의 아버지가 데이빗에게 "고맙다고 해야지!"하고 다그치지만 데이빗은 대꾸도 않고 화장실을 향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식사 장면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레오나드와 데이빗을 나란히 앉힌다. 둘 사이의 대화는 데이빗의 정신연령에 맞춰져 있다. 이 장면이 레오나드가 데이빗처럼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미쉘의 자아는 유약한 것이 문제다. 그녀의 유약한 정신 상태는 그녀가 취하는 것들로 대변된다. 마약, 춤, 애완견, 유부남 그리고 레오나드. 그녀는 자신의 유약한 정신을 보완해 줄 사람, 물건, 가치 등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그녀가 바라는 사랑은 자신의 결여를 채워줄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다. 자유롭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총각 레오나드보다 구속돼있지만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시각에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다. 레오나드가 그녀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은 그녀의 결여를 채워줄 수 있는 남자라는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두 남녀를 통해 바라본 내 자아의 모습, "부끄러웠다"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1월 23일 개봉한 영화 <투 러버스>의 한 장면 ⓒ a tempesta film


영화는 결국 사랑에 실패할까 두려운 남자 레오나드와 여자 미쉘의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인간은 한 차례의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면 '위험' 보다는 '안정'을 선택하게 된다는 씁쓸한 진실이 레오나드와 미쉘의 마지막 선택에 담겨 있다. 레오나드의 성인식은 데이빗의 성인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미쉘이 치른 성인식은 자기 뱃속에 있던 유부남의 아기를 유산한 경험일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그들의 마지막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레오나드와 미쉘은 그것이 자의의든, 타의의든 간에 위험한 사랑보다는 안정감을 택했다.

공간과 색감을 달리해 산드라와 미쉘을 대비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레오나드와 산드라의 만남은 지붕이 있는 실내에서 이뤄지지만, 레오나드와 미쉘이 만나는 공간은 옥상을 비롯해 야외인 곳이 많다. 산드라가 등장하는 장면은 따뜻한 색감이 도는 데 반해 미쉘이 등장하는 장면의 색감은 차갑고 스산하다. 특히 레오나드와 미쉘이 옥상에서 만나는 장면에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맴도는데, 이러한 색감이 아마도 이 둘의 위태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란 동물은 본래 스스로를 보호하고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즉,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도 이런 본성은 예외가 없다. 상대보다 자신이 받을 상처가 두려워 이를 봉합할 구실을 먼저 찾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레오나드와 미쉘의 마지막 선택을 보고 그들을 마냥 탓할 수 없는 이유, 마치 스크린이 내 앞에 놓인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아닐까. 마지막 컷,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과 눈을 맞추는 레오나드를 나는 순간적으로 피해버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투 러버스 기네스 팰트로 호아킨 피닉스 비네사 쇼 제임스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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