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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체험 '-1'일째. 최후의 만찬 양념통닭.
 채식체험 '-1'일째. 최후의 만찬 양념통닭.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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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보트피플 같아요."

지난 17일 오후 우리 부서 '간식타임'. 설탕 잔뜩 묻은 단팥 도넛을 입에 우겨넣고 있는 나를 보고 동료가 한 말이다. 동료들과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으면 맨 마지막에 도시락 뚜껑을 닫는 사람은 십중팔구 나다. 그렇게 음식 천천히 먹기로 유명한 내가 어째서 지금은 '난민'급 섭식속도를 자랑하게 됐을까.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 채식 체험이란 걸 했다. 내게는 지병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과민성대장증후군. 새해 들면서 올해는 이 지긋지긋한 녀석과 이별해야 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장 내 유해균이 좋아한다는 동물성 지방을 확 줄이기 위해서 채식을 해볼까 잠깐 '생각만' 했다. 33년 동안 육식으로 가꿔온(?)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 두려워서 차마 실천하지는 못하고.

그러던 차에 새해를 맞아 '작심삼일 체험기'를 기획해보자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서 내가 "예를 들어 나같이 고기 좋아하는 사람이 채식을 해본다든지" 하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그래 그럼 네가 일주일 채식 해보고 글 하나 쓰면 되겠네." 그렇게 '육식 인간'의 채식 체험은 시작됐다.

14일 저녁, 최후의 만찬과 함께 비장하게 '채식 전야'를 맞았다. 메뉴는 양념통닭. 앞으로 168시간 동안 소, 돼지, 닭, 오리, 양, 말, 꿩 등 '다리 달린 동물'의 고기는 먹지 못한다. 통닭을 먹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그리고 머리로는 이 맛을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달걀이나 생선은 먹을 수 있으니 별로 힘들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울함과 작은 희망, 서글픔과 비장함이 뒤섞인 밤이었다.

첫째 날 점심은 집에서 싸간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반찬은 어묵볶음과 콩자반, 무말랭이. 허전했다. 마치 이종범이 빠진 타이거즈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은 온통 '이제 고기를 못 먹는다'는 생각이 점령하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집중이 안 되고 마음은 공허했다.

둘째 날인 16일 점심,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그날은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식당에서 밥을 사먹자니,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메뉴 선택이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아 그냥 혼자 먹기로 했다. 회사 건물 지하 푸드코트 메뉴판 앞에 서서, 나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이 됐다. 저 많은 음식 가운데, 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감자만두 집어들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채식체험 2일째. 문제의 감자만두.
 채식체험 2일째. 문제의 감자만두.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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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물어봐야지. "아직도 '순복음교회' 간판이 '순대볶음'으로 보인다"면서도 무려 2년째 채식을 하고 있는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추천메뉴는 분식세트. 그런데 분식세트 종류가 둘이다. '떡볶이+어묵+충무김밥'으로 구성된 A세트와 충무김밥 대신 감자만두가 들어간 B세트. 나는 '만두광'이다. 순간 '김밥보단 만두지. 감자로 만든 만두니까 괜찮네' 하고 생각했다. 바로 B세트를 주문했다.

한 쟁반 가득 음식이 나온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감자만두. 아무리 봐도 감자로'만' 만든 만두 같지는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살며시 깨문 순간, 알았다. 감자만두는 만두피를 감자로 만든, 안에는 고기를 넣은 만두라는 사실을! 이미 내 목구멍으로 만두 반 개가 넘어갔다. 젓가락에 들려 있는 나머지 절반. 채식을 위해 이걸 버릴 것인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그냥 먹을 것인가! 고민 끝에 정신을 차려보니, 남은 만두 반 개 역시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내 이성은 욕망 앞에 무릎 꿇었다.

더 이상은 무너지지 말자고, 접시 위에 만두 네 개를 남겨두고 떡볶이와 어묵만 먹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다른 부서 선배들이 점심을 먹으러 왔다. 오호라! 그들에게 만두를 하나씩 선물했다. 채식에 실패했지만 음식물 쓰레기 배출은 막았다는 엉뚱한 위안을 느끼며, 점심식사를 마쳤다.

'감자만두사건' 이후로 음식에 대한 경계심이 확 높아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을까 무조건 의심해야 했다. 예를 들면 냉면에는 고기가 없지만 육수를 고기를 만들기 때문에 고기로 만든 음식이라 봐야 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채식, 공부할 게 많아졌다.

'보트피플' 소리를 들은 셋째 날.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걱정만큼 많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끊임없이 먹고 싶다는 식탐이 들끓었다. 배는 부르지만 입은 뭔가를 늘 원하는 상태. 마치 냉장고처럼 위장 속에 채소 칸과 고기 칸이 나눠져 있어서, 채소 칸은 차고 넘치는데 고기 칸은 텅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채우려고 과자나 빵, 커피 같은 걸 시도 때도 없이 찾게 됐다.

앞서 분식세트를 추천해준 '순대볶음' 채식 동료한테 이런 하소연을 했더니,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고깃집에 회식 가서, 눈앞에서 고기가 구워지는 걸 한번 봐야 진짜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 있지"라고 핀잔을 준다. 아, 그렇다. 채식 체험 기간 안에 예정된 회식은 없었다. 최악의 시련을 피할 수 있겠다 마음 놓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넷째 날 최고의 위기가 찾아왔다.

고깃집 앞에서 맡은 '천국의 향수'

채식체험 4일째. 시련의 돼지갈비.
 채식체험 4일째. 시련의 돼지갈비.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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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토요일 저녁. 처이모님들이 처가에 다니러 오셨다. 처가는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장모님이 부르셨는데, 미리 잡아둔 장소가 바로 돼지갈비로 유명한 고깃집! 당황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하지만 "저 지금 고기 못 먹는데 다른 거 드시죠" 할 수는 없었다. 그래, 피할 수 없는 시련이라면 이 기회에 내 의지를 시험해보는 거다. 아무 소리 없이 고깃집으로 차를 몰았다.

고깃집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 문을 여는 순간, 천국의 향수 같은 돼지갈비 냄새가 확 끼쳤다. 안 된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들어가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는 공깃밥과 된장찌개부터 시켰다. 반찬으로 나온 김치, 양념게장, 샐러드 따위로 불판과 나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익어가는 고기를 보지 않고 오직 시선을 밥과 된장찌개, 김치와 샐러드 사이로만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나를 넘어섰다.

고기를 안 먹는다고 살이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을 같이 하거나, 간식을 같이 참을 수 있어야만 했다. 한동안 집에서 먹지 않던 과자까지 사두고 저녁에 막 먹어댔으니, 살이 더 찌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지병인 과민성대장증후군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결과는 '아무 영향 없음'이다. 고기를 끊는 대신 고기만큼 나쁜 분식과 야식을 먹고 안 하던 군것질까지 했으니 결국 '본전'일 뿐이었다.

21일로 채식 체험이 끝나고, 22일은 휴가를 냈다. 점심 때 뷔페가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뷔페의 고기 음식을 '대토벌' 하고, 추가로 스테이크까지 시켰다. 마음속으로 행복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격스럽게 고기를 씹었는데, 이상했다. 왜 이 정도밖에 기쁘지 않은 걸까. 그날 저녁에도 닭강정을 먹었다. 일주일간 쌓인 그리움은 자석에 이끌리듯 고기를 찾게 했지만, 막상 입 안에 넣어보면 기대보다 맛있지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어쩔 수 없이' 채식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됐다. 고기 맛을 좋게 하기 위해 돌아눕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갇혀 사는 송아지 사진이 생각났다. 스트레스 속에 사육된 동물의 고기를 먹은 인간이 건강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는 말도 떠올랐고, 고기를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은 있어도 고기를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은 없다는 말도 생각났다. '육식인간'으로서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알아버린 걸까? 입으로는 고기의 맛을 반가워하면서도 머리로는 '이거 먹어서 좋을 게 없는데'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체험이 아니라 생활로 채식을 하는 것은 여전히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 다만 열흘씩 보름씩 시간을 늘려가며 이런 체험을 더 해보고 나면, 조금씩 자신이 생길 것 같기는 하다. 아울러 다른 주제를 정해서 체험을 계속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늦잠 안 자기, 운동하기, 책 읽기 같은 걸로 번번이 주제를 달리하며 일주일씩 해보는 거다. 게을러지는 나 자신과 맞선다는 뿌듯함도 있고, 단조로운 일상에 흥미로운 목표가 생긴다는 것도 좋다. 다음 체험 주제는 무엇으로 할까? 일단 '먹는 거 참기'는 빼고 생각하자, 어흑.

채식체험이 끝나고 난 다음 날. 점심은 닭고기 스테이크와 뷔페.
 채식체험이 끝나고 난 다음 날. 점심은 닭고기 스테이크와 뷔페.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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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채식, #육식, #고기, #페스코,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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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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