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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기금이 공식 출범한 지난 2013년 3월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국자산관리공사 국민행복기금 창구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 국민행복기금 상담 받는 시민들 국민행복기금이 공식 출범한 지난 2013년 3월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국자산관리공사 국민행복기금 창구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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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 '점령하라(Occupy)' 운동에 이어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라는 운동이 일어 세계가 놀라고 있다. 채무자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게 이 운동의 핵심이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대신 갚아줄까?

간단하다. 연체가 길어지면 은행이나 제도 금융회사들은 그 연체 채권을 갖고 있지 않는다. 2차 시장에서 헐값에 팔아 버린다. '롤링 주빌리' 운동을 하는 미국의 유명 시민단체 '월가를 점령하라(OWS. Occupy Wall Street)'의 한 회원은 "빚 1달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단 2센트만 지불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부실 채권을 헐값에 사들이는 돈은 시민 모금으로 마련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국민행복기금 등 세금으로 채무자 빚을 대신 갚아준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국민행복기금도 미국의 롤링 주빌리 운동의 원리와 같다. 1000만 원짜리 채권을 국민행복기금에서 헐값에 산 뒤 채무를 조정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실이 낸 작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말까지 국민행복기금이 매입한 채권의 가격은 애초 채권 가격의 평균 3.72%였다. 즉 1000만 원짜리 채권을 37만2000원에 샀다는 이야기다. 이것도 국민행복기금이 시장가격보다 비싸게 산 가격이다. 그만큼 부실 채권 시장에서 오래된 연체 채권은 말 그대로 헐값에 거래된다.

이렇게 채권을 헐값에 매입해, 빚의 절반을 면책해 주고 나머지 절반을 10년에 걸쳐 돌려받는 게 국민행복기금의 운영 원리이다. 즉, 1000만 원 채권을 37만2000원에 사 500만 원을 돌려받는 셈이다.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10년에 동안 463만 원의 수익이 발생하는 프로그램이다.

국민행복기금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이렇게 부실 채권을 저가에 매입해 빚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생긴 이익분으로 설계된 프로그램이다. 한마디로, 세금이 투입된 프로그램이 아니다.

월 소득 40만원... 빚 상환 가능할까?

은행연합회 회장이 이사장이고, 주요 주주가 금융권 인사로 구성된 '주식회사 국민행복기금'은 사실상 부실 채권 시장에서 돈벌이로 운영된다. 약 37만 원에서 사서 최대 700만 원까지 되돌려 받을 수 있으니, 이만한 장사가 또 있을까?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다. 국민행복기금 대상자의 평균 소득은 월 40만 원에 불과하다. 지난해 10월까지 국민행복기금 신청자들의 1인당 연 평균소득은 484.1만 원이었다. 연 소득 2000만 원 미만자가 전체 이용자의 83.1%였다. 평균 채무 금액은 1146만 원, 연체 기간은 평균 6년이었다.

6년간이나 1000여만 원의 채무를 감당 못해 지속적으로 연체해온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국민행복기금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동안 빚 독촉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이런 사정 탓에 야당과 시민사회 단체는 "채무자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더니, 오히려 절대적인 저소득 계층의 빚을 절반이라도 되돌려 받겠다는 채무 독촉 프로그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에서는 반박 보도자료를 냈다. 금융위는 "국민행복기금은 상환 능력이 낮은 장기 연체 채무자에 대해 갚을 수 있는 범위 내로 채무를 감면해 주고 감면된 금액을 성실히 상환해 경제적 재기를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다. 

단, 금융위는 자신들이 발표한 국민행복기금 이용자들의 재무 상태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추상적인 표현으로 "채무를 감면" "경제적 재기를 돕는" 이라고 표현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금융위의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월 40만 원을 버는 채무자에게 빚 1100만 원을 10년간 매월 4만7000원씩 계속 갚도록 하겠다."

게다가 국민행복기금의 이용 및 상환에 대한 안내를 채권 추심회사에 위탁해 상환 불이행에 대해서도 꼼꼼한 대응책을 마련해 놓았다. 금융위는 시민사회 단체들의 비판에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빚을 깎아 주었다. 채무자가 탈락하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금융위 공무원들은 매월 40만 원으로 생활이 가능한가? 월 40만 원을 벌더라도 빚은 꼭 갚으라고 정부가 강요하는 건 정상인가?

이에 대해서도 금융위는 국민행복기금의 채무조정도 상환이 곤란한 채무자는 개인회생, 파산 등의 공적 채무조정 제도로 안내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극대화된다. 월소득 40만 원인 사람 모두가 채무 상환이 곤란한 채무자 아닌가?

2013년 3월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열린 국민행복기금 출범식에서 정홍원 국무총리와 신제윤 금융위원장, 박병원 국민행복기금 이사장이 국민행복기금 신용지원 협약서에 서명한 주요 금융협회장 등과 함께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3년 3월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열린 국민행복기금 출범식에서 정홍원 국무총리와 신제윤 금융위원장, 박병원 국민행복기금 이사장이 국민행복기금 신용지원 협약서에 서명한 주요 금융협회장 등과 함께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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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40만 원이면 1인가구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국민행복기금 신청자 중에 40~50대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은 1인가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람들에게 빚의 절반이라도 받겠다는 태도가 잔인하지 않다면, 도대체 뭐가 잔인한 걸까? 금융위 논리대로라면, 국민행복기금 신청자 거의 대부분에게 개인회생과 파산 등의 공적 채무조정절차를 안내했어야 옳다.

채무자 돕겠다던 공약이 금융기관 돈벌이로

미국의 채무 타파 운동 단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함께 무작위로 채무자를 해방 시킬 수 있다. 상호지원, 선의, 집단적인 거부 운동을 통해."

물론 우리나라는 그동안 언론을 통한 금융기관들의 집요한 '사상 교육' 탓에 빚을 갚지 않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좀 더 품위있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소득자에게 밥 굶더라도 빚은 갚으라고 강요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연체를 하면 비인간적인 빚독촉에 내몰리는데, 알고 봤더니 그 연체 채권을 금융기관들끼리 헐값에 사고 팔면서 채무자에게는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상황 아닌가.

저소득층에게도 무분별하게 카드를 발급해 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빌려 준다고 아우성이더니, 이제는 그 빚으로 추악한 장사도 서슴지 않는 한국 사회다.

금융기관들이 연체 채권을 부실채권 시장에 헐값에 팔지 않고 채무자의 재정 상태에 맞춰 채무를 조정해 줄 수는 없었을까? 부실채권 시장에 직접 참여해 채무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던 박근혜 대통령 공약 1호는 어디로 갔을까?

민주당 강기정 의원실에 따르면, 국민행복기금 사업으로 은행 등 금융기관이 2018년까지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수익은 총 9000억 원이다. 물론 '주식회사 국민행복기금'은 9000억 원이라는 수익을 고스란히 금융기관에 배당할 계획이다.

채무자를 돕겠다던 박 대통령의 공약은 이런 식으로 과거 노예문서처럼, 채무자를 쥐어짜는 프로그램으로 전락했다.


태그:#국민행복기금, #롤링 쥬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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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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