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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소년 특별면 '너아니'에 실렸습니다. [편집자말]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 왕궁의 음탕 대신에/5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는가/옹졸하게 분개하고/옹졸하게 욕을하고/(…)/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정말 얼만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中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입니다. 몇 달 전, 아마 2월 즈음 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느때와 같이 수험 대비 문제집을 풀던 도중 위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처음 접한다는 이유로 문학 작품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작품을 보는 일이야 수험생에게는 일상 다반사니까요. 위의 시를 읽던 당시의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저 내용이나 표현이 상당히 인상 깊은 작품이네, 라는 생각으로 넘겼을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그 작품을 지금 와서 다시금 끌어 내어 여러분들께 보여드리는 이유는, 글의 서두에 쓰게 된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제게 이 작품 만큼 울림을 주는 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단 몇 달만에 저의 인식이 왜 이렇게 달라졌느냐고요? 그 몇 달간 우리 국민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입에 올리기도 안타까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 - 그것이 계기였습니다. 아니, 보다 제대로 말하자면 그 이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 반응에서의 '하나의 큰 차이' 가 이 시를 복기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참사에 대한 진심 어린 애도 -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인 반응이었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입장(혹은 주장)이 서서히 표면화 되더니, 현재 일부 극심한 대립을 빗고 있기까지 합니다. 하나는 사태를 해결하는 데 '세월호 참사' 그 자체에만 주목하는 입장입니다. 즉,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인 인과관계 내에 있는 이들(가령 미디어를 통해 수차례 보도된 구원파, 청해진사 등)에 대해 한정해 책임을 묻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넘어선 이 참사에 대한 '본질적 해결' 을 요구합니다. 즉, 참사가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국가적, 사회적 원인을 추적하고 이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참사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대형사고로만 생각했던 문제 뒤에 얼마나 많은 정,관, 재계의 문제들이 얽혀 왔는지가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장기적으로 안전사회를 구축하려면 후자가 타당해 보이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존 특권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전자의 주장을 말하며 하나로 뭉쳐 후자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시민사회에 정치적 함의를, 다시금 '빨갱이 프레임' 을 뒤집어 씌우려 하고 있는 데에서,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표면화하고 실질화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저는 안타까움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기억속에 밀폐되어있던 김수영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게 된 이유입니다.

이 글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책,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도 김수영 시인의 시와 같은 맥락에서 제 뇌리에 스치게 된 작품입니다. 중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접해 읽게 된 이 책은, 처음 위의 시를 접했을 때 그저 좋네, 라는 생각만 하고 넘겼듯 처음 읽을 당시에는 제게 하나의 재미있는 미국의 현대사의 단면 속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의 현재 - 저는 지금 이 책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제목에서.

하워드 진, 그 실천적 양심

<미국 민중사> 등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하워드 진은 노암 촘스키 등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다. 유진 뎁스 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하워드 진 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미국 민중사> 등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하워드 진은 노암 촘스키 등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다. 유진 뎁스 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조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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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하워드 진은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대표로 불리는 인물이며,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인종차별이 '상식' 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를 전후로 그가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투쟁해 온 미국 현대사의 중요한 단면을 기록한 책입니다.

단순히 '좋은 일자리'를 위해 50년대 중반 남부로 향한 것을 계기로 흑인 계층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그는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미국 사회에서 인종적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분투해 왔습니다. 이 열정의 기록은, '정의로운 사회' 를 꿈꾸는 뜨거운 가슴과 이를 말로만 끝내지 않고 실제로 일구어내 후손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한 '지속적인 실천' 의 더 큰 뜨거움을 아무런 미사여구 없이도 읽는 이들에게 확실히 깨닫게 해 줍니다.

"미래는 현재들의 무한한 연속이다.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현재를 산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승리가 될 수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추상적인 울림이자 많고 많은 '명언 중 하나'로만 인식될 뿐이었던 이 글은 책을 읽은 뒤에는 그를 바탕으로 제가 살아가는 '현실' 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실천으로의 울림, 그것이 바로 본 도서가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중하게 여겨지는 이유일 것이며 하워드 진의 실천적 양심과 그 역사를 잘 드러내 보이는 증거일 것입니다.

게다가 온 삶을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살아온 이가 던지는 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즉 불의를 보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 불의를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외침은 더욱 더 아픈 가시가 되어 현대인들이 오랜 시간 등한시 해온 사회적 양심의 존재를 사정없이 찔러올 것입니다.

이 땅에서, 정적인 민주주의를 넘어서

그렇다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행동을 촉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정적인 민주주의' 에 대한 타파가 그것이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땅의 민중은 오랜 세월 '지도자' 라는 이들의 말에 너무나 잘 순응해 온 존재였습니다. 수차례의 전란과 오랜 생활고 속에서도 우리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인줄 알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착한' 신민들이었을 뿐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제도가 정착된 이후는 어떨까요? 분명 현실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도계급의 권위주의와 책임회피, 이를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청산되었다거나 개혁되었다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듯 합니다. 그들은 명령하고 - 우리는 때로는 아무런 반응 없이, 때로는 크고 약한 저항을 수반하면서 - 결국은 순응하게 되는, 그런 역사가 명백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민주적'으로 선출된 문민정부 이후로도 계속.

'정적인 민주주의'. 저는 이러한 한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라고 말하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정치인도, 집권 정당도 수도 없이 바뀌었고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 참여도 꾸준히 늘어왔습니다만, 위에도 언급했듯이 그러한 변화가 실제 정치가 운영되는 과정에의 반영은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져 왔나요? 강고한 사회구조는 여러차례의 '위기(그들 입장에서의)' 속에서도 그 존재 자체를 국민들로부터 숨겨오지 않았나요? 그러한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 라는 것이 저는 하워드 진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에서의 '가만히 있어라' 라는 말. 국민들은 알게 모르게 꾸준히 들어왔으나, 이제는 드러나기 시작한 시민과 국가체계의 현실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언급했듯이 혹자는 단순한 하나의 사태로부터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국민적 움직임을 끌어내는 것을 정치적 선동으로 비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드러나는 참사 뒤에 숨겨진 수없이 많은 정,관,재계의 문제점들은 다수의 시민들에게 그러한 말들이 실질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짐을 드러내고 있고, 보다 많은 국민들이 사태 자체의 온전한 수습 뿐 아니라, 이를 넘어 이를 토대로 새로운 '무엇인가' 가 이루어져야 함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달리는 기차, 그 위에 중립은 없기에

 하워드 진은 정치적으로는 신좌파(New Left)계열로 분류된다. 1922~2010.
ⓒ 조우인
92년도 당시 하워드 진은 그의 또다른 역작 <미국 민중사>의 출간 기념 강연을 위해 컬래머주에 방문했는데, 그 때 한 청중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우울한 뉴스들을 생각한다면, 선생님은 놀라울 만치 낙관적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선생님한테 희망을 주는 겁니까?"

그는 당시에 청중에게 해 주었던 말을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다며 답변을 들려줍니다.

"그와 다른 참석자들이 보기에 나는 폭력적이고 불의로 가득 찬 세계를 엉뚱하게도 유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흔히 낭만적인 이상주의나 안이한 낙관적 사고라고 경멸받는 태도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러한 희망을 실현시키고 이상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행동을 자극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중략)…

인간은 폭넓은 스펙트럼의 특질을 보여주지만, 보통 이 중 최악의 것만 강조되며 그 결과 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낙담하고 용기를 잃게 된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건대, 용기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정의를 위한 이러한 싸움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바로 인간이다. 잠시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에도 남들과는 달리 아무리 작은 일이자만 무언가를 행하는 인간이다. 또 영웅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작은 행위라도 불쏘시개 더미에 더해지면 어떤 놀라운 상황에 의해 점화되어 폭풍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생략)…."

결국 역사는 참여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에는 늘 시민이 역사의 주역으로 참여했을 때였습니다. 행하지 않는 이상 주어지는 것은 없고, 행하지 않는 이는 행위의 반대편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행동하는 순간, 바뀐다. 그러한 그의 낙관적인,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인 신념이 이 땅의 보다 많은 이들에게 퍼지기를 바라며, 저 역시 스스로를 다시금 돌아보며, 글을 마칩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개정판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이후(2016)


태그:#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미국 민중사, #독후감,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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