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몇 년 전 MBC에서 방송했던 다큐 프로그램 한 편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당시 프로그램의 주제는 '소문', 즉 '말'의 확산이었다. 프로그램에서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소개했었다.

실험의 내용은 심리학 강의를 듣기 위해 스튜디오에 모인 100명의 방청객을 대상으로 강의 도중 한 방청객에게 두 가지 소문을 알려주고, 그 소문들이 얼마큼의 파급력을 갖고 전파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실험에 쓰인 두 가지 소문은 '어느 연예인이 자살했다'는 내용의 부정적인 소문과 '어느 연예인이 입양했다'는 내용의 긍정적인 소문이었다.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20대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자살했다'는 소문은 모집된 인원 100명 중 81명이 듣고, 86명이 소문을 전했다. 반면 '입양했다'는 소문은 18명이 듣고, 그 중 4명만이 소문을 전했다.

부정적인 소문이 긍정적인 소문보다 더 넓고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것이 실험 결과를 통해  증명됐다. 더구나 이 소문은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살이 붙고, 와전 되면서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는 지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해당 실험은 '말'이란 생물과도 같아 유통과정에서 변질되기 쉽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초고속 소문 전파의 시대...'말조심'하라는 영화 <소녀>

<소녀> 영화의 두 주인공 윤수(김시후 분)와 해원(김윤혜 분).

▲ <소녀> 영화의 두 주인공 윤수(김시후 분)와 해원(김윤혜 분). ⓒ 영화사 꽃


마찬가지로 영화 <소녀>도 '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발 없는 '말'이 사람의 귀와 입을 통해 어떻게 무서운 '흉기'로 변하는지, 그리고 그 흉기가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가 영화가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이다. 한 마디로 '말을 조심하라!'는 교훈 설파가 이 영화의 목적인 셈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정, 학교, 더 나아가 사회에서까지 '말조심 하라'는 얘기를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듣는다. 이만하면 충분히 교육됐다 싶은데, 지금 영화가 다시 이 잔소리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골마을'에서 그 의도를 찾을 수 있겠다.

영화는 일부러 가장 아날로그적인 느낌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설정해 소문의 전파력이 '초고속, 초광역'인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역설적으로 꼬집는 느낌이다.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사람 사이가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도 그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뱉어진 말이 곡해되어 한 사람을 생매장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가시화하면서 현재는 이보다 더 심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더구나 현재는 사람의 귀와 입뿐만 아니라 가상의 '웹'과 보이지 않는 '망'이 무형의 말을 전하는 통로가 되고 있는 세상이다. 실수로 뱉은 말을 주워 담기는 불가항력처럼 느껴지고, 살이 붙어 부유하는 말은 누군가에게 '살의'를 띤 말로 변하기도 한다. 영화 속 소녀에게도 그 '말'이란 것이 그랬을 것이다.

친구가 자신이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결국 자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윤수(김시후 분)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골로 전학을 온다. 모든 것이 낯선 마을에서 윤수가 제일 처음 본 것은 얼어있는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름다운 소녀 해원(김윤혜 분)이다. 학교에서 해원을 다시 만난 윤수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진 그녀에게 계속 관심이 가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녀를 멀리한다.

이유를 알아보니 그녀를 둘러싼 소문 때문이란다. 그녀를 둘러싼 소문의 내용은 '그녀는 신기가 있어 무서운 소리를 하고 다닌다', '여러 남자와 뒹굴 정도로 헤프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아버지와 같이 잠을 잔다' 등등, 입에 담기 어려운 해괴한 이야기들뿐이다.

그러나 윤수는 소문을 믿지 않는다. 해원을 좋아하는 마음도 있어 그녀에게 새 스케이트도 선물한다. 둘은 그렇게 가까워진다. 그런데 해원의 아빠가 죽던 날 밤 이후로 윤수의 마음이 동요한다. 그날 밤, 해원의 집에서 무언가를 본 윤수. 윤수도 결국 해원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미스터리한 영화의 긴장감 이끌어가는 이미지의 힘

영화는 이야기를 무섭고 날카롭게 전달하는 데 반해 장면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채운다. 마치 '말'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날카롭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말의 두 얼굴은 영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윤수와 해원이 사랑을 나눌 때에 말은 달콤하고 그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지만,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말들은 날카로운 흉기와 같고, 그 바탕에는 진실이 없다.

시종일관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영화는 그 분위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물음표를 남겨두지만, 몇 부분에서의 지나친 생략과 단절은 이야기의 개연성을 해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해원의 아빠가 죽던 날 밤, 윤수가 해원의 집에서 본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해원의 아빠가 죽으면서 한 쪽 팔이 잘린 이유는 무엇인지 등은 윤수의 심경 변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사실 관계가 의도적으로 결여되어 있어 영화의 흐름이 툭툭 끊긴다. 내용이 성기게 연결되어있다는 인상마저도 준다.

구제역 파동으로 아무 죄 없이 생매장을 당하는 돼지와 뜬소문과 오해로 생매장 위기에 놓인 소녀를 연관시켜 표현한 것은 좋았지만, 이러한 비유를 소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드러낸 부분은 꼭 감독의 생색내기인 것만 같아 아쉽다. 영화적 설정이 지닌 함의를 읽는 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인데 이러한 부분을 감독의 노파심이 앗아갔다.

영화는 이야기보다 이미지를 많이 남긴다. 빛과 어둠, 하얀 눈과 그 위에 붉은 피, 신비로운 소녀의 눈빛과 설익은 광기를 머금은 소년의 눈빛 등은 극명한 대비를 일으키며 미스터리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결말부의 사건을 터뜨리기 전까지 영화가 긴장감을 잘 이끌고 있는 데에는 이야기보다 이미지의 힘이 크다.

감독의 의도가 담긴 장면을 찾아보는 것도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다. 윤수가 해원에 대한 소문을 믿지 않을 때, 둘이 만나는 곳은 빙판으로 변한 호수지만, 윤수가 해원을 의심하며 해원을 피할 때 둘이 다시 마주치는 곳은 학교 건물 사이의 골목이다. 학교 벽면에는 수많은 낙서가 적혀있고, 해원은 그 벽에 기대어 윤수와 이야기한다. 이는 수많은 소문에 둘러싸여 있는 해원을 나타낸다.

<소녀> 낙서가 가득한 벽에 기대어 있는 해원(김윤혜 분)은 소문에 둘러싸인 소녀의 상황을 의미한다.

▲ <소녀> 낙서가 가득한 벽에 기대어 있는 해원(김윤혜 분)은 소문에 둘러싸인 소녀의 상황을 의미한다. ⓒ 영화사 꽃


또, 아빠를 죽인 용의자로 해원이 지목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윤수가 학교 정문을 빠져나갔을 때 현수막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현수막에는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말로 가꾸어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영화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엔딩곡은 가수 어른아이의 'sad thing'이란 노래인데, 이는 마치 어른이 되지 못한 해원과 윤수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선곡한 느낌이다.

이외에도 영화는 곳곳에 의도와 상징을 숨겨놓았다. 해원이 해괴한 소문으로부터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는 호수의 빙판, 그리고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낡은 스케이트와 윤수가 해원에게 선물한 새 스케이트. 소문의 진실은 덮이고, 오해는 불어나는 배경으로 활용되는 어둠, 그 어둠의 극 개기월식 등. 영화는 작은 설정 하나도 허투루 버리는 법 없이 꼼꼼하게 채색했다.

인물의 심경 변화와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이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미스터리 영화에서 끝까지 분위기를 고집한 연출은 다소 아쉽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고집이 이 영화가 어떤 영화라는 인상은 확실히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는 긴 여운은 결국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을 밝혀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소녀 김윤혜 김시후 최진성 소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방송/공연에 대한 글을 주로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