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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에 벌어진 "6·25 한국전쟁=북침" 논란이 결코 한때의 해프닝이 아님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과거 역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라고나 할까. 그후로 펼쳐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첫 포문은 박근혜 대통령이 열었다. 박 대통령은 설계가 부실한 질문지와 그 결과로 나온 수치를 인용해가며 교육 현장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대통령의 일갈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국방부는 장병 정신교육에서 6·25 한국전쟁을 설명할 때 도발 주체를 명기하여 '북한의 남침'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국방부는 이 내용을 교육부에도 요청했다. 교육부는 따로 '역사교육 정상화 방안'을 내놓기 위해 내부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설계도 부실하고 표본오차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전자메일 조사가 대통령의 정책 판단의 근거로 활용되는 이 한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최근 국방부에서 강행한 백선엽 한미동맹상(이하 백선엽 상)도 이와 비슷하다. 백선엽은 1943년 4월부터 1945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던 조선 독립군과 중국 팔로군을 토벌하던 만주군(일본군) 간도 특설대의 장교로 복무했다. 그래서 2009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백씨를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명에 포함시켰다. 악명 높은 간도 특설대의 장교 이력으로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최근 국방부는 대변인의 입을 통해 "독립군 토벌은 백 전 총장이 어릴 때 한 일"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들이댔다. 군대 초급 장교 시절을 '어릴 때'로 보는 시각은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어떤 근거로 나왔을까. 국방부가 보는 '어른 시절'은 과연 몇 살 때쯤부터일까.

백씨가 '어릴 때' 독립군을 토벌하던 그 시기는 박정희가 일본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어 중국 화북지방 열하성 반벽산에 주둔하면서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제17군단의 토벌에 나섰던 때와 겹친다. 또 백씨는 여순 사건 당시 숙군 수사를 지휘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구명에 나선 인연도 있다. 국방부가 논란이 많은 백선엽 상을 강행하는 배경이 의심스러운 이유다.

나랏님의 말 한 마디면 '팥'이 '메주'가 되는 나라

지난 10일 언론사 논설실장·해설위원 초청 오찬에서 박 대통령은 "역사 과목은 평가기준에 넣어 어떻게 해서든지 (성적에) 반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부와 여당은 청소년 역사 인식을 제고한다며 한국사 교육 강화 방안을 검토하기로 한다. 당정이 검토하고 있는 대안은 한국사의 수능 필수화다. 역사 과목을 수능에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넣어 성적으로 학생들을 옭아매겠다는 방식이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즈음 학생들의 역사 의식이 갈수록 얕아지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과 평가로 강제되는 역사 교육이 과연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가져올 수 있을까. 학생들로 하여금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 등을 달달 외우게 해서 투철한 역사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이보다는 현재 정권이 바라는 역사 기술과 이를 통한 역사 교육 강화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본다. 이를 역사 기술과 역사 교육에서의 보수화나 우경화 기획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보수 우파들은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내가 보기에 보수 편향이나 우편향은 현재의 역사 서술에 이미 충분히 실현되어 있다. 보수 우파가 사생결단으로 밀어붙인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내쫓고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한 자리를 꿰찬 사실은 그 상징적인 사례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전면적인 역사 전쟁의 현장에 속속 투입되고 있다. 기존 교과서의 서술을 뒤집으려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게 그 대표적인 보기다. 그들이 '좌편향' 교육과정으로 지목한 2007 개정 교육과정은 시행도 한 번 못 해본 채 폐기되고, 그 자리는 역사 교육 시간이 대폭 줄어든 2009 교육과정이 대신 들어섰다. 보수적인 이명박 정권 때의 일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존 역사 서술의 기본 프레임이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이 공유하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태도와 관점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영향력 있는 교과서 전문 출판사와 함께 교과서에 '그들'의 역사를 서술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은 이제 한 달 뒤에 나온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남침'을 "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으로 분명하게 풀이해 놓았다. 사전 편찬자는 이 뜻풀이 뒷부분에 친절하게 구체적인 용례까지 제시해 놓았다.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선을 넘어서 남침을 감행하였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국방부가 만들고 교육에 요청한 예의 '남침=북한의 남침' 도식을 따르면, 이 예문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선을 넘어서 북한의 남침을 감행하였다"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억지 춘향이 어디 있냐고 말하지 마시라. 나랏님의 말 한 마디면 '콩'이 '팥'이 되거나 '팥'이 '메주'가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멀쩡한 아이들에게 정신 헛갈리게 하는 질문 던진 뒤 나온 엉뚱한 결과를 놓고선 역사 교육이 왜곡됐다고 말하는 게 대체 말이 되나. 그 한 마디에 입 꾹 다물고 있던 이들이 날뛰며 만들어내는 이 거대한 '사기극'은 과연 끝날 날이 올까.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는 슬픔을 머금은 채 아열대의 끝 모를 우기를 지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역사교육, #역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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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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