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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음'이란 단어에 붙들려 거의 석 달을 살았다. 오랜만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를 다시 들은 게 그 단초였다. 분명히 수차례나 이미 들은 적 있는 노래였다. 시낭송을 듣는 것처럼 한 소절 한 소절 가사가 주는 울림으로 마음 저렸던 적 많았던 노래이기도 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노래 목록 윗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노래였다.

그런데 무심결에 다시 듣는 순간 제목, 특히 '즈음'이란 단어에 마음이 멈췄다. 즈음... 국어사전적 뜻풀이로는 '일이 어찌 될 어름이나 그러한 무렵'으로 준말로는 '즘'이라고 나와 있다. 이렇듯 '즈음'은 칼로 자르듯이 뚝 떼어내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시간과 시간, 상황과 상황, 기억과 기억이 걸쳐 있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공간, 혹은 시간대를 말한다.

<서른 즈음에>라니! 시계바늘이 한 차례 쏜살같이 눈앞에서 뒤로 돌고 있는 게 보였다. 시계바늘을 따라 제자리에서 눈을 감고 몸을 돌려봤다. 이제는 까마득한 나의 '서른 즈음'으로 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즈음의 시간과 그즈음의 풍경과 그즈음을 살고 있는 내 모습, 뒤를 이어 줄줄이 떠오르는 그즈음의 노래와 그즈음의 말들...

내가 살아온 자취들이 눈 깜박일 때마다 내가 걸었던 거리와 내가 숨 쉬며 사랑했던 향기와 내 전부였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나는 나의 '서른 즈음'을 그렇게 다시 만났다.

6년을 연애한 첫사랑과 결혼을 하고 두 번의 자연유산 끝에 귀하게 아들을 낳아 하루하루가 천국 같은 행복과 충만감으로 꽉 찼던 그즈음, 그러면서도 태생적으로 감고 나온 고질적인 외로움에 절어 하루가 천 년처럼 막막했던 그때. 지금 돌아보면 사치요 허영이었던 외로움이었지만 당시는 왜 그토록 안고 가기가 무거웠던 걸까?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은 또 왜 그렇게 발 딛기가 무섭고 두려웠던 걸까? 나의 서른 즈음은 내가 나를 견딜 수 없었던 시기였다.

외로운 만큼 가슴으로 들어차던 말들을 어찌할 바 몰라 서른한 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일 년 뒤 서른두 살에 등단을 했다. 서른세 살에 첫 시집을 출간했고 서른여섯에 첫 에세이집, 서른여덟에 두 번째 에세이집, 서른아홉에 두 번째 시집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쏟아놓은 말들만큼 견딜 수 없던 나대신 견뎌내며 받아들이는 나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마흔과 함께 이십일 세기를 맞았다.

사무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간대와의 조우는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

나의 서른 즈음은 필사적으로 나와의 투쟁 기간이었던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세상에 없는 그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잠시 마음이 흔들린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는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누구나 '즈음'을 살고 또 다른 '즈음'을 향해 간다. 서른 즈음을 지나왔다면 언젠가는 또 지금 이 즈음을 회상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또 하루 멀어져" 가고 "점점 더 멀어져"가며, 그래서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지만, 이것은 다음 시절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단락일 뿐이다. 생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분모인 멀어져가는 청춘과 비어가는 가슴, 떠나간 사랑에 대한 뼈아픈 인정이 읽혀진다. 문장의 어미가 현재형 이어서일까? 듣는 사람의 과거 시간마저 현재 이 자리에 데려다놓는 것 같은 그의 노래는 그래서 직접적인 사무침과 함께 절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숨의 자리마저 그와 거의 동일한 또 하나의 내 모습이 읽혀지는 노래, 이 노래가 오래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먼 훗날, 나는 현재의 이즈음을 어떻게 회상할까? 회상하기에 어여쁜 나이는 이미 지나왔다. 가슴 저미며 기도의 방에서 울 수 있는 마음도 이미 삭제된 지 오래다. "머물러 있는 사랑" 따윈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것에 긴 호흡이 머문다. 그것은 타자와의 이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지금'과의 이별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서서히 자신과의 이별을 준비해야하는 나이, 먼 훗날 나는 '그즈음 나는 나를 만나기에 바빴다. 그렇게 나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그래서 허둥대지 않고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즈음'을 산다. 이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이동하는 걸음걸음이 '어느 즈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간다'고 말한다. 다른 '즈음'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때 손을 잡아주고 눈을 바라봐주며 말을 들어주었던 모든 것들과 함께 수많은 '즈음'을 지나온 현재, 누군가의 회상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였는지,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시간 속에서 또 나는 어떤 존재가 될지... 김광석의 노래가 불변의 예고편이 되지 않길 바라며 또박또박 따라 불러본다.


태그:#음악에세이, #서른 즈음에, #김광석, #서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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