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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구암 허준>.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허준(김주혁 분).
 드라마 <구암 허준>.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허준(김주혁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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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삶을 소재로 한 <구암 허준>은 16세기 중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다. 조선왕조는 14세기에 세워져서 20세기에 사라졌으므로, 허준이 생존한 시기는 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당시로서는 그렇게 보편적이었다고 보기 힘든 머슴-사용자 관계가 등장한다.

의원 유의태의 집에 근무하는 일꾼들 중에는 명확하게 머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드라마 속의 허준(김주혁 분)도 한때는 이 집의 머슴이었고, 허준을 박대했던 선배 일꾼들도 머슴이다. 예진 아씨(박진희 분)도 엄밀히 말하면 머슴이다. 노비도 아니면서 그 집에서 고정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예진도 머슴의 범주에 포함된다. 

물론 허준이 유의태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는 것은 순전히 허구다. 또 유의태는 허준보다 훨씬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주목해보자.

머슴과 노비, 같은 거 아니었어?

머슴과 노비는 외형상으로는 비슷했다. 사용자를 위해서 일하고 대가를 획득한다는 점은 똑같았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특히 신분적 예속성이란 측면에서 그랬다. 노비는 법률에 의해 주인의 종으로 살도록 되어 있었고, 머슴은 그렇지 않았다. 법적으로 사용자의 물건으로 취급되는 사람은 노비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머슴이었던 것이다.

머슴은 사용자와의 계약에 기초해서 일을 했다. 계약은 원칙상 양인(자유인·일반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므로, 원칙상 양인만이 머슴이 될 수 있었다. <경국대전> 같은 조선시대 법전에 나오는 고공(雇工)이 바로 이런 머슴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촌 노비들이 도시로 도주하여 신분을 숨기고 머슴이 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노비들은 양인 행세를 하면서 일을 했으므로, 원칙상 양인이 아니고서는 노비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머슴이 그렇게 높은 존재였어?'라고 생각한 독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노비는 신분상의 자유가 없었지만, 머슴은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머슴은 '그렇게 높은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의 사례에 주목해보자.

예진 아씨(박진희 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예진 아씨도 머슴이다.
 예진 아씨(박진희 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예진 아씨도 머슴이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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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광주 출신인 고경명은 문과시험에 장원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1592년에 전사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부총리급인 종1품 좌찬성 벼슬을 추증했다. 그가 죽은 때로부터 82년 내지 128년 뒤인 숙종시대(1674~1720년)에 활약한 그의 후손 중에 고유(高庾)란 인물이 있었다.

서유영이 편찬한 실화집 겸 민담집인 <금계필담>에서는 고유가 고경명의 후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명확히 몇 대 손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경명이 죽은 때로부터 82년 내지 128년 사이에 활약한 점을 보면, 고유가 고경명의 3대손 혹은 4대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무리 멀어도 5대손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3대조나 4대조 중에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고 좌찬성 벼슬을 받은 인물이 있는 집안은 명문가 축에 들었다. 따라서 고유 역시 명문가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어려서 고아가 된 그는 가문의 집성촌이 있는 전라도 광주에서 나와 경상도 고령 땅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그는 이곳 유지인 박 좌수의 딸과 결혼했고, 숙종 때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참고로, 좌수는 지금으로 치면 지방의회 의장 격이다.

이 사례 속의 고유는 양인 신분으로 태어나 머슴이 됐다가 지역 유지와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했다. 이처럼 머슴이 지방 유지의 사위도 되고 관료도 될 수 있었던 것은 머슴은 노비와 전혀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런 의문이 머리를 스칠 수도 있다. '고유는 양인이 아니라 양반이 아니냐? 양반은 양인보다 높은 신분이 아니었느냐?' 하지만 조선시대의 법적 신분은 양인과 노비로 구분됐다. 그리고 양인 속에 지배층 혹은 사대부(양반)가 있었다. 지배층이란 법적 신분이 법률에 규정될 수 없듯이, 사대부나 양반이라는 법적 신분이 법률상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역사는 머슴이 노비를 추격하는 과정이었다
머슴은 법적 자유인인 양인이었기 때문에, 머슴과 사용자의 관계는 언제든지 끝날 수 있었다. <구암 허준> 속의 일꾼들은 본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유의태의 집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노비는 원칙상 면천(신분해방)을 받지 않으면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머슴은 계약기간만 끝나면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머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미천왕(재위 300~331년)도 어릴 때 남의 집 머슴이 되어 둑을 관리하고 나무하는 일을 했다. 왕족인 그가 머슴이 된 것은 왕실의 권력투쟁을 피해 한동안 이름과 지위를 숨기고 살았기 때문이다.

머슴은 고구려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노비에 비해 월등히 적었다. 18세기 이전만 해도 생산현장에 근무하는 일꾼의 대부분은 노비였고, 노비의 숫자는 과거로 가면 갈수록 훨씬 더 높았다.

조선 후기의 여성 일꾼(밀랍인형). 조선 후기의 일꾼 중에는 머슴의 비중이 매우 많았다. 이 사진은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었다.
 조선 후기의 여성 일꾼(밀랍인형). 조선 후기의 일꾼 중에는 머슴의 비중이 매우 많았다. 이 사진은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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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제도가 크게 동요했던 18세기에도 노비는 전체 인구에서 30% 정도였다. 그 이전에는 보통 50%는 됐다. 고려시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고, 고려시대 이전에는 고려시대보다 훨씬 더 많았다. 노비가 아닌 양인들은 관료·상인·기술자·자작농·소작농 혹은 머슴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세계사란 자유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이런 궁극적 목적(자유를 지칭)을 향해 세계사는 영위되어 나간다"고 말했다. 역사는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라는 헤겔의 말처럼, 비(非)자유인인 노비의 숫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점차 줄어들었으며, 반대로 자유인인 머슴의 숫자는 차차 늘어났다. 역사는 머슴이 노비를 추격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가 비 자유를 추격하는 과정이었다.

학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할 때, 한국에서 머슴의 숫자가 노비의 숫자를 추월한 시기는 18세기 정도다. 19세기 후반에 노비제도가 해체된 것은, 이미 18세기 후반쯤 되면 이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노비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은, 노비로 먹고사는 사람의 숫자가 현격히 감소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갑오개혁) 때 노비제도를 폐지한 것은 이미 땅에 쓰러진 이 제도를 '확인 사살'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18세기에 머슴이 노비를 추월한 배경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17세기부터 두드러진 경제적 변화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에 나타난 현상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상업과 도시가 크게 발달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농촌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던 노비들을 도시로 유혹하고 흡수하는 기능을 했다. 봉건적 수탈에 시달려온 노비들은 도시라는 자유 공간이 확대되자 그곳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7세기부터는 도시로 도주한 노비들이 양인 행세를 하면서 머슴살이를 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한편, 이런 이유 때문에 농촌에 일손 공백이 생기자, A 농촌에서 도주한 노비들이 B 농촌에 가서 양인 행세를 하면서 머슴살이를 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이것은 머슴의 숫자를 전반적으로 증가시키는 요인이 됐다.  

이 같은 노비의 대대적 이탈은 사용자와의 마찰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사용자들은 도망간 노비를 잡고자 관청에 고발장을 제출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추노꾼을 고용했다.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KBS <추노>는 이런 상황을 반영한 드라마다.

이런 갈등 구조 속에서 일부 노비들은 기존 일터에서 이탈했지만, 일부 노비들은 사용자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이러다 보니, 사용자 입장에서는 노비 관리비용이 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해 추노꾼을 고용하는 데도 돈이 들었고, 남아 있는 노비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데도 돈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용자들은 노비를 고용하는 것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머슴을 고용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는 사용자들이 많았다. 머슴은 기간제로 고용하고 때가 되면 해고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머슴-사용자 관계는 당시 관점에서 보면 '노사분규'가 비교적 적은 쪽이었다. 

또 머슴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는 양인 행세를 하는 도망 노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용자 입장에서는 노비를 다루는 것보다 이들을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다. 도망 노비는 법적으로 쫓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17세기부터 머슴-사용자 관계가 크게 증가하다가, 18세기 들어서는 이 관계가 노비-사용자 관계를 추월했다. 

이처럼 노비의 도망 내지는 저항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용자의 노비 기피 현상이 증가하면서, 머슴 숫자가 노비 숫자를 능가하는 역사적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상태에서 19세기에 서양의 자유민권 사상이 들어오고 노비제도의 반인권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이다. 따라서 머슴의 증가는 노비제도 해체의 최대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태그:#구암 허준, #머슴, #노비,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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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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