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이삿짐을 옮기는 사람
 이삿짐을 옮기는 사람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쾅쾅쾅!"
"딩동딩동!"

문 두드림과 함께 초인종 소리를 들으면서 짜증나는 마음에 시계를 찾아보니 새벽 2시다.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새벽에 이 난리인가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보니 반지하에 사시는 아주머니다. 당황한 표정에 무슨 일이 생긴 걸 직감하고는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집주인이 도망갔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무슨 이야기인가, 집주인이 왜 도망을 가는 건가? 5층의 주인집을 가보니 문은 열려 있고 계약할 때 한번 들어가본 그 집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휑했다. 심지어 에어컨까지 뜯어갔다. 황당한 정도가 아니었다. 다세대 주택의 온 주민들이 새벽에 나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보니 잠은 이미 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나가 버렸다.

1997년 당시 결혼을 하게 되면서 5층 다세대 주택의 1층에 13평짜리 공간이나마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직한 회사의 특별전별금 덕분이었다. 때문에 전세금이나마 마련해서 혼자살던 원룸의 주변에 신축된 다세대 주택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구조고 뭐고 뒷전이었다. 보금자리나마 마련하고 알콩달콩 신혼살이를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우선이었다.

징조는 처음부터 있었다. 신혼이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신축 건물이고 하니 조금씩 물건을 옮겨도 되겠냐고 집주인이게 물으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때문에 이사 전에 마나님(집사람)이 들락거리면서 사고 싶던 물건을 사나르시던 어느 날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마나님이 나가보니 은행에서 나왔다면서 여기 살고 있으냐고 물어보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주소이전 등은 이전에 마무리 지어놓은 상태였다. 이후 은행원은 몇 자 적고 바로갔는데, 저녁에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씨, ××일 날 들어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있어요?"
"미리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결혼식 전에 애인이 물건 정리하러 드나들겠다고요."

"……."

알 수 없는 소리로 몇 마디 하던 집주인은 이내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안 것이지만 그때 집주인은 나와 계약을 하고선 입주 전에 은행에 대출을 진행한 것이었다. 한데, 은행이 실사를 나왔다가 집을 정리하던 마나님을 보고 제외를 시켜버린 것이다. 어떨결에 우리는 그 집에서 은행보다 앞선 우선순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새벽 2시, 문 두드리는 소리... "집주인이 도망갔어요!"

이후 집주인의 야반도주(?) 후에 곰곰 생각을 해보니 며칠 전에 피아노를 실어나가던 게 기억났다. 퇴근하다 이를 보고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사 가실 거냐고 했더니 어물 어물 하면서 친척에게 주기로 한 거라고 답했다. 그때부터 이미 조금씩 물건을 실어냈다가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몇 달 동안 살면서 10원 한 장까지 꼬박 꼬박 전기세와 청소비라면서 받아갔고, 야반도주하는 날도 청소비가 부족하다면서 몇천 원을 더 받아갔다. 알고 보니 계방이라는 걸 3군데 운영하면서 거기서 모인 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계속 살아야 하나 아니면 차압 들어오는 걸 기다려야 하나. 무엇보다 집주인이 야반도주를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 전세금을 달라고 해야 하나 막막한 실정이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후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다. 집주인은 야반도주 전에 집을 배다른 형제에게 이전을 해줬다는 것이다. 한가닥 희망이 보였다. 그래도 전세금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장본인이 생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이전 받은 집주인이라면서 중년의 남자분이 오셨다. 이전 집주인이 살던 5층의 방에 그 배다른 형이라는 분과 세대분들이 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가겠다는 사람은 모두 내보내주겠으며 자신이 책임지고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 다행이다. 나는 당시 나가겠다고 이야기하고 그러라고 답을 들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고 이래저래 독촉을 했으나 집이 나가야 줄 수 있다는 바뀐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책임지고 나가고 싶을 때 내보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미 다른 곳에 집을 알아봐서 이사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자 바뀐 집주인은 큰소리를 쳤다. 맘대로 하라고, 자기는 돈이 없다고, 부동산에 이미 내놨는데 사는 사람이 없어서 못 준다고 되레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이미 그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다행히 나는 은행 바로 앞 우선순위이기는 하지만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래저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기에 불안 속에 시간을 보냈다. 전화를 해도 되레 욕만 듣고 법대로 하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뿐이었다.

마나님의 '우연'이 만들어준 우선순위... 하지만 허탈해

이리저리 알아보는 와중에 어릴 적 잘 알던 어머님 친구분의 아들이신 형님이 생각났다. 변호사인 형님은 사실상 특허관련 전문 변호사로 부동산 관련 쪽은 하지 않는 분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 친하게 지낸 형님이고 해서 뭔가 실마리라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전화를 드리고 방문했다.

형님은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동안 연락도 못 드렸다고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고선 현재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형님이 웃으시면서 "내가 너한테 수임료를 받으면 너희 어머니한테 맞아죽을 테니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 인지대 등 각종 비용이 발생하면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자신이 담당하지 않는 분야지만 진행해 주시겠다면서 우선 소송 전에 내용증명을 보내보자고 하셨다. 형님이 모든 걸 작성해주신 덕에 처음으로 내용증명을 보내봤다. 물론 그때 용지는 전부 그 형님 사무실의 편지지와 봉투를 이용했다.

등기우편은 이틀 만에 도착했고, 이전까지 고자세로 나오던 집주인은 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졌다. 자기가 맨 먼저 내 전세금을 빼주려고 했는데 왜 그러냐면서 이런 거를 왜 보내냐고 한다. "저희 전세금만 내주시면 진행은 더 이상 않겠습니다"라고 하니 알겠다고 하고 3일 만에 전세금을 돌려줬다.

너무 쉽게 돌려받고는 한편으로는 허탈했다. 이래서 '비닐봉지라도 백이 하나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서글픈 생각은 가시질 않았다. 힘없는 서민은 당해도 소용이 없는 거고, 병원에 입원을 하려고 해도 수위 한 분이라도 알면 병상이 생긴다는 말처럼 단순히 법률 사무실 봉투에 들어 있던 내용증명 하나로 쉽사리 해결이 된 것이다. 변호사 형님께서는 쉽게 해결이 되어서 다행이라시면서 오히려 저녁과 술을 사주시면서 다음에 또 보자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지금도 생각한다. 은행이 실사를 나오기 전에 마나님이 그 집에 있지 않았다면, 은행 이후의 순위가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하다. 하우스푸어로 지금은 현관 언저리만 겨우 우리 소유인 집에 살지만 그래도 전세금 걱정과 이사 걱정을 덜 수 있는 건 그나마 조그만 행복이라면 행복일 거라 생각하면서 오늘도 저녁에 자그마한 우리 공간에 돌아갈 생각을 해본다.


태그:#전세금, #전세, #이사, #야반도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어여쁜 마나님과 4마리의 냥냥이를 보필하면서 사는 한남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