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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쌍굴 다리.
 노근리 쌍굴 다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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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삼거리에서 노근리까지 우리는 4번 국도를 따라간다. 이곳으로는 차들이 많이 다녀 조금 위험하다. 그렇지만 다른 길이 없어 이 도로의 갓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4번 국도의 지하도도 지나고 경부고속국도 아래를 지나기도 하면서 안화리에 이른다. 안화리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걸으니 도로가 철로와 가까워진다.

도로와 철로가 나란히 지나는 지점을 가로질러 서송원천이 흐른다. 서송원천은 서송원리에서 발원 노근리와 우천리를 거쳐 초강천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노근리 앞에서 자연스럽게 쌍굴 다리가 생겨났다. 하나는 사람과 차가 다니는 굴이고, 다른 하나는 서송원천이 흐르는 굴이다. 이곳 쌍굴 다리에서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 사이 300명 가까운 양민이 학살된 것이다.

가장 먼저 만난 쌍굴 다리, 그곳에서 어떤 일이

노근리 사건 개념도.
 노근리 사건 개념도.
ⓒ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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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죽은 사람은 주곡리, 임계리, 노근리 주민과 서송원리 주변의 피난민들이다. 노근리 사건의 출발은 7월 23일 주곡리에서 시작된다. 정오쯤 주곡리 마을에 대한 소개 명령이 내려진다. 주민들은 가까운 임계리로 피난한다. 임계리에 모인 주민과 피난민은 오륙백 명이 되었다. 7월 25일 저녁쯤 미군은 이들을 다시 4번 국도를 따라 하가리로 유도한다. 이들 피난민은 이날 밤을 하가리 천변에서 노숙한다.

7월 26일 아침 피난민은 다시 미군에 의해 서송원리로 이동한다. 서송원리로부터 이들은 미군에 의해 도로 대신 철로를 따라 걷도록 명령받는다. 정오경 갑자기 하늘로부터 비행기 폭격과 기총소사가 있었고, 이들 중 다수가 희생된다. 살아난 피난민들은 다시 노근리 쌍굴 다리로 피신했으나 오후부터 계속된 기관총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또 다시 희생된다. 이러한 공격은 7월 29일 오전까지 계속되었고, 희생자가 300명에 이른다.

노근리사건 희생자 실사보고서.
 노근리사건 희생자 실사보고서.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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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들의 증언은 영동군에서 발간한 <노근리 사건 자료모음>(증보판, 2007년 12월)에 들어 있다. 임계리 출신의 양해숙씨는 당시 11세였다. 본인은 총상으로 눈이 실명되었고, 할머니와 오빠 동생은 사망했고, 어머니는 중상을 입었다.

"어머니는 하체 6곳에 총을 맞고 '아이구 나 죽겠다'고 하셨으며, 나는 눈에 불덩어리를 맞아 눈알이 빠져 실명했습니다."

주곡리 출신의 정구헌씨는 당시 17세였다. 정구헌씨는 노근리 사건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자세히 증언하고 있다.

"7월 23일 임계리로 올라갔다. 7월 25일 오후 8시경 피난민들은 '미군이 남쪽으로 피난시켜 준다고 하니 모두 내려오시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9시에 피난민 일행이 집결해 미군을 따라 주곡리 앞으로 해서 국도를 따라 갔다. 밤이라 피난민의 이동 속도가 매우 느렸다. 하가리쯤 갔을 때 밤 10시가 넘었으며, 나는 선두에 있었고 미군이 길을 막고 황무지로 내려가라고 했다. 당시 길 옆에 아카시아가 많고 미군 통신망인 삐삐선이 쳐져 있어서 내려가기 힘들었다. 내려가는 것이 늦으니까 미군이 피난민을 총으로 쏘았다. 아이 1명이 즉사하고 부인이 부상을 당했다. 그 후 밤새도록 하가리 쪽에서 미군이 계속 포를 쏘았고 새벽에야 포성이 멈췄다."

그는 7월 26일 철로 상황과 쌍굴 다리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26일 밤 10시 노근리 쌍굴 다리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살아서 이 억울한 상황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탈출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독골로 도망쳤고, 29일 새벽에야 미군이 철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미군의 피난민 학살은 7월25일에 시작, 29일에 끝났다.        

위령탑 앞에서 술잔을 올리다

노근리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행.
 노근리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행.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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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의 쌍굴 다리를 보고 난 우리 일행은 길 건너편에 있는 노근리 평화공원으로 간다. 멀리서도 위령탑의 다섯 개 기둥이 보인다. 우리는 위령탑 앞으로 가 술을 따라 잔을 올린다. 그리고 전쟁으로 숨진 영령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우리의 기도가 그들에게 전해질지 모르지만,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위안과 마음의 평화를 준다.  

위령탑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뒷부분의 벽과 두 개의 문은 노근리 쌍굴을 상징한다. 거기에 다섯 개의 기둥이 하늘로 높이 솟아 있다. 그 옆에는 둥근 공이 설치되어 있다. 공에는 노근리를 비롯한 온 세상이 비치고 있다. 하늘로 뻗은 직선과 세상을 포용하는 곡선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제단 가운데 벽에는 쌍굴 다리 앞을 지나는 피난행렬 사진이 인화되어 있다.

위령탑의 조각상.
 위령탑의 조각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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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옆으로는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제단화가 기록사진이라면 조각상은 예술성을 가미한 기념물이다. 기념물에 표현된 인물은 모두 일곱 명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세 명의 자식이다. 짐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손에 든 이들은 정처 없이 피난을 간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곳에 가면 희망은 있는 걸까? 조각상 너머로 저녁 해가 떨어지고 있다.

조각품에서 반전과 평화를 생각하다

그날의 흔적.
 그날의 흔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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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탑 참배를 마친 우리는 조각공원을 살펴본다. 야외에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조각품 8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노근리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이들 조각의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날의 흔적, 시련, 하나 되어 나아가리, 미완의 공존, 노근리의 아침, 희망을 찾아서. 앞의 세 작품이 과거라면, 뒤의 세 작품은 현재와 미래다.

'그날의 흔적'은 1950년 7월 노근리 사건 현장을 재현했다. 아치형의 브론즈에 스테인레스를 두르고 그 위에 소총을 배치했다. 브론즈 앞면에는 피난행렬이, 뒷면에는 죽어가는 양민들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아치 위의 소총은 더 이상 총부리를 양민에게 겨누지 않는다. '시련'은 폭격과 총격으로 죽은 사람을 들것에 실어 운반하는 모습이다.

미완의 공존.
 미완의 공존.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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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어 나아가리'에서는 두 아들이 태극기를 들고,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를 떠나  앞으로 나아간다. 시련 극복의 이미지가 들어 있다. '미완의 공존'은 가장 상징적인 작품이다. 총알과 반달 그리고 나비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총알은 전쟁을, 반달은 분단을, 나비는 희망을 상징한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이 고착되었지만, 그러한 총탄에서도 나비가 날아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근리의 아침'은 희망을 상징하는 해와 미래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결합시켰다. '희망을 찾아서'는 상당히 추상적이다. 시련을 당한 인간이 희망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해가 쉽지는 않다. 그 외에도 부모를 잃은 두 남매의 안타까운 모습을 표현한 '시선'과, 남과 북의 두 남녀가 통일로 미래로 나가는 역동적인 '하나 된 미래를 향하여'가 있다. 

노근리 평화기념관 이야기

조각상 뒤의 평화기념관.
 조각상 뒤의 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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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평화기념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한 갈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철제구조물을 지나가야 한다. 고통의 벽이다. 이 벽은 좁고 긴 터널로 우리가 받은 많은 고통을 상징한다. 고통의 벽을 지나 우리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 지하 1층은 '영상관', '아픔이 서린 기억의 조각', '희생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먼저 영상관에서 '세계 인권평화의 장, 노근리'라는 영상기록물을 본다.

영상물을 보고 나서는 희생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공간으로 들어선다. 초입에 '인권(Human rights) 회복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평화(Peace)는 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강조하는 두 가지 개념이 인권과 평화다. 그리고 정삼일 시인의 '말하라! 그날의 진실을'이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노근리 다큐멘터리 영상.
 노근리 다큐멘터리 영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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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뜻하던 비둘기가
어느 날 갑자기 쌍굴 다리에서
빨간 고무장갑을 벗고
독수리로 변하였네!

가난과 약자의 아픔이었기에
눈을 가지고도 귀가 있어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던
양민학살

노근리 사람들은 두 번 죽었는지도 모른다.
미군은 인민군이 두려워 그들을 죽였고
우리는 미국이 두려워
그들의 진실을 외면했다.

서기만 하면 죽는 겨
나오기만 하면 죽는 겨
삶은
죽음보다도 더 처절했다.

반세기가 흘러도 쌍굴 다리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진실을 밝혀 달라고...

비통의 길.
 비통의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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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는 전체적으로 피난의 무거운 발걸음, 비통, 희생이라는 주제가 표현되어 있다. 그 중 비통함을 표현한 길이 인상적이다. 비통의 길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다. 노근리 쌍굴을 상징한다. 길옆에는 해골이 나뒹굴고 으스스한 빛이 감돌고 있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넋을 기리는 공간이 있다. 노근리 쌍굴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지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 1층으로 오르니 노근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한 유족들의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진상규명에 가장 앞장선 이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유족회장 정은용씨다. 그는 '미군에 의한 피살상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미국측에 처음 한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노력이 난관에 부딪치자 노근리 사건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소설로 발표하기도 했다.

유족회장 정은용씨의 육필원고.
 유족회장 정은용씨의 육필원고.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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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노근리 사건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된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과 같은 일은 현재도 수많은 전쟁터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노근리 사건은 반전과 평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한 인식에서 기념관 1층에는 평화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열망이 표현되어 있다. 노근리는 이제 대한민국의 평화공원에서 세계의 평화공원으로 나가고 있다.


태그:#노근리 사건, #쌍굴 다리, #위령탑, #조각공원, #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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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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