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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도 여객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섬이 불무도(야도)다. 그 뒤에 가장도와 풍낙도가 있다. 가장도는 소경도와 불무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지금은 그 섬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 큰 섬도 젊은 사람은 도시로 나가고 나이든 사람은 섬에 묻혀 무인도가 되고 있는데 1960년대에는 단 두 세 가구만 살던 섬이었는데 오죽하겠는가. 그런데도 그 섬에 가보고 싶었다.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영화 <모정의 세월> 때문이다. 1960년대 어머니의 진한 모정 때문에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이다. 그 주인공이 살았던 섬 가장도는 가쟁이섬이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섬문화 답사기> '모정의 뱃길 삼만리-여수 경호동 가장도' 편에서

<섬문화 답사기 : 여수·고흥 편>(서책 펴냄)를 통해 인상 깊게 만난, 여수 가장도에 얽힌 이야기다.

1962년 2월, 여수의 한 초등학교 졸업식. '6개년
<섬문화 답사기:여수 고흥편>
 <섬문화 답사기:여수 고흥편>
ⓒ 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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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상'을 받은 13살짜리 딸(정숙현)과 그의 어머니(박승이)가 받은 '장한 어머니상'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된다. 딸은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으로 울고, 어머니는 딸이 장하고 대견스러워 울고, 졸업식장의 사람들은 어머니의 강한 모정에 울고. 그렇게 감사와 감동의 울음바다가 된 것이다.

모녀는 학교에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가장도에 살았다. 당시 가장도의 주민이라고 해봤자 3세대 20여명, 작은 통통배조차 드나들지 않는 그런 외딴섬이었단다. 섬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등과 같은 볼일이 있으면 나룻배를 직접 저어서 육지를 건너가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는 나룻배가 멈추는 국동이 아닌 시내에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라도 학교에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지라 당시 가장도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때는 50년대 중반~60년대 초이다. 육지 사람들 중에도 찢어지게 가난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했던,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던 그런 시대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니는 노를 저어 파도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박승이씨는 비록 딸자식이지만 장래를 위해 어떻게든 가르치자고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학교에 보낸들 무슨 수로 매일 바닷길 20리를 왕래할까"라는 아버지의 지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딸을 입학시키고 만다.

시계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 사라로 산산조각이 난 배의 파편을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다. 
- 2004년 7월 8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딸 정숙현씨의 회고 중에서.

전기도 시계도 없는, 새벽임을 알리는 수탉마저 없던 그런 캄캄한 섬마을이었다. 어머니 박승이씨는 딸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 어둠 속에서 딸을 깨워 밥을 먹인 후 나룻배를 저어 학교에 보냈고, 학교가 끝날 시간이면 다시 가서 데려오곤 했다.

어머니의 나룻배는 강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6년 세월 동안 어머니가 딸의 공부를 위해 열었던 뱃길은 자그마치 3만 4천리. 모녀의 이야기는 1963년 2월 14일자 <한국일보> 기사 '모정의 뱃길 3만 4천리'로 전국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졸업식장을 울음의 도가니로 만든 모녀의 이야기는 이후 영화와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사랑의 뱃길 삼만리'라는 영화주제가(백설희와 황금심이 부름)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책에는 6년 후 대학 진학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도, 아이 셋을 둔 딸 정숙현씨가 당시 자신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가 되어 회고하는 어머니 사연도 소개된다.

한때 '해태' 등으로 불렸던 '김'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해태라는 명칭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경세유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정약용은 '태자 해태지'란 글에서 '해태에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 하는데, 태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그 중 자태는 속말로 해의라 하고 사투리로 짐이라 한다'고 설명했다.(김을 전라도 말로 '짐'이라 부른다. 김치는 '짐치', 김샌-김씨 성을 가진 남자, 보통 일꾼이나 머슴인 경우가 많음-을 '짐샌'이라 부른다.)

해태 혹은 해의가 '김'으로 불리기 시작한 사연도 있다. 광양김이 특산품으로 왕실에 바쳐졌는데, 하루는 왕이 광양김으로 맛있게 수라를 젓순 후 음식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한 신하가 "광양땅 김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아뢰자, 임금이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김'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고 분부하여 '김'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광양 태인도에는 그 어부가 김여익으로 알려져 있다.
- <섬문화 답사기>에서

<섬문화 답사기>는 해양문화 연구자인 저자가 지난 20여 년간 우리나라 섬들을 답사한 것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섬은 모두 3300여 곳, 이 가운데 저자가 답사한 곳은 460여개 유인도다. 저자는 그 중 여수와 고흥의 섬 80곳을 책에 실었는데, 앞으로 답사 내용을 엮어 8권짜리 시리즈로 출판할 예정이다. '여수·고흥 편'은 그 첫 번째 책이라고 한다.

사실 쉽게 읽지 못한 책 중 하나다. 650여 쪽 책에 담고 있는 내용도 워낙 많고, 섬이라고는 제주도만 가본 내게는 생경할 수밖에 없는 용어들(고기 잡는 도구나 지형 용어 등)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눈물 나는 사연, 웃음 주는 사람들로 가득한 섬과 갯벌 이야기

그럼에도 지난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책을 붙잡았다.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섬과 그 섬을 생활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 생활, 역사, '김'과 같은 수산물 관련 지식 등 바다를 둘러싼 알 거리들이 워낙 풍성한데다가, '모정의 뱃길 삼만리' 사연처럼 쉽게 잊히지 않고, 진한 감동을 주는 섬에 얽힌 이야기 또한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 80여곳을 다룬 글에서 '어디쯤에 있는 어떤 섬인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어떤 특산품들이 있었는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역사가 스며 있는가, 예전에는 어땠으며 지금은 어떤가' 등을 소개하며 저자가 만난 현지 사람들의 사투리와 억양 그대로 살려 녹여 쓰고 있어서 살갑고, 현장감이 생생한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쉽게 읽지 못한 책이지만, 책 소개를 이렇게 쓰는 것 또한 무언가 막연히 아쉬워서 벌써 며칠째 글을 쓰다가 물러나 책 여기저기를 드문드문 훑고 있다. 이런 성격의 책은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난 누군가 한다면 훨씬 실감나고 맛깔스러울 것이라는, 그렇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을 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한 애정과 아쉬움 때문이다.

섬에서 나고 자라지도 않았고, 전혀 만난 적 없는 저자의 책인데도 감히 이런 바람까지 하며 이 책이 많이 읽혀지길 바라는 이유는, 저자의 섬과 갯벌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영영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해야만 하는 섬 문화에 대한 소명이, 돈벌이를 위해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 노인들만 남아 근근이 이어지고 있는 섬의 안타까운 현실이, 섬에도 어김없이 불고 있는 개발의 폐해가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만나는 많은 섬들이 농촌처럼 노인들만 남아 근근이 그 생활을 이어가고 있거나, 관광지 개발과 각종 편의시설로 원형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막연히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고 외칠 수만도 없다. 그렇다면 그 섬만의 독특한 그 무엇들을 누군가 기록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영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높다 할 수 있는데, 솔직히 어쩌면 이렇게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저 감탄스럽기만 하다. 책과 저자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30대와 40대를 섬사람들과 어민들을 만나며 보냈다. 그 사이 내 삶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섬사람들의 삶을 훔쳐 학위도 받았다. 몇 권의 책도 집필했다.…슬슬 욕심이 났다. '대한민국 모든 섬들을 내 발로 딛고 그 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자꾸만 섬도 육지로 바뀌고 있다. 다리를 놓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섬 살림이 자꾸 뭍 살림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바다를 땅처럼 이용하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 뭍사람들에게 또는 섬에 사는 뭍사람 같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섬사람들의 속살을 전하고 싶었다.…젊은이들은 뭍으로 나가고 노인들만 섬을 지키고 있다. 무인도로 변한 날을 기다리는 시한부 섬도 많다.  큰 도시에서 10분도 걸리지 않는데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섬도 있다.…섬이 궁금한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최소한 섬의 속살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분명 섬과 섬사람들이 달리 보일 것이다.
- <섬문화 답사기> 저자의 말에서

어촌사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해양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는 저자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섬과 갯벌 문화 관련 상당수의 글을 써오고 있다. <섬과 바다>, <다도해 사람들>, <해양생태와 해양문화>, <갯벌을 가다>, <새만금은 갯벌이다>, <김준의 갯벌이야기>, <대한민국 갯벌문화사전>, <한국 어촌사회학>, <바닷길과 섬> 등을 쓰기도 했다.

<대한민국 갯벌 문화사전>
 <대한민국 갯벌 문화사전>
ⓒ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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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대한민국 갯벌문화사전>(이후 출판사 펴냄)은, 전문가와 일반인들을 독자층으로 쓴 우리나라 유일한 갯벌 관련 사전(내가 아는 한)이다. 책이 소개하고 있는 갯벌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10곳과 저자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7곳이다.

갯벌의 생태적 특성부터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독특한 생활과 풍습, 문화, 어로 도구, 지역마다 다른 갯벌들의 특징, 독특한 갯살림, 특정 갯벌에서 나는 해산물과 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 그 소소한 것까지 자세하게 소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현지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한다는 것. '사전'이란 명칭이 붙었지만 사전 특유의 딱딱함 보다는 갯사람들의 순박한 인정과 살가움이 더 많이 느껴진다.

갯벌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갯벌에 나가거나 잠시 머무는 민박에서 무언가를 찾아 볼 수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갯벌 혹은 갯살림 관련 다양한 그림들을 넣은 것도 이 책의 특징 중 하나. 여하간 여러모로 활용도도 높고 자료가치 또한 높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섬문화 답사기 : 여수, 고흥편>ㅣ글과 사진:김준 | 서책 | 2012-05-07ㅣ정가 25,000원
<대한민국 갯벌 문화 사전>ㅣ글과 사진: 김준| 그림:안경자| 이후|2010-10-07ㅣ정가 23,000원



섬문화 답사기 : 여수, 고흥편 - 孤島의 일상과 역사에 관한 서사

김준 지음, 서책(2012)


태그:#섬, #갯벌, #바다, #답사기, #모정의 세월(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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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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