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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초 어느 날 저녁, 나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한 버스에 올라탔다. 다른 모든 버스에서처럼, 그 버스 역시 백인 좌석과 흑인 좌석이 나뉘어 있었다. 나는 흑인 좌석의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정류장을 지날수록 백인 탑승자들의 수가 늘더니 백인 좌석은 곧 꽉 차버렸다. 흑인 좌석이 따로 있다하더라도 백인 좌석이 다 차면 흑인들은 좌석을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백인인 운전기사가 내게 말했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쇼.'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 '당장 경찰을 부를테요.' 운전기사가 소리쳤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응수했다. 잠시 후 백인 경찰관 두 명이 버스에 올랐다." -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에서

흑인 시민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1913~2005.10.24)의 자서전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문예춘추사 펴냄)는 이렇게 시작한다.

몽고메리의 페어백화점 재봉사로 일하던 로자 파크스는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이런 일을 당한다. 이때 버스 기사는 로자 파크스를 비롯한 4명의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요구했고 다른 흑인들은 모두 자리를 양보했다. 로자 파크스만 양보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겉그림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겉그림
ⓒ 문예춘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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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는 체포되어 지문채취 등을 거친 후 감옥에 갇힌다. 이는 로자 파크스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다. 특히 미국 남부가, 남부 도시 중 몽고메리시가 흑인 차별이 유독 심했다.

그런데 이는 1950년대 미국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 백인 사회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00년이나 지났음에도 흑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흑백분리 제도를 만들어 백인과 흑인을 철저하게 분리, 차별했다. 

예를 들면 백인과 흑인은 한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고,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도 없었으며, 같은 수도에서 물도 먹을 수 없었다. 게다가 대중교통 분리 탑승제도로 백인석과 흑인석을 구분 지정해 놓는가 하면, 늦게 탄 백인이 앉을 자리가 없으면 흑인석에 앉아있던 흑인이 자리를 양보하도록 했다.

또한 흑인은 앞문으로 타 요금을 지불한 후 내려 뒷문으로 다시 타야하는 '특별 규칙'까지 적용시켰는데, 이때 흑인이 요금을 내고 뒷문으로 타려고 내리는 순간 내빼는 기사들도 많아 흑인들은 종종 낭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흑인들은 어떤 항변조치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당하거나 로자 파크스처럼 저항하다 감금되어 벌금형으로 풀려나야 했다. 당시 한 가정을 책임지는 흑인 어른일지라도 대부분의 흑인들은 시민권은 물론 투표권도 가질 수 없었다.

백인과 친하게 지내는 흑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백인들의 눈에 나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그 탓에 알고 지내는 흑인이 부당한 일을 당해도 외면하기 일쑤였고, 문제를 일으키는 흑인이 있으면 백인 입장을 헤아려 먼저 힐난하기도 했다.

표면상으로 사라진 '노예제도'... 여전히

표면상으로만 노예제도가 사라졌을 뿐 미국의 흑인들은 여전히 노예 상태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5년 12월 퇴근길의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 감금된 사건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사실 흑인들 대부분은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만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지 않으면 한 시간은 기본이고, 두세 시간 걸어 출근해야 하는 흑인까지 있었다. 또, 백인에게 고용된 이들이 많아 '버스 보이콧' 동참은 직장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 탓에 백인들은 버스 보이콧에 동참하는 흑인들이 얼마 안 되고, 그냥 두면 자연스럽 사그라질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몽고메리 거주 흑인 대부분이 직장을 잃어가면서까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에 동참한다. 이 운동은 무려 382일이나 지속된다.

1956년 2월, 몽고메리시 경찰은 "합당한 이유나 법적 근거 없이 버스 보이콧을 했다"는 이유로 로자 파크스를 비롯한 여든 아홉 명을 체포한다. 그리고 버스 보이콧이 계속될수록 직장을 잃는 흑인들이 늘어났다. 로자 파크스도, 그녀의 남편도 직장을 버스 보이콧 때문에 직장을 잃고 만다.

당시 흑인 인권 운동가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 보이콧에 동참했다. 그의 연설을 듣고자 흑인들이 모인 교회와 킹 목사의 집에 화염병이 날아드는 등 백인들의 협박과 폭력, 살인 등이 이어진다. 그러나 흑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보이콧을 계속해 결국 승리를 이끌어 낸다.  

1956년 6월 19일, 앨라배마 주 지방법원은 흑백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시의 조례는 수정헌법 제14조를 위반하고 있다고 판시한다. 11월 3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앨라배마 주 안에서만 운행하는 버스일지라도 흑인석과 백인석을 나누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시한다. 이로써 흑백분리탑승제도는 폐지되고 흑백통합버스제도(1956년 12월 21일)가 시행된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펼친 로자 파크스

흑백 버스 통합제도가 시행된 첫날인 1956년 12월 21일, 몽고메리의 한 버스 앞좌석에 앉은 로자(사진 UPI/Bettman)
 흑백 버스 통합제도가 시행된 첫날인 1956년 12월 21일, 몽고메리의 한 버스 앞좌석에 앉은 로자(사진 UPI/Bettman)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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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사진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이전에 흑인들은 절대 앉을 수 없었던, 백인전용 좌석에 로자 파크스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버스 탑승 시 흑인들의 권리 찾기로 시작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이후 미국 시민권 운동으로 번진다.

로자 파크스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이후 간이식당에서의 좌석분리나 고용 불평등과 같은 다양한 시민운동들을 이끌거나 동참한다. 그녀는 미국의 시민권 운동사는 물론 전세계 시민 운동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그날 버스에서 일어났다면 오늘날의 버락 오바마도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다. 참고로 로자 파크스는 미 행정부가 헌정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인 대통령자유메달을 받았으며, 미국 의회에 의해  '현대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로 칭송되기도 했다. 

1955년 그날, 로자 파크스 역시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종종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귀찮거나, 문제가 커지는 게 번거로워 부당함을 참기도 한다.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는 정의가 상실된 사회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무엇이 잘못된 관행을 자라게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ㅣ로자 파크스, 짐 해킨스 지음ㅣ문예춘추사ㅣ2012-3-15ㅣ값:13000원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짐 해스킨스 지음, 최성애 엮음, 문예춘추사(2012)


태그:#로자 파크스, #마틴 루터 킹, #시민 운동, #흑인 인권 운동가,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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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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