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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사전(1938) 속에 나옴
▲ 문세영의 모습 조선어사전(1938) 속에 나옴
ⓒ 문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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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64주년이 되는 해이고, 한글날 566주년을 앞두고 있다. 독립 국가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사에 대해 제대로 대우한다. 이승만 독재시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시기는 차치하고라도 문민정부 이후 현재까지도 최초로 제대로 된 우리말사전을 편찬한 문세영(1895-1952)의 생애와 업적은 잊혀졌다. 일제시기 문화운동 부분에서 혁혁한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도 못하였고, 정부로부터 흔한 표창장 하나 받지 못하였다.

문세영은 이승만 정권 출범 직후 "일제시기에 이승만은 사과즙만 먹고 살았으나, 나는 된장국만 먹고 독립운동을 했다. 일제시기에 나는 우리말사전을 만들었는데, 해방 후 대접이 없다"라고 분노하였다고 한다.

문세영의 업적이 지금까지 잊혀진 이유는 두 가지가 작용하였다. 첫째는 6·25전쟁 와중에 그가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가족의 몰락으로 그의 자취는 인멸되었다. 문세영의 아들인 문경준(1936년생, 현재 유일한 생존자, 현 77세)은 1950년 6·25전쟁이 터진 뒤, 7월경 아버지 문세영과 헤어진 뒤, 1953년 가을 서울 종로구 누상동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젊어서 목재소에서 노동일을 하고,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던 그는 필자에게 지금까지 아버지가 국가로부터 상을 받은 것도 전혀 없고,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에 대해 묻는 사람이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다고 하였다.

<조선어사전> 문세영이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이유

문경준의 현재 모습
▲ 문세영의 아들 문경준 문경준의 현재 모습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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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준은 6·25전쟁 때 실종된 아버지가 돌아오자 않자, 1952년 8월 5일에 사망한 것으로 신고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6·25전쟁 기간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문세영의 아들인 문경준이 두 차례나 국가보훈처에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달라고 신청을 하였으나, 번번이 선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둘째는, 우리나라 국어학 관련 단체와 국어학자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최초로 우리말사전을 편찬한 인물이고, 그의 국어사전이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전이었음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더더욱 그와 그의 사전이 조명되지 못한 배경에는 1957년과 1976년에 걸친 국어학자 이희승의 비판 발언(문세영이 이윤재의 원고를 도용했다고 주장)이 크게 작용하였다.

필자가 검토한 결과, 이희승의 문세영 비판의 근거는 자신의 발언밖에 없었다.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방증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희승의 비판과 반대되는 상황을 증언하는 기록은 많았다. 문세영이 사전 편찬을 위해 고군분투한 자료를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작성한 '이희승의 문세영 <조선어사전> 비판에 대한 검토'(<국학연구>제18집, 한국국학진흥원, 2011 봄·여름), '<조선어사전> 저자 문세영 연구'(<사총>73, 고려대 역사연구소, 2011, 5), '문세영 <조선어사전>의 편찬과정과 국어사전사적 의미'(<동방학지>제154집, 연세대 국학연구원, 2011, 6)라는 논문에서 상세히 밝혔다).

아마도 문세영이 6·25전쟁 기간에 행방불명되지 않았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국어학 전공자가 아닌 윤리교육 전공자가 우리말사전을 편찬한 사실이 국어학계에서 불편하게 여겼을 수 있다.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선어사전> 편찬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만규, 네 번째가 이극로, 다섯 번째가 최현배, 여섯 번째가 문세영임. <한글> 1935, 2, 20쪽
▲ 온양 세조대왕 비각 앞에서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들과 찍은 사진1935, 1, 4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만규, 네 번째가 이극로, 다섯 번째가 최현배, 여섯 번째가 문세영임. <한글> 1935, 2, 20쪽
ⓒ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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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영(1895-1952)은 1895년 12월 30일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173번지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보를 졸업한 뒤, 1916년 선진학문을 배우러 일본의 동경으로 건너갔다. 1917년에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 윤리교육과에 입학하였으며, 1921년에 졸업하였다. 동양대학 재학시절 우리민족에게 우리말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사전이 없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현대서적이나 고대서적에서 닥치는 대로 말을 뽑아 카드에 적어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대학재학 기간 우리민족을 각성시키고자 1920년 일시 귀국하여 동경유학생으로 조직된 문원사(文園社)의 일원으로 방정환·강성주·김진목 등과 함께 여름방학 기간에 전국순회강연을 하였다.

1921년에 동양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22년 9월부터 1925년까지 배재고보에서 수신과목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말 어휘 카드 작성을 계속하였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 근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2년에서 1928년까지 우리말 어휘 모음을 어느 정도 끝을 내었다.

근화학교를 사직한 뒤, 1929년부터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조선어사전간행회를 만들어놓았다. 매일 앉은뱅이 책상에서 앉아서 우리말 어휘를 정리·주해하기 시작하여, 10년간 정리와 교정 작업을 하였다. 사전 원고 작성을 시작한 지 4년이 될 무렵인 1932년에는 왼쪽 넓적다리에 마비증세가 와 반년동안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지내야했다. 이규진이라는 한의사를 만나, 다리 치료를 하여 일어서게 되었다. 다시 그는 조선어사전의 뜻풀이를 계속하였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문세영, 여섯 번째가 이윤재임.
▲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현충사에서(1935. 1.)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문세영, 여섯 번째가 이윤재임.
ⓒ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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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그도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의 회원이 되었고, 조선어학회가 추진 중인 표준어 사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1935년 1월과 8월에 각각 열린 표준어사정 제1독회와 제2독회에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이극로·최현배·이윤재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6년 7월에 열린 표준어사정 제3독회에 수정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6년 사전 원고가 주해된 카드가 완성된 이후, 박문서관의 사장인 노익형도 만나, 사전에 대한 출판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는 사전원고를 대동인쇄소에 넘기고 나서 3년간 교정을 보았다.

1936년에서 1937년 6월까지 문세영은 우리말사전을 편찬할 때 체계와 교정에서 한글학자인 이윤재의 지도를 받았다. 이윤재가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에 문세영이 교정을 마무리하여 1938년 7월 10일에 10만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사전>을 발행하였다. 사전 분량이 1,681쪽이었다. 초판 1천부를 발행하였고, 같은 해 12월 15일 재판 2천부를 찍었다. 동양대학에 입학한 1917년 23세부터 우리말 어휘 카드를 작성하기 시작한 시기까지 포함하면 사전 편찬에 투여한 기간이 22년이나 걸렸다.

사전 편찬 위해 심력과 전 재산 다 바친 문세영

1938년에 나옴
▲ <조선어사전>의 속표지 모습 1938년에 나옴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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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전이 남긴 국어사전사적 의미는 매우 컸다. 첫째로, 민족어 규범에 의거하여 최초로 편찬한 우리말사전이었다. 이 사전은 조선어학회가 발표한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을 토대로 하여 편찬하였다. 둘째로, 한글전용을 실천하였다는 점이다. 일제시기 일한혼용체의 일어 문장과 국한문혼용체의 조선어 문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어 현실에서 이 사전이 국문전용을 실천하였다는 데서 그 선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언론기관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매일신보>까지 조선어사전 출간 사실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1938년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처음 나오자, 소설가 현진건은 그 책에 실려 있는 어휘를 연구하려고 수십 번을 읽었다고 한다. 또 이 사전은 중국 관내의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하는 독립군의 사기를 높이는 빛나는 역할을 하였다(독립운동가 김학철의 저서). 문세영은 다시 1만 어휘를 추가하여 1940년에 11만 어휘의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을 편찬하였다. 분량은 1902쪽에 달하였다. 1942년 5월 20일에 재판이 나왔다.

이처럼 사전편찬을 위해 그는 자신의 심력과 전 재산을 바쳤다. 그 결과 그의 가정생활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빚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다시 1940년에서 1945년에 걸쳐  우리말 6만여 어휘를 수집해 두었다. 문세영은 나라 잃은 암울한 시기에 오직 우리말사전 편찬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여타의 모든 개인적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그 하나의 일에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해방 뒤 조선어학회는 1946년 7월 8일 우리글을 빛낸 3대 저술가를 발표하고 초빙하여 사은잔치를 베풀어주었다. 3대 저술가는 <조선문자급어학사>의 저자 김윤경, <우리말본>의 저자 최현배, 그리고 <조선어사전>의 저자 문세영이었다. 김윤경과 최현배는 현재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1949년 10월 25일 국어학자들이 열어준 '국어학도서 출판 기념회 축하회'에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일제의 잔인무도한 국어 말살책 밑에 무서운 감시와 위협과 학대 속에서 일편단심 민족 문화를 이어 살리고, 민족 만대의 행복을 위하여 날로 엄습하는 가지가지의 고초를 능히 이기어 눈물과 피로써 엮어낸 책들"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다.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은 해방 뒤에도 사용되다가, 이름이 1950년 <우리말 사전>으로 바뀌어 삼문사에서 발행되었다. <우리말 사전>은 1954년 4월에 7판까지 나왔다. <수정증보 조선어사전>(1940)도 1946년에 다시 영창서관에서 발간되었고, 1954년 <수정증보 국어대사전>으로 이름만 바꾸어 출간되었다.

1950년 5월에 기존의 사전을 보완하여 새로운 말, 현대어 등을 넣어 놓은 <최신판 표준 국어사전>은 1954년 3월에 발간되었다. 아울러 1951년 9월 2만 4천여 어휘가 수록된 우리말만으로 이루어진 <순전한 우리말 사전>을 출간하여 우리말의 보급에 헌신하였다. 이 사전은 1958년에 16판까지 나왔다.

<조선어사전>, 대한민국의 보배로운 국어사전

필자가 문세영 사전을 한 곳에 모아 찍음
▲ 현재 남아있는 여러 종류의 문세영 국어사전의 모습 필자가 문세영 사전을 한 곳에 모아 찍음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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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의 대표적인 4개의 국어사전 이외에도 그가 타계한 뒤, 무려 17종에 달하는 그의 우리말사전과 국어사전이 출간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종류의 그의 사전은 1957년 한글학회가 편찬한 <큰 사전> 출간 이전까지 국어사전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그의 일생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라는 말처럼, 35년간 일관되게 민족어사전의 완성을 위해 매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문세영의 우리말사전은 1945년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민족이 곧바로 국어사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1957년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과 1961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장장 23년간 우리민족의 대표적 국어사전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업적을 남긴 분을 여태까지 방치하였다.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은 대한민국의 보배로운 국어사전이다. 문세영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에서 표창장 하나 주지 않았다는 현실을 필자는 우리나라의 수치로 여길 수밖에 없다.

앞으로 필자는 문화체육부와 서울시와 종로구청에 건의하여 그의 생가(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59의 9)에 최소한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1938) 저자 문세영 선생의 생가 터'라는 표지석을 세워드리고, 문화체육부에 건의하여 '이달의 문화인물'로 문세영 선생을 선정하도록 건의하려고 한다. 이제라도 정부기관과 국어학계에서 관심을 갖고 정당한 대우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배화여자대학 뒤 나무 근처가 문세영 생가 터임
▲ 문세영 선생 집터 배화여자대학 뒤 나무 근처가 문세영 생가 터임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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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문세영, #조선어사전, #조선어학회, #문세영 생가 터, #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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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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